가문의 영광
전남 영광의 봄은 유난히 분주하다. 땅에서는 유채꽃과 벚꽃이 활짝피고, 바다에서는 조기가 올라와 그 유명한 영광 굴비를 한창 만들고 있다. 재규어 XF와 함께 영광의 봄을 경험하고 왔다.
시내에서는 마냥 조용하고 안락한 XF지만 고속도로를 타면 엄청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1세대와 비교하면 확실히 차가 가볍고 쉽게 나간다. 다이어트로 뺀 총중량은 190kg. 최고의 공신은 차체의 75%에 알루미늄을 사용한 신형 플랫폼과 역시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인제니움 디젤엔진이다. 무게는 가벼워졌지만, 전작 대비 차체의 강성은 28% 이상 강화했다. 고속 구간에서도 차체는 충분히 안정적이다.

지난 2008년 재규어는 타타 그룹에 인수되면서 격변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릴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재규어의 전체 판매율을 견인해야 했고, 특유의 고급스러움과 스포티함까지 표현해야 했다. 이 많은 숙제를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 바로 1세대 XF다. 이언 칼럼의 주도로 만든 이 차는 고풍스럽고 보수적인 영국 차 특유의 디자인을 탈피했고, 기존의 어떤 차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스타일로 가득했다. 그 덕분에 독일 차들과의 경쟁에서 선전하며 재규어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재규어는 지난해에 최고의 실적을 올렸다. 타타 그룹에 인수될 당시 4억 파운드가 넘는 순손실을 기록한 재규어랜드로버는 지난해에 20억 파운드(약 3조5000억 원)의 순이익을 냈다. 그 역전의 선봉장 중 하나가 바로 XF다. 말하자면 재규어 가문에 다시 한 번 영광을 안겨준 일등공신인 것이다. 그리고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2세대 XF가 발매됐다. 2세대 XF는 야심만만한 차다. ‘독일 차의 대안’으로 여기던 1세대와 달리 독일 차와의 본격적인 경쟁에 뛰어들겠다는 의지로 충만하다.
2세대 XF를 타고 떠난 곳은 전남 영광이다. 예부터 동해는 명태, 남해는 멸치, 서해는 조기가 으뜸이라 했다. 특히 조기는 특유의 맛과 식감으로 오랫동안 최고급 생선으로 꼽혔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것이 4월에 잡히는 조기다. 조기는 3~4월경이면 따뜻한 전남 앞바다에서 북상해 연평도 부근에서 산란을 시작한다. 모든 생선은 산란기에 잡은 것이 영양도 풍부하고 맛도 좋다. 전남의 조기가 유명한 것은 산란 직전에 잡히기 때문이다. 이 조기를 염장하고 말려 파는 것이 굴비, 그중에도 최고로 치는 것이 그 유명한 영광 굴비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법성포 굴비’가 맞다. 영광 굴비의 대부분이 해안을 끼고 있는 이곳 법성포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법성포가 굴비의 성지가 된 이유? 볕과 바람이 적절한 기후와 특유의 염장법 덕분이다. 법성포 굴비는 인근에서 생산하는 질 좋은 천일염을 이용해 충분히 재어놓는데, 소금에 재어두는 시간이나 양이 곧 이곳만의 비법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법성포 앞바다에선 조기를 잡기 힘들다고 한다. 원양어선이 늘어나면서 조기가 법성포 앞바다에 오기도 전에 다 잡히기 때문이다. 지금 법성포에서 파는 국산 조기나 굴비는 대부분 여수나 제주 등지에서 잡은 것이다.
법성포에서 2만 원 상당의 굴비 정식을 시키면 이런 메뉴가 나온다.
서울 강남에서 법성포까지 가는 길은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당진영덕고속도로를 거쳐 서해안고속도로를 빠져나온다. 법성포는 깡촌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수입차 열풍은 이곳에서도 대단했다. 거리를 달리는 차 10대 중 한 대 정도는 독일산 수입차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재규어는 꽤나 신기한 차였나 보다. 지나가던 중년의 사내가 우리를 보고 물었다. “거 무슨 차요? 멋있게 생겼네. 얼마나 허는가?”
법성포의 풍경은 아주 독특하다. 길가에 굴비 식당이 즐비하고, 그 옆으로는 드넓은 갯벌이 제 살결을 드러낸다. 한 발짝 옆에는 유채꽃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하늘에는 갈매기 떼가 우르르 지나다녔다. 제각각 본 적은 있어도 그것들이 한데 뒤엉켜 있는 풍경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영광이라서 가능한 풍경일 것이다.
멀리까지 왔으니 그 유명한 굴비 한번 먹어봐야 할 터였다. 한 굴비 정식집에 들어갔다. 나는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내는 밥상을 신뢰하지 않는다. 식당은 음식을 팔아 일정 수익을 내야 하는데, 반찬이 많으면 다른 데서 원가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차라리 제대로 된 한 가지 찬을 먹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식당 역시 찬은 마냥 푸짐했다. 조기구이와 굴비, 조기탕, 간장게장을 필두로 수많은 찬이 상 위로 올라왔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그런 수많은 굴빗집 중 하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상 위에 올린 반찬 하나하나가 맛있었다. 유명하다는 조기구이는 살이 고소하면서 연해 혀에서 녹는 것 같았다. 식당 사장인 김태봉 씨는 1973년부터 굴비를 취급했다. 서울에 3개 백화점(화신, 미도파, 신세계)만 있을 때부터 직접 서울까지 굴비를 납품하며 영광 굴비의 존재를 알렸다고 한다. 품질이 좋은 탓인지 강남의 한 고급 한식점에서는 이곳과 계약을 맺고 지금도 굴비를 조달받는다. 구이와 탕에 쓰인 조기는 국산이지만 보리굴비에 쓴 조기는 중국산이라고 했다. 중국산이라고는 해도 비슷한 해역에서 조업하기 때문에 국산과 사실상 차이는 없다고 했다. 갑자기 궁금했다. 왜 굳이 중국산임을 밝히는 걸까? 국산이라 해도 될 텐데. 원산지를 속이지 않는 것은 엄격한 정책 탓이다. 영광군은 관광이 주 수입원이다. 관광과 음식은 신뢰를 잃으면 끝이다. 군청 차원에서 식당에 대해 엄격한 검열을 하기 때문에 원산지를 속이면 바로 단속의 철퇴를 맞는다고 한다. 어쨌든 훌륭한 밥상이었다. 두당 2만 원으로 이 정도 음식을 먹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법성포에서 세끼를 먹었는데 이곳의 음식이 단연 훌륭했다. 식당 이름은 한울타리(061-356-2590)다.
불갑사 정문. 산길이 아닌 평지라 산책하기 좋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의 풍경.

