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역사가 권하는 술 한잔
역사와 전통이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12세기, 동굴 안에 들어선 영국 최고령 주막부터 미국 건국의 역사를 함께한 뉴욕의 선술집까지, 맥주보다 맛있고 위스키보다 진한 올드 바 이야기.
500년 된 흑맥주의 맛_우 플레쿠(U Flekü)
맥주가 물보다 흔한 프라하에서도 유독 현지인들이 아끼는 유서 깊은 비어 홀이다. 몰트스터(맥주 원료인 맥아를 제조하는 직업)인 비트 스크르제메네츠가 처음 양조장을 연 것이 1499년이니 올해로 꼭 515년째가 된다. 1940년대 후반 체코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며 국영화되었지만, 정권이 몰락한 후 옛 소유주인 브르트니크 가문이 양조장과 레스토랑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렀다. 스태프들은 “500년이 넘도록 잠시도 쉬지 않고 맥주를 만들어온 양조장은 동부 유럽을 통틀어 이곳이 유일하다”며 입을 모은다. 물론 고풍스러운 원목 테이블과 모서리가 반질반질하게 닳은 의자들만 봐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블타바 강변에서 조금만 걸으면 우플레쿠가 나온다.
세계 각국의 춤과 음악이 있는 카바레쇼
악사들의 연주와 함께 맥주를 즐기는 손님들
대를 이어온 양조 시설
72개 좌석을 제공하는 올드 보헤미안 홀
일단 손님이 자리를 잡고 앉으면, 주문도 하기 전 당연하다는 듯 맥주잔부터 턱턱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놀랍게도 이곳에서 판매하는 맥주는 단 한 종류. 지하 양조장에서 전통 방식으로 제조하는 13도짜리 하우스 흑맥주다. 그러니까 ‘우연히’가 아니라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이라면 이 흑맥주 맛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과 홉, 이스트, 4가지 보리 맥아로 양조하는 우 플레쿠의 흑맥주는 연한 보리 맛과 쌉싸래하면서 깔끔한 뒷맛이 일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양조 전문가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맥주를 빚어내며 그 신선도를 유지하는데, 하루 판매량만 약 2000잔에 이르니 고단함보다는 긍지를 먼저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저희가 흑맥주 하나만 고집하는 건 500년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체코 맥주 하면 떠오르는 필스너의 세계적 명성도 이런 노력 덕분에 가능했죠.” 홍보담당자의 말이다.
맥주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간단한 안줏거리부터 푸짐한 한 끼 식사까지 다양한 음식이 메뉴판을 빼곡히 채운다. 많은 단골손님이 흑맥주에 곁들일 만한 요리로 콜레뇨(체코식 족발 요리)를 꼽는데, 바삭바삭한 껍질과 쫀득거리는 속살이 맥주 맛을 한껏 살려준단다. 물론 홀마다 돌아다니며 노래와 아코디언 연주를 선보이는 악사도 이곳의 명물이다. 이 유들유들한 베테랑 엔터테이너들은 해외 손님의 국적을 확인해 그 나라 전통음악을 멋들어지게 연주해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국인의 경우 아‘ 리랑’ 정도는 즉석에서 신청할 수 있다. 우 플레쿠에는 각기 다른 분위기의 비어 홀 8개와 정원을 포함해 총 1200개의 좌석이 있다. 매장에서 두 번째로 작은 홀인 슈트케이스는 과거 프라하 저널리스트들의 미팅 공간으로 자주 활용되었고, 나이츠 홀에서는 1499년부터 1883년까지 이곳 맥주 맛을 책임져온 양조 기술자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정원을 장식한 2개의 포탄은 30년 전쟁(1618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종교전쟁) 당시 실제로 사용한 것이다.
우 플레쿠의 자랑거리는 이뿐만이 아니다. 각국의 전통 춤과 음악 공연을 펼치는 카바레 쇼, 양조용 도구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뮤지엄 투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맥주 애호가를 맞는다. 물론 그 백미는 양조장 투어. 1937년부터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구리통과 냉각 시설, 셀러 등을 둘러보며 흑맥주 양조 과정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카바레 쇼와 양조장 투어는 사전에 예약해야 가능하며, 뮤지엄은 일요일에 문을 닫는다.
Webhttp://en.ufleku.cz
전설의 고향_예 올드 트립 투 예루살렘(Ye Olde Trip to Jerusalem)
영국 펍의 역사는 로빈 후드의 고향 노팅엄에서 시작됐다. 11세기 무렵 거대한 바위산에 성을 축조한 영국인은 성 아래 바위를 깎아 무수한 동굴을 만들었는데,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펍은 바로 그 동굴 안에 숨어 있다. 즉 1189년경 노팅엄 성의 맥주를 양조, 보관하기 위해 만든 동굴이 예 올드 트립 투 예루살렘의 기원이다. 오늘날 손님을 맞는 아기자기한 건물은 300여년 전 새로 증축한 것이고, 사실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한 동굴 안이 펍의 진짜 모습인 셈이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예 올드 트립 투 예루살렘 입구
서늘한 셀러 안
‘트립 앤 믹스’ 주문 시 세 종류의 에일 맥주를 맛볼 수 있다.
