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
박물관 유물을 우리 삶과 연결하는 피오 아바드

Pio Abad. © Tate.
피오 아바드 Pio Abad
필리핀 대학교(University of the Philippines)에서 파인 아트를, 글래스고 예술학교(Glasgow School of Art)에서 회화와 판화를 전공하고, 영국 왕립예술원(Royal Academy of Arts)에서 파인 아트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 참가해 국내 관람객에게도 이름을 알렸고,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Whitechapel Gallery), 도쿄도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 등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Installation View of Pio Abad’s Presentation in Turner Prize 2024 at Tate Britain. Photo by Andy Keate.

Installation View, Pio Abad’s Presentation in Turner Prize 2024 at Tate Britain. Photo by Andy Keate.
올 2월에 옥스퍼드 애슈몰린 박물관(The Ashmolean Museum)에서 열린 개인전 〈To Those Sitting in Darkness〉로 터너상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함께 후보에 오른 재슬린 카우르(Jasleen Kaur), 들레인 르 바스(Delaine Le Bas), 클로뎃 존슨(Claudette Johnson)과 동시에 작품을 전시할 수 있어서 기뻐요. 후보에 오른 모든 작품이 공동체, 역사, 가족의 가슴 아픈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서 2025년 2월 16일까지 열리는 이번 단체전에 더욱 매력을 느낍니다.
단체전은 어떤 전시가 될까요? 2020년 애슈몰린 박물관 현대미술 분야 큐레이터 리나 프리치(Lena Fritsch)의 초대로, 옥스퍼드 대학교의 역사적 소장품을 주제로 한 개인전을 열었어요. 당시 3년에 걸쳐 애슈몰린에서 피트 리버스 박물관, 세인트 존스 칼리지, 블레넘 궁전 등 옥스퍼드에 있는 다양한 컬렉션의 풍부하고 복잡한 역사를 탐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To Those Sitting in Darkness〉 전시로 이 프로젝트의 정점을 찍고, 이번 단체전을 계기로 이를 확장, 재구성했습니다. 전시 제목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1901년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화 결정을 강하게 비판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에세이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To the Person Sitting in Darkness)〉(1901)를 차용했어요. 이 글을 약간 변형해 식민 지배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삶과 그 후유증을 목격한 오브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죠. 작품과 함께 전시하려고 박물관 수장고에서 꺼낸 많은 오브제는 수십 년 동안 말 그대로 어둠 속에 방치된 존재예요. 최초로 공개하는 옥스퍼드 컬렉션의 역사적 유물, 제 아내인 보석 디자이너 프랜시스 워즈워스 존스(Frances Wadsworth Jones)와 함께 제작한 조각, 제가 속한 디아스포라 예술가, 학자, 공예가 커뮤니티에서 가져온 작품 등을 선보이는 자리예요.
성장 배경이 궁금해요. 필리핀과 영국에서의 생활이 작업에 영향을 미쳤나요? 저는 필리핀에서 태어나 스물한 살까지 자랐고, 그 후 영국 글래스고와 런던에서 20년째 살고 있어요. 이 거리감이 일종의 ‘원근감’을 제공했다고 생각해요. 필리핀에 계속 머물렀다면 지금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다른 언어를 체득하며 제 작품의 언어도 연마했죠. 제 작업은 필리핀 역사와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레바논 출신 예술가가 전쟁 후 기록 자료를 다루는 방식 혹은 난민 출신 예술가가 사물 뒤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다루는 방식 등도 살펴봐요. 타지에 살면서 더 복합적인 어휘로 작품을 구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배경이 식민지의 역사와 문화적 상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군요. 저는 항상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고, 역사는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까 제 작업은 늘 필리핀 역사의 관점에서 출발하죠. 국가라는 개념을 넘어 필리핀 역사는 집단 기억과 제국의 폭력이라는 더 큰 맥락과 얽혀 있으니까요. 매일같이 기억의 정치와 식민 지배의 트라우마를 탐구해요. 특히 영국에 살면서 역사가 어떻게 지배적 서사에 맞게 의도적으로 또는 쉽게 잊히거나 지워지는지 깨달았어요. 런던에서 나고 자란 아내와 제가 받은 교육을 비교하면, 영국의 횡포에 대해 마닐라의 고등학생이던 제가 웨스트 런던 사립학교 학생이던 아내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걸 알게 돼요. 반대로 필리핀 역사 교과서에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에 의한 독재와 잔혹성의 역사가 여전히 누락돼 있고요.

Pio Abad and Frances Wadsworth Jones, For the Sphinx(detail), Patinated Bronze, 2024.

Pio Abad and Frances Wadsworth Jones, The Collection of Jane Ryan & William Saunders(detail), 3D Printed Plastic, Brass and Dry-transfer Text, 2019.

