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과 그의 딸
거장이 남긴 작품 속에 숨은 또 하나의 이야기. 앙리 마티스와 그가 초상화에 즐겨 그린 장녀 마르그리트는 단순한 아버지와 딸, 화가와 모델 관계를 넘어 예술적 동반자였다. 파리 현대미술관에서 8월 24일까지 열리는 전시 〈마티스와 마르그리트, 아버지의 시선〉은 그 오랜 동행과 숨겨진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초상화에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얼굴이 있다. 푸른색 옷을 입고 검은 고양이를 안고 있거나, 높은 칼라 또는 검은 리본으로 목을 가린 채 화면 밖을 응시하는 소녀. 명민해 보이는 이 얼굴의 주인공은 마티스의 첫째 딸, 마르그리트 뒤튀 마티스(Marguerite Duthuit Matisse, 1894~1982)다. 하지만 초상화로 남은 얼굴 외에 그녀의 삶은 오랫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파리 현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Paris, MAM)이 4월 4일부터 8월 24일까지 개최하는 전시 〈마티스와 마르그리트, 아버지의 시선(Matisse and Marguerite: Through Her Father’s Eyes)〉의 기획이 시작된다. 이 전시는 마티스가 딸을 그린 초상화를 중심으로 드로잉, 판화, 조각, 도자기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부녀의 관계와 마르그리트의 다층적 생애를 따라간다. 전시를 통해 선보이는 100점이 넘는 작품 중에는 마르그리트가 모델이 아닌 작가로서 남긴 그림도 포함된다.
가장 조용한 기도문
마르그리트는 파리에 막 정착한 24세 무명 화가 마티스와 그의 모델 카롤린 조블로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티스는 카롤린과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마르그리트를 자신의 딸로 인정하고, 후에 결혼한 아멜리가 낳은 장(1899년생), 피에르(1900년생)와 함께 새로운 가족을 이뤘다. 새엄마 아멜리는 마르그리트를 친딸처럼 사랑했으며, 마르그리트가 “우리는 마치 한 손의 다섯 손가락 같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가족 간 유대가 깊었다. 마르그리트는 마티스의 예술 세계를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증인이다. 학교 대신 집에서 교육받은 그녀는 작업실에서 유화물감을 세척할 때 사용하는 테레빈유 냄새를 “집 안 가득 번지던 자장가”라고 회고할 정도로 대부분의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보내며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모델이 되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작업실 조수로서 아버지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마티스가 바토라부아르의 피카소 작업실을 방문해 ‘아비뇽의 처녀들’ 습작을 처음 보았을 때에도 마르그리트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당시 마티스와 피카소가 우정의 증표로 작품을 교환했는데, 피카소가 마르그리트 초상화 중 하나를 선택했다는 일화 역시 어린 그녀가 당대 예술계 인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말해준다. 훗날 “우리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모든 삶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을 때, 마티스는 어린 마르그리트의 눈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 속 해맑은 모습과 달리 마르그리트의 어린 시절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여섯 살 때 디프테리아를 치료하기 위해 기관절개술을 받았고, 목에 남은 흉터는 이후 오랜 세월 통증과 불편함을 안겨주며 아버지의 커다란 근심거리가 되었다. 마티스가 그린 마르그리트 초상화에 검은 벨벳 리본이나 높은 칼라의 블라우스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 역시 수술 흉터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유명한 마르그리트 초상화이자 마티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마르그리트와 검은 고양이(Marguerite au Chat Noir)’(1910)에서도 마르그리트의 목을 가린 높은 칼라가 두드러진다. 생전에 마티스는 이 작품을 ‘가장 조용한 기도문’이라 일컬으며 평생 판매하지 않고 곁에 둔 채 아낀 것으로 알려졌다.
예술적 모험의 동반자
마르그리트를 그린 초상화는 마티스의 예술적 진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야수파 초기의 ‘책 읽는 마르그리트(Marguerite Lisant)’(1906)부터 큐비즘 시기의 ‘흰 머리와 분홍 얼굴(Tête Blanche et Rose)’(1914~1915), 니스의 빛과 색채로 충만한 ‘꽃 축제(La Fête des Fleurs)’(1922)에 이르기까지 마르그리트의 얼굴은 마티스의 예술 실험과 화풍의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티스와 마르그리트, 아버지의 시선〉 전시를 기획한 MAM의 큐레이터 샤를로트 바라-마빌은 전시 서문을 통해 마티스가 “이 그림이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함께 가줄래?”라고 물으면 마르그리트는 언제나 고개를 끄덕였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둘의 관계가 아버지와 딸 또는 화가와 모델을 넘어 예술적 모험에 함께한 동반자였음을 강조한다. 다양한 시기, 다양한 기법으로 등장하는 마르그리트는 그 자체로 마티스 예술 세계의 풍부함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얼굴이다. 마르그리트 그 자신도 예술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고립된 스무 살 무렵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그녀는 1915년경 강렬한 표현력이 인상적인 자화상을 그리기에 이른다. 그 이듬해에는 피카소, 앙드레 로트 등과 함께 그룹전에 참여했다. 마리 로랑생과 쉬잔 발라동 등 당대 파리 미술계에서 주목받던 여성 예술가와 함께한 〈프랑스 여성 화가 전시회〉(1925)에 출품한 작품 중 2점은 미국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소장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마티스도 딸의 작품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했지만 화가로서 그녀의 경력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그녀는 “가족 중 한 명만 예술가면 충분해요”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마티스의 딸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시 큐레이터 바라-마빌의 말처럼 마티스라는 거장의 그림자에 가려 자신의 예술이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1935년 잠시 시도한 패션 디자인 역시 스스로 작품을 파기하며 짧게 끝을 맺었다.
