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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 미술품 기증

LIFESTYLE

미술품 기증이 ‘절실한’ 미술관과 떳떳하게 기증할 곳을 ‘찾지 못하는’ 예비 기증자들. 이들을 제대로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장품의 80% 이상이 기증품으로 채워져 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지난해 4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화장품 회사 에스티 로더의 레너드 로더 명예회장이 37년간 수집한 10억 달러(약 1조 1300억 원) 상당의 미술품 78점을 기증했다. 기증품은 모두 피카소와 브라크, 레제 등 거장의 작품. 로더 명예회장은 연단에 올라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입체주의 작품을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관람하고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증을 결심했습니다.” 그의 연설은 단순 명쾌했다. 연설이 끝나자 곳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토머스 캠벨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은 “이런 기증이야말로 진정한 변환(Truly Transformational)”이라며 샴페인을 터트렸다.

이번엔 한국의 경우. 지난해 11월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외국에 내세울 만한 유명 소장품이 없다. MoMA의 ‘별이 빛나는 밤’, 루브르의 ‘모나리자’ 같은 작품을 한 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 소장품 구입 예산은 36억 원 남짓. 1년 예산을 탈탈 털어도 피카소의 작품 하나 사기에 빠듯하다. 7000여 점의 소장품으로 전시실을 채울 순 있지만, 작품의 수준이 문제다. 해외 미술관과 비교해 국내 미술관의 소장품이 빈약한 건 바로 기증 부족 때문. MoMA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소장품의 80% 이상이 기증품으로 채워졌지만, 우리나라는 미술품 기증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더불어 제도적 혜택이 거의 없어 누구도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간 국내의 미술품 기증은 작가에게 받거나 유족이 상속세를 피하려고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수준 높은 컬렉션이 나올 수 없었다. 일례로 박수근과 이중섭은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지만, 그들의 이름을 딴 미술관은 예산이 부족하고 기증 작품이 없어 정작 번듯한 작품 한 점 가지고 있지 않다. 이 같은 실정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장엽 학예연구2팀장은 “수십억짜리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하는 풍토를 만들려면 먼저 기증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이를 지지하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미술품 기증은 공공을 위한 일이며, 현세대는 물론 다음 세대를 위해 투자하는 의미 있는 사회 환원 활동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선 미술품을 기부하고 싶어도 그 가격을 제대로 산정할 수 없는 것부터 큰 문제다. ‘정가 없는 미술품’에 어떻게 세제 혜택을 주느냐는 것이 정부의 태도다. 심지어 국세청은 그것이 실제 거래 가격이 맞느냐는 의문까지 내비친다. 한 예로 수년 전 자신의 소장품으로 개인 미술관을 연 한 컬렉터가 세무조사까지 받았다는 ‘흑역사’도 전해진다. 그림 가진 이를 색안경 낀 눈으로 보는 구태의연한 인식 때문에 누구도 작품을 기증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미술품 기증자에 대한 미술관의 대우도 문제다. 기증자가 어렵게 미술품 기증을 결심했지만, 유지 보수의 문제로 미술관 측에서 꺼리는 경우다. 혹여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기증받는다 해도, 대부분 한두 달간 기증전을 열곤 그대로 창고에 넣어버린다. 적은 예산으로 기증품을 관리해야 하는 미술관의 입장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큰 결심을 한 기증자가 적어도 ‘섭섭함’보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세제 혜택’일 것이다.

1 지난해 11월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외국에 내세울 만한 유명 소장품이 없다.
2 재일교포 아트 컬렉터 하정웅은 지금껏 수천억 원의 미술품을 국내 미술관에 기증했다.
3 하정웅이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이우환 작가의 ‘From Line’

‘통 큰 기증자’로 유명한 재일교포 아트 컬렉터 하정웅은 광주시립미술관에 지금껏 2000점 이상의 작품을 기증했다. 그는 선친의 고향인 영암군에도 2700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또 부산과 포항의 시립미술관에도 수백 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그의 기증품엔 이우환과 재일교포 작가인 손아유, 헨리 밀러, 세키네 노부오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이 포함돼 있었다. 평가액만 봐도 수천억 원에 가깝다. 하지만 그가 미술품 기증으로 세금 혜택 등 금전적 혜택을 얻은 것은 없다.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이라는 타이틀과 정부가 주는 보관문화훈장, 선친 고향인 영암군에서 그의 기증품을 중심으로 군립 하(河)미술관을 만들어놓은 것이 전부다. 물론 국내에서도 기증자에게 혜택을 주긴 한다. 국립이 아닌 공립 미술관이 기증받은 경우 기증 작품의 평가액 중 20%를 사례금으로 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달라고 한 경우도, 준 경우도 아직 없다.

미술품 기증을 활성화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미술관에 미술품을 기증할 때 세제 혜택을 주는 것이다. 미국은 개인 기증 미술품 평가액의 100%를 소득세 중 일정 한도 내에서 빼준다. 영국은 개인과 기업이 미술관에 작품을 기부할 경우 한도 없이 소득공제와 비용 처리를 할 수 있다. 프랑스는 기업이 미술품을 국가 기관에 기증하거나 국 . 공립 미술관의 미술품 구매 비용을 지원하면 해당 금액의 90%를 세액에서 공제해준다. 가히 파격적인 세금 감면 제도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기업이 미술품을 살 때 건당 500만 원까지 비용 처리를 해주는 정도가 전부다.

한국미술산업발전협의회 정준모 실무위원장은 “부자들이 미술품을 기증하게 하는 건 제도가 해야 할 일이며, 세금을 내느니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는 게 이익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게 우선”이라고 말한다. 기부밖에 모르는 외국의 ‘착한 부자’들도 제도가 만들어낸 부분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열린 국내의 미술 문화 발전을 도모하는 한 세미나에서 ‘미술관 . 박물관에 예술품을 기부하면 이를 법정 기부액으로 인정해 기부자에게 35% 정도의 소득세 감면 효과가 발생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하자’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껏 국내에서 미술품 기증으로 법적 혜택을 받은 이는 거의 없다. 근거 규정도 복잡할뿐더러, 여러 힘든 과정을 거쳐 혜택을 받더라도 기부 미술품의 정상 가치 중 10%도 감면받지 못해 대부분 포기하기 때문이다. 결국 국내의 국 . 공립 미술관은 정부 예산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고, 재정 또한 빈곤해 소장품 수준 역시 답보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술관의 소장품은 해당 미술관의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국내의 미술관은 기대만큼 괜찮은 작품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예산 부족도 문제지만, 기증을 통해 미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뒷받침돼야 한다. 정부에서 법적으로 기증 미술품에 제대로 된 세제 혜택을 적용하면 소장품 확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들이 긴 여행 끝에 어느 한곳에 모여 멋들어진 유산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뉴스가 하루빨리 우리나라에서도 들렸으면 좋겠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