Laji No. 97, Mixed Media Installation, 2023.
특히 부모님이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죠.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필리핀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 대한 반독재 투쟁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셨다고요? 마르코스 독재 시절 활동가인 부모님의 경험은 제 작업의 기초가 됐어요. 부모님은 1970년대에 노동조합 조직가로 만나 1980년대에 반독재 투쟁에 깊이 관여하셨죠. 운동권 활동으로 투옥된 적도 있고요. 마르코스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두 분은 민주주의 재건이라는 정말 어려운 작업에 참여하셨어요. 저는 늘 예술가로서 제 상상력은 시민사회를 재건하려고 노력한 부모님의 상상력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말하곤 해요. 이런 제 성장 배경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어요.
당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요? 마르코스 부부가 하와이로 추방되고 몇 년 후 대통령궁 지하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요. 당시 그들이 떠나면서 남긴 방대한 자산에 이목이 집중됐고, 지하실은 곧 박물관이 됐어요. 마호가니 선반에 정리돼 있던 그 모든 것이 아직도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그 기억이 제가 전시를 구성하는 형식적 · 개념적 뼈대로 박물관을 계속 활용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그 경험이 개인적 · 집단적 슬픔의 장소로서 박물관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작품을 만들 때 지역의 기록을 면밀히 리서치하고 지역 역사가와 협업하는 등 주제를 깊이 고찰하는 작업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아카이브 연구는 제 작업의 시작점이에요. 지난 몇 년 동안 제 작업에 영향을 미친 다양한 아카이브를 살펴보았어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애슈몰린과 옥스퍼드 대학교의 아카이브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건 조심스럽지만 언제나 꿈꿔온 일이기도 했죠. 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성된 물질문화와 오브제를 좋아하거든요.
그 리서치가 이번 전시에서는 어떻게 발현됐나요? 역사에 대한 이해는 항상 개인적 경험에 근거해요. 처음부터 저는 필리핀 역사를 시작점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어요. 그렇게 하나의 유물이 다음 유물로 이어졌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더욱 큰 이야기로 구성할 수 있었죠. 이 전시를 통해 제가 과거에 함께 일한 사람들과 제가 매력을 느낀 가치나 삶의 방식을 고수해온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을 수 있었어요. 카를로스 빌라(Carlos Villa)의 사진, 시나그탈라(Sinagtala) 직공들의 직물, 제 아내와의 협업, 옥스퍼드 여러 지역 컬렉션과의 지속적 논의를 통해서요. 결국 단순히 전시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진정한 커뮤니티를 구축했죠. 과거에 제 작업에서 암시하기도 한 감성적 접근법이 이번 전시에서는 더욱 개인적 차원에서 드러나요. 제 작품이 어떻게 방대한 역사가 개개인의 현재에 스며드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요.

1897.76.36.18.6 No. 15, Screenprint and India Ink on Heritage Woodfree Paper, 2024. Photo by Andy Keate.

1897.76.36.18.6 No. 24, Screenprint and India Ink on Heritage Woodfree Paper, 2024. Photo by Andy Keate.
드로잉, 회화, 텍스타일, 설치, 텍스트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작가인 동시에 큐레이터이자 편집자로도 활동하시죠. 작가로서 작업할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요? 역할에 따라 차이를 두지는 않아요. 모든 건 예술가로서 제 작업의 일부죠. 궁극적으로 세상에서 스스로를 찾고, 역사 속에서 자아를 찾기 위해 작업해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때도, 협업하고 큐레이팅할 때도 다 같아요. 관람객이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매력적인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타고난 제 열망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정치적·역사적 사건을 제대로 바라보고 연구하는 예술가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죠. 되풀이되는 역사 속에서 아티스트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으세요? ‘증언하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을 만들고 착취하는 거대한 세력은 사람들이 역사를, 자연과의 관계를 잊고, 개인의 삶이 어떻게 더 큰 정치적 순간을 결정하는지 잊어야 더욱 커질 수 있어요. 예술가들은 그러한 관계를 망각하도록 강요하는 세력에 맞서 증언할 수 있는 독특한 시각을 갖고 있죠.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주얼리와 기념비적 작업에 계속 관심을 두고 있어요. 현재 제국, 왕조, 역사의 최말단을 장식하는 가장 내밀한 증인으로서 주얼리의 역할을 반영한 대형 조각을 만들기 위해 아내인 프랜시스와 협업하고 있어요. 드로잉 작업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고요. 그 모든 행위는 곧 제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해요.

For the Sphinx, 2023, From the Exhibition 〈To Those Sitting in Darkness〉, Ashmolean Museum, Oxford, 10 Feb. ~ 8 Sep. 2024.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글 백아영(프리랜서)
사진 피오 아바드 스튜디오(Pio Abad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