레지스탕스, 귀환 그리고 아버지의 유산
마르그리트 생애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찾아왔다. 그녀는 새엄마 아멜리, 이복남매 피에르와 함께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뉴욕으로 건너가 아트 딜러로 성공한 피에르는 당시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유대인 예술가들을 도왔고, 1942년엔 망명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남아 레지스탕스 조직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며 불법 출판물을 배달하던 마르그리트는 종전이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독일 경찰에게 체포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수개월간 감옥 생활 끝에 마르그리트는 강제수용소로 향하는 수송 열차에 실려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국경 부근에서 연합군의 공습으로 열차가 탈선하자 숲으로 뛰어들어 극적으로 탈출했다.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딸의 모습을 본 마티스는 한동안 목탄으로만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며 “물감의 환희보다 숨결의 흔적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전시 마지막 방을 장식한 2점의 섬세한 목탄화에는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딸을 향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근심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아버지의 위대한 예술을 지키는 데 헌신했다. 화가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가 “인쇄업자에게 나보다 까다로운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야. 바로 마티스의 딸이지!”라고 농담 섞어 한 말이 전해질 정도다. 그녀는 판화의 색 교정은 물론 마티스 말년의 주요 프로젝트였던 모노그래프 〈재즈(Jazz)〉(1947) 출간, 카토캉브레지(1952)와 니스(1963)의 마티스 미술관 설립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1954년 11월 3일, 마티스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도 마르그리트는 그 곁을 지켰다. 그녀가 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린 동료는 피카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아들 클로드 뒤튀의 도움을 받아 마티스의 조각 작품 카탈로그 레조네를 완성하는 등 사망 직전까지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유산을 정리하고 세상에 알리는 일에 전념했다.

왼쪽 Henriette Darricarrère, Séance de Pose à Nice pour le Tableau Conversation Sousles Oliviers(Marguerite et Henri Matisse), 1921. © Archives Henri Matisse.
오른쪽 Henri Matisse, Marguerite, Ink on Paper, 35×26.5cm, 1906~1907. © Christie’s Images / Bridgeman Images.
레지스탕스, 귀환 그리고 아버지의 유산
마르그리트 생애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찾아왔다. 그녀는 새엄마 아멜리, 이복남매 피에르와 함께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뉴욕으로 건너가 아트 딜러로 성공한 피에르는 당시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유대인 예술가들을 도왔고, 1942년엔 망명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남아 레지스탕스 조직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며 불법 출판물을 배달하던 마르그리트는 종전이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독일 경찰에게 체포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수개월간 감옥 생활 끝에 마르그리트는 강제수용소로 향하는 수송 열차에 실려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국경 부근에서 연합군의 공습으로 열차가 탈선하자 숲으로 뛰어들어 극적으로 탈출했다.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딸의 모습을 본 마티스는 한동안 목탄으로만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며 “물감의 환희보다 숨결의 흔적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전시 마지막 방을 장식한 2점의 섬세한 목탄화에는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딸을 향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근심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아버지의 위대한 예술을 지키는 데 헌신했다. 화가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가 “인쇄업자에게 나보다 까다로운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야. 바로 마티스의 딸이지!”라고 농담 섞어 한 말이 전해질 정도다. 그녀는 판화의 색 교정은 물론 마티스 말년의 주요 프로젝트였던 모노그래프 〈재즈(Jazz)〉(1947) 출간, 카토캉브레지(1952)와 니스(1963)의 마티스 미술관 설립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1954년 11월 3일, 마티스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도 마르그리트는 그 곁을 지켰다. 그녀가 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린 동료는 피카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아들 클로드 뒤튀의 도움을 받아 마티스의 조각 작품 카탈로그 레조네를 완성하는 등 사망 직전까지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유산을 정리하고 세상에 알리는 일에 전념했다.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
사진 M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