법성포는 갯벌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다.

법성포 항의 일몰은 직접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법성포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백제불교최초도래지가 있다.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기원후 384년에 중국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 곳이다. 법성포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가리킨다. 고풍스러운 유적지라기보다는 깔끔하게 잘 정돈된 유원지의 느낌이 강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불교 신자라면 ‘성지순례’의 개념으로 방문해볼 만하겠다. 지난 3월 개통된 영광대교를 지나 30분 거리에 불갑사가 있다. 마라난타가 법성포에 도착한 이후 이곳에 절을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고려 말에 중흥기를 맞았으나 정유재란으로 모두 불탄 이후 16세기에 와서야 재건했다고 한다. 여느 유명 사찰처럼 웅장하지는 않으나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절이다. 특히 절을 둘러싼 불갑산은 산세가 험하지 않고 이파리가 야들야들한 나무가 무성해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불갑사에서 차로 20분 거리에는 원불교영산성지가 있다. 원불교는 20세기 초 교조 박중빈이 창시한 한국적 불교다. 불교를 기반으로 교리의 생활화, 대중화를 추구한다. 삼성미술관 리움 홍라희 관장은 독실한 원불교 신자로 알려졌고, 이건희 삼성 회장 역시 중산(重山)이라는 원불교 법호가 있을 정도다. 영산성지는 박중빈이 태어난 곳으로 그의 생가와 기도터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잘 정돈된 공간이거니와 건물의 보존 상태도 상당히 좋아 원불교 신자가 아니라 해도 한 번쯤 방문해볼 만하다. 인근에는 유명한 백수해안도로가 있다. 서해는 보통 해안선이 어지러운 데다 갯벌이 많은 탓에 멋있는 해안길이 드물지만 이곳은 다르다. 길도 곧고 푸른 바다의 풍경도 만끽할 수 있다. 서해에서 느끼는 동해랄까. 서해에서 흔치 않은 풍경인 만큼 꼭 들러보기 바란다.
영광에서는 곧 ‘곡우사리 굴비 축제’가 열린다. 곡우는 음력 3월의 절기를 말하는데, 곡우사리는 곡우의 중간 정도를 뜻한다. 이때 잡히는 조기를 최상급으로 친다. 올해도 4월 22일부터 24일까지 굴비 축제가 이어지는데 이때가 아니라 해도 5월 초까지는 제철 맞은 조기와 굴비의 맛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조기의 계절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는 나를 보며 한 상인이 말했다. “봄에 먹는 굴비가 최고긴 하지만 가을 굴비도 좋아. 몸집은 작지만 살이 연해서 맛이 부드럽거든. 가을에도 와봐요. 가을 전어 못지않으니까.” 나는 벌써부터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에디터 이기원 (lkw@noblesse.com)
사진 김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