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운명적 악기
음악사는 바로 이런 순간에 다시 쓰인다. 탁월한 비르투오소가 이름이 곧 소리를 보장하는 명기(名器)를 만났을 때.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수집해온 스위스의 하비스로이팅거 재단이 결성한 스트라디바리 콰르텟. 재단이 소장한 악기를 사용한다.
현악기 연주자의 프로필을 읽다 보면 마지막 즈음에 종종 따라붙는 정보가 있다. 몇년도에 제작한 어느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현재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유명 연주자들은 대부분 17~18세기에 만든 고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흔히 명품 현악기로 알려진 스트라디바리우스, 과르네리, 과다니니 등은 악기를 생산한 가문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그 밖에도 잘 알려진 고악기는 더 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스승인 아마티를 비롯해 그란치노, 몬타냐나 등 수백 년 전 이탈리아의 명장들이 만든 현악기는 연주자에게 꿈같은 이름이다. 명기의 소리를 제대로 표현할 만큼 기량을 갖춰야하고, 이를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나 후원을 받을 만한 인연이 있어야 하는 등 연주자가 좋은 고악기를 갖는 건 마치 평생의 n배필을 만나는 것처럼 쉽지 않은, 운명 같은 일이다.
일반적으로 고악기의 가격은 억대를 넘어서고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경우 수십억 원을 호가한다. 비싸고 귀하기 때문에 이슈가되는 일도 많다. 크리스티, 소더비 등 경매장에 등장하는 고악기의 거래액은 어김없이 뉴스가 되곤 한다.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진이 2010년 런던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도난당했다가 3년 뒤 영국 경찰이 찾아낸 이야기나, 미국의 거장 첼리스트 린 하렐이 약 50억 원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택시 트렁크에 두고 내렸다가 기사의 도움으로 되찾은 사연 등 가슴 철렁한 뉴스가 들려올 때도 있다.
뛰어난 완성도와 희소성 때문에 쉽게 가질 수 없는 악기가 연주자를 만나는 방식 중, 재단에서 악기를 구입해 아티스트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악기 대여 제도는 현대적 후원의 바람직한 예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금호문화재단이 1993년부터 고악기를 무상으로 임대하는 악기 은행 제도를 운영해 젊은 연주자들을 일정 기간 동안 후원한다. 금호문화재단은 총 10대의 고악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난 2월과 3월에는 새롭게 후원할 연주자들을 선정하기 위해 악기 오디션을 진행했다. 그 결과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빈이 1794년산 과다니니 크레모나를, 김동현이 1763년산 과다니니 파르마를, 김다미가 1740년산 도미니쿠스 몬타냐나를 3년간 사용하게 됐다. 6대의 고악기를 보유한 삼성문화재단도 1997년부터 악기 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금호문화재단이 오디션을 통해 젊은 연주자를 선발, 지원하는 것과 달리 삼성문화재단은 미국 스트라디바리 소사이어티 악기 은행에서 연주자를 추천받아 대여하는 것이 차이점. 클라라 주미 강이 삼성문화재단에서 후원받은 1708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한다.
자신이 연주하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들고 선 막심 벤게로프. 5월 31일 내한 공연을 한다.
ⓒ B Ealovega
해외에서는 악기 지원이 더욱 활발히 이뤄진다. 한 예로 스위스의 하비스로이팅거(Habisreutinger) 재단은 정기적으로 스트라디바리우스 악기 전시회를 주재하는데, 2007년 재단이 선택한 연주자들에게 악기를 대여하며 스트라디바리 콰르텟을 창단했다. 4월 27일 서울에서 첫 내한 공연을 펼치는 이 콰르텟의 단원들이 연주하는 악기의 가치는 도합 170억 원이 넘는다. 재단 차원의 체계적 후원 외에,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개인적인 후원자도 많다. 음악을 사랑하는 독지가나 고악기 컬렉터가 특정 연주자에게 악기를 임대해주는 경우다. 때론 좋아하는 연주자가 자신이 수집한 악기를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선물’하는 경우도 있다. 수백 년 전 음악가들이 귀족의 후원을 받아 작곡하고 연주하던 것과 흡사한 형태의 후원이다.
악기는 연주자에게 곧 목소리다. 명품 악기 중에서도 종종 비교되는 것은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의 소리. 독일 미텐발트 바이올린 제작 학교를 졸업하고 마이스터를 취득한 스트라디 공방의 김동인 대표는 제작자의 생활환경이 악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스트라디바리는 많은 제자를 두고 다작하면서 부를 쌓았고, 섬세하면서 빈틈없는 악기를 만들었다. 반면 과르네리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과르네리 델 제수를 만든 주세페 과르네리는 알코올중독에 빠져 불안정한 생활을 했는데, 그런 면이 악기에도 드러난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악기가 음색이 곱고 화려하다면 과르네리는 굵고 강하며 남성적인 느낌이다. 모두 훌륭한 악기로 평가받는 만큼 음색에 대한 선호도는 연주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다. 다만 확실한 건 이런 명품 고악기를 두루 사용하며 비교할 기회를 갖는 건 연주자에게 엄청난 행운이라는 사실. 5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르는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찬양하듯’ 좋아하는 연주자다. 그는 1727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Ex-Kreutzer’를 사용하며 악기와 자신을 ‘부부 관계’에 비유하곤 한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도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는 연주자. 독일 은행이 소유한 악기를 몇 년간 사용하다 작년 니폰 뮤직 파운데이션의 후원으로 1702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Lord Newlands’를 받았다. “섬세하면서도 큰 홀에서 소리가 객석 끝까지 뻗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악기”라고 표현하는 그녀는 5월 29일 LG아트센터에서 이 악기로 바흐 무반주 전곡 리사이틀을 펼친다. 과르네리의 거친 매력에 끌린 연주자도 많다. 5월 1일 경기필하모닉과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는 핀커스 주커만은 1742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를 사용한다. 또 사라 장이 연주하는 1717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는 아이작 스턴이 사용하던, 거장의 혼이 서린 바이올린. 예전에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다 지금은 과르네리를 연주하는 정경화는 “스트라디바리우스는 고고한 귀족 같고, 과르네리는 소박한 농부같다”는 말로 악기의 독특한 느낌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오래된 악기가 더 좋은 소리를 내는 이유는 뭘까? 세월이 흐르며 기술은 더 발전했을 텐데 수백 년 전에 나온 악기에 버금가는 명기가 더 이상 탄생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과학자들은 그 비밀을 밝히기 위해 이미 많은 연구를 했다. 고악기를 CT 촬영하고 나무의 밀도를 정밀 분석한 뒤 그들이 내놓은 연구 결과는 이렇다. 당시는 기온이 낮고 강수량이 적어 소빙기로 불리는 시기였고, 그래서 나무의 성장 속도가 느려 밀도가 촘촘한 좋은 목재를 수급할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날씨만으로 뛰어난 악기의 탄생 요인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트라디 공방의 김동인 대표는 “좋은 연주자를 만나고 필요할 때마다 수리사에게 적절한 처방을 받는 것이 악기의 미래를 결정한다. 시간이 흐르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악기도 연륜이 생긴다. 나이가 들면서 더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친구와 포도주만 오래된 것이 좋은 게 아니라, 잘 만든 현악기도 그렇다. 수백 년 세월을 겪은 고악기의 소리를 감상하며 시간의 가치를 가늠해보는 건 어떨까. 올봄, 기다리던 많은 연주자가 무대에 서는 한국의 여러 공연장에서 말이다.
에디터 | 안미영 (myah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