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도쿄 그리고 미술
11월 초 일본으로 향할 이유, 아트 위크 도쿄.
미술 애호가들에게 가을은 가장 바쁜 계절이다. 시작은 9월의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가 끊는다. 프리즈 런던, 아트 바젤 파리, 아트 타이베이는 놓칠 수 없는 10월의 아트 페어. 9월의 광주비엔날레, 10월의 방콕 아트 비엔날레가 열리는 짝수 해에는 발걸음이 더욱 분주해진다. 11월에는 상하이 ART 021과 웨스트번드 아트 & 디자인 아트 페어가 기다린다. 그리고 하나 더. 매년 11월 첫째 주 도쿄 전역을 미술로 물들이는 아트 위크 도쿄(Art Week Tokyo, 이하 AWT)가 있다.
AWT는 도쿄 현대미술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국내외에 알리고자 마련된 행사다. 아트 바젤과 협업하고, 일본 문화청의 지원을 받아 일본 현대미술 플랫폼이 주최한다. 2021년 팬데믹 상황에서 소프트 론칭 형태로 첫선을 보였고, 이듬해 정식 론칭해 일본 특유의 느린 호흡으로 착실히 성장 중이다. 도시 전체가 무대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AWT는 흔한 아트 페어나 비엔날레가 아니다. 각종 미술 공간의 참여로 완성되는 거대한 예술 쇼케이스다. 11월 7일부터 나흘간 열린 올해 AWT에는 53곳이 함께했다. 와타리움, 아티존 뮤지엄, 테이크 니나가와 등 작년의 주요 멤버는 건재하고 샤넬 넥서스 홀, 페이스 등이 새로 합류했다.
이번 행사를 취재하며 유독 인상 깊은 장면은 핵심 프로그램인 AWT 포커스였다. 호텔 더 오쿠라 도쿄 부지 내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오쿠라 집고관에서 열린 이 프로그램은 세일즈 플랫폼이자 부티크 페어의 정체성을 지닌다. 기본적으로 판매가 목적이지만, 미술관급 큐레이팅으로 세련되게 작품을 내보이는 것이 특징. 올해는 유명 큐레이터 마미 가타오카가 ‘지구, 바람, 불: 아시아에서 본 미래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보이지 않는 에너지에 주목한 전시를 꾸렸다. 국제갤러리가 내놓은 양혜규의 작품을 비롯해 수준 높은 현대미술이 고풍스러운 공간에 녹아든 풍경은 누구에게나 오래도록 기억될 만하다. 뇌리에 새겨진 다른 장면으로는 아트 애호가의 휴식처인 AWT 바(bar)가 있다. 트렌디한 미나미-아오야마 지구 중심부에 설치한 팝업 바에는 테이블도, 의자도 없다. 굴곡진 언덕 모양 구조물이 모든 역할을 대신하는 이색적 분위기 속에서 스타 셰프 미야 엔메이지의 한입 간식과 에이 아라카와-내쉬 등 작가 3인이 고안한 실험적 칵테일을 즐길 수 있었다. SMBC 이스트 타워 로비의 파빌리온에서 영상 작품 14편을 상영한 AWT 비디오, 다양한 수준의 예술 담론을 준비한 AWT 토크도 행사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물론 AWT의 진짜 매력은 도쿄 곳곳에서 펼쳐지는 전시에 있다. “AWT 시기에 맞춰 최고 전시를 준비하는 곳이 늘고 있어요. 프리즈 서울 기간 한국의 갤러리와 미술관이 그리하는 것처럼요.” 가나 가와니시 갤러리의 디렉터 가나 가와니시의 말처럼 AWT를 기준으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양질의 전시가 많다. 1월 19일까지 열리는 모리 미술관의 루이스 부르주아 전시가 대표적이다. 27년 만에 열리는 가장 큰 규모의 일본 개인전으로, 아시아에서 처음 공개한 작품 등 100여 점을 통해 그녀의 광활한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다. 도쿄 현대미술관의 다카하시 류타로 컬렉션 전시도 뜻깊었다. 정신과 의사 다카하시 류타로가 모은 3500여 점의 작품은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일본 현대미술 컬렉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름이 익숙지 않은 라이징 스타부터 쿠사마 야요이 같은 거장까지 전시장을 가득 채운 115인의 작품은 투어의 방향을 잡는 등대 역할을 했다.
블룸에서는 네오 팝아트의 아이콘 나라 요시토모의 신작 회화와 드로잉 작품을, 갤러리 고야나기에서는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주인공이던 다바이모의 비디오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산업용 재봉틀로 현대사회의 노동과 자본주의 문제를 고찰하는 중견 작가 아오야마 사토루는 미즈마 아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치렀고, 시공간에 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사운드의 잠재력을 탐구하는 신진 작가 미유 호소이의 갤러리38 전시는 12월 22일까지 계속된다. 산재된 미술관과 갤러리는 AWT 버스가 연결했다. 여러 노선에서 무료 버스를 짧은 간격으로 운행해 어느 때보다 쉽게 도쿄 아트 신을 탐색할 수 있었다. 특히 버스 안에는 베를린·도쿄 파트너십 30주년을 기념해 말테 바르치, 산티아고 시에라 등 장소 특정적 작품을 설치해 재미와 의미를 더했다. AWT는 버스마저 예술적이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도시 중심부에서 벗어나 숨은 보석 같은 갤러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메구로구 주거 지역 내 겸손한 모양으로 자리한 갤러리 이사야 대표인 이사야는 “미술이 강세인 곳은 아니지만, 인근에 작은 사찰이 있는 등 조용한 이곳에 갤러리를 열었어요. 주로 30~40대 젊은 작가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습니다”라며 공간을 소개했다. 카드보드 공장을 전시장으로 탈바꿈한 무진토 프로덕션, 옛 우체국 건물을 개조한 웨이팅 룸은 무엇이든 빨리 짓고 부수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성질의 갤러리라 더욱 특별해 보였다. 모르던 곳을 하나둘 알아가는 과정에서 마주한 도쿄의 속살, 가을 정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미술 애호가뿐 아니라 도쿄를 색다른 방식으로 즐기고 싶은 이에게도 좋은 선택지가 되어줄 것이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