동굴 속 바
2층 라운지 내부
예 올드 트립 투 예루살렘이란 독특한 이름은 고대 영어와 십자군 전쟁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통용되는 일반적인 뜻과 달리, 옛 영국인에게 ‘트립(trip)’은 ‘정지’ 혹은 ‘휴식’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휴식을 취하는 장소’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실제로 십자군 원정 당시 사자왕 리처드 1세의 부름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기사가 이곳에 잠시 멈춰 맥주 한잔을 즐겼다는 일화는 노팅엄에서도 꽤 유명하다. 현재 펍은 와인, 칵테일 등 다양한 주류 리스트를 제공하지만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역시 오랜 전통의 로컬에일 맥주. ‘트립 앤 믹스’로 주문하면 세 종류의 에일을 혼합해 즐길 수 있다. 한편, 한여름에도 체온을 뚝뚝 떨어뜨리는 중세의 동굴은 온갖 괴담과 전설로 가득하다. 매니저 칼 깁슨의 말을 들어보자. “예 올드 트립 투 예루살렘 안에는 정말로 유령이 살아요. ‘요키’라는 쾌활한 유령인데, 지난 몇 년간 난로 주변이나 셀러 안에서 종종 저희 눈에 띄었죠. 특히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며 사람들을 골탕 먹이는 걸 아주 좋아해요.” 그의 말을 온전히 믿긴 힘들겠지만, 현재 셀러로 사용하는 동굴이 과거 노팅엄 성의 감옥이었다고 하니 아주 근거 없는 허풍같지는 않다.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명물은 ‘저주 받은 갤리언’이다. 오래전 한 뱃사람이 선물한 모형 범선으로, 과거 모형을 닦으려던 세 사람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지금은 유리 케이스 안에 담긴 채 2층 라운지에 전시되어 있다. 오랜 시간 누구도 손대려하지 않아 먼지와 거미줄을 잔뜩 뒤집어쓴 상태다.
Webhttp://triptojerusalem.com
뼈대 있는 선술집_ 프런시스 태번(Fraunces Tavern)
프런시스 태번의 역사는 미국 건국의 역사 그 자체다. 다소 과장 같지만 이건 국가가 인정한 사실이다. 그 시작은 1762년, 사업가 새뮤얼 프런시스가 뉴욕의 평범한 주택을 구입해 태번(선술집)으로 개조하면서부터다. 미국이 영국의 지배를 받던 18세기 후반, 선술집은 나라 안팎의 소식을 가장 신속하게 접할 수 있는 장소였다. 새뮤얼 프런시스의 능란한 영업 수완은 얼마 안 가 이곳을 뉴욕은 물론 미국 각지와 유럽에서 온 명사들의 사교장으로 탈바꿈시켰다. 특히 독립선언과 건국으로 이어지는 미국 역사상 가장 뜨거운 순간을 함께하며 몇몇 전설 같은 일화를 남겼다. 독립전쟁 중에는 대륙군의 전투를 지휘하는 본부 역할을 했는데, 그 때문에 영국 해군의 함포에 맞아 지붕이 무너지는 참사도 겪었다. 1783년 영국군이 철수한 뒤에는 독립의 주역들이 이곳에 모여 파티를 열었고, 뉴욕에서 대륙의회를 개최할 무렵엔 외무부와 재무부가 함께 입주해 임시정부 청사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맨해튼 한복판에 위치한 프런시스 태번
조지 워싱턴의 고별사 장면을 표현한 알론소 샤펠과 필리브라운의 작품
예스러운 간판
프런시스 태번을 유독 아낀 당대 명사는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8년간의 긴 임기를 마친 뒤 마지막 고별사의 장소로 이곳을 골랐을 정도니, 세기를 이어온 고고한 자부심도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이후에도 프런시스 태번은 수도가 필라델피아를 거쳐 워싱턴DC로 옮겨갈 때까지 미국 정계와 재계 인사들의 중요한 모임 장소로 군림했다. 1832년 몇 차례 심각한 화재를 겪으며 건물의 외형이 달라지긴 했지만, 오늘날 뉴욕 시 지정문화재이자 미국의 국가사적지로 등록되어 여전히 활발하게 영업 중이다. 건물 2층은 독립전쟁을 기리는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조지 워싱턴이 사용한 틀니와 그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관람객을 격동의 역사 한복판으로 이끈다. 1층 공간을 양분하는 건 레스토랑과 위스키 바. 특히 은밀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에서 200여 종류의 최상급 위스키와 와인, 맥주, 칵테일 메뉴를 즐길 수 있는 딩글 위스키 바는 여전히 뉴욕 사교계의 명소다.
Webhttp://ww.frauncestavern.com
에디터 류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