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는 없다, 무한을 향한 미술
창조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아티스트 개인의 세계관을 작품으로 표현할 때, 그것이 하나의 작업에서 출발했다 해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거나 또 다른 작업과 만나 새로운 장르로 나아가기도 한다. 최근 유독 눈에 띄는 미술계의 장르 융합 시도, 이를 통해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 보면 그 속에서 예상치 못한 놀라운 창조성을 발견하게 된다.
리경의 ‘더 많은 빛을’

김윤철의 ‘Effulge’

‘Effulge’을 일부 확대한 모습
과학에서 미술로, 실험을 넘어선 진보
전시실에 들어서서 마주한 작품이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경우가 잦아졌다. 다양한 분야를 경험한 작가들로 인해, 미술이 기존 영역을 뛰어넘어 진화하고 있기 때문. 특히 수학과 미술 혹은 과학기술과 미술 등 전혀 다른 분야가 만나 탄생한 예술 영역은 시너지 효과를 통해 기대 이상의 신선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한두 번의 단순한 컬래버레이션 시도를 넘어 미술계의 새로운 현상으로 해석되고 있는 이런 작업은 각기 다른 영역을 결합했다 하여 ‘하이브리드 아트’라 불리기도 하고, 아예 신(新)장르로 인정받은 예도 있다. 이는 물론 어느 한순간 시작된 현상이 아니라 여러 작가에 의해 서서히 그 움직임이 이어져왔는데, 해외 작가는 물론 최근에는 국내 작가의 작업도 많이 눈에 띈다. 이들은 이미 해외에서 작품 세계를 인정받으며 국제 전시를 수차례 개최하고 있다.
한국에서 작곡을 공부한 뒤 독일 쾰른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고 현재 베를린과 빈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윤철의 작품은 과학과 미술, 첨단 기술이 용해된 듯한 흥미로운 결과물이다. 그의 작품을 전시한 공간은 흡사 과학 실험실을 연상시킨다. 설치 작품 ‘Effulge’의 경우 아크릴, 유리, 알루미늄뿐 아니라 포토닉 크리스털, 자석, 모터, 우주선 검파기 등 재료부터 이미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는 공간을 비커로 상상한 뒤 작품을 이루고 있는 물질들의 작용과 그 안팎의 자연 법칙을 보여주며 관람자로 하여금 독특한 시각적·공간적 체험을 하게 한다. 최근 작업에서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유체역학과 메타 물질. 과학이 어떻게 미술이 될 수 있는지 증명하듯 직접 제작한 물질을 용기에 담아 전시하고 있으니, 미술가이면서 한편으로는 발명가인가 싶기도 하다. 현재 그는 유럽에서 다른 분야 연구자와 협업을 통해 장르를 넘나드는 활동을 하고 있다. 예술·과학 프로젝트 그룹 플루이드 스카이스(Fluid Skies)의 일원으로 천체물리학자, 미술사학자 등과 교류하며 공동 전시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속 묘한 아름다움을 느낀 순간 과학을 미술과 연계했다는 평면적 설명은 한참 부족해 보이고, 미술이 다가갈 수 있는 영역에 대해 더 넓은 확장을 기대하게 된다.
한편 ‘빛’을 주요 테마로 탐구하는 설치미술가 리경의 작품도 첨단 기술을 예술에 끌어온 작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서 회화를 공부한 뒤 런던의 첼시 국립 예술대학에서 설치 예술을 전공한 리경은 서울, 런던, 뉴욕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일본 도쿄의 긴자 메종 에르메스 르 포럼(Ginza Maison Hermès le Forum)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다. 그녀의 최근작은 주로 빛을 이용한 공간 설치 작업으로, SF 영화 속 세계처럼 신비로워 관람자에게 색다른 체험을 선사한다. 레이저 레벨기에서 내뿜는 빛줄기는 공간을 섬세하게 분할해, 그 한가운데 들어서면 몸에 닿는 빛을 느끼는 촉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리경이 구축하는 ‘빛의 공간’은 레이저와 거울의 반사 작용을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운드와 연기, 물안개를 활용해 광선으로 채운 공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시공간의 개념을 와해하는 확장된 미술이다.
작품과 함께 선 장은진 교수

장은진의 ‘A Symbiotic Figuration’
조각 작품을 컴퓨터 아트로, 아트 테크놀로지
작가의 호기심에 따른 실험은 또 다른 창작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 현재 미국 블룸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장은진의 작업이 대표적 예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아트 테크놀로지’라 불리는 신장르의 문을 열며 독자적 예술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지난 9월에는 미국 뉴욕의 엘가 윔머-현 컨템퍼러리(Elga Wimmer-Hyun Contemporary)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권위 있는 조각 전문 매거진 를 비롯한 여러 언론에서 호평을 받았다. 세계인에게 독특한 재료로 동양미를 전하며 현대미술의 광범위함을 일깨웠다는 찬사도 이어졌다.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장은진 교수는 1997년부터 10여 년간 국내에서 십장생을 주제로 조각 작품을 만들면서 전통적 소재를 현대적 조형물로 탄생시키는 작업을 지속했다. 이후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 대학교와 뉴욕 대학교에서 순수 미술과 예술 행정을 수학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십장생, 팔괘 등을 소재로 한 그녀의 동양적 작품 세계가 테크놀로지와 결합하게 된 것은 현대 예술과 과학 그리고 미래의 예술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미국 유학 후 그녀는 ‘MAYA 3D Computer Art’ 작품을 통해 동양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수학적이며 과학적인 코딩(coding) 작업으로 풀어냈다. 3차원 공간에 자리하는 조각의 본질적 특성을 살려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아트’에 도달한 것이다. 예술을 코딩 작업으로 해석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렵게만 들리는 이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예술가인 창작자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기술과의 만남을 시도했다는 뜻이다. 장은진 교수는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작업은 올해 뉴욕 대학교 교수들과 컬래버레이션한 작품 쇼케이스를 통해 ‘아트 테크놀로지’라는 장르로 공식적 인정을 받았다. 조각뿐 아니라 컴퓨터, 영사, 코딩, 안무 등이 합작해 완성했으니, 아트 테크놀로지란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광범위한 영역임을 알린 자리이기도 하다. 장은진 교수도 앞으로 함께하는 연구를 통해 더 깊이 있는 예술로 무르익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6월, 각국 대사와 외교사절이 참석한 UN 본부의 초대전에서는 ‘나무에 옷을 입히다’ 시리즈 중 6점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목재가 되어 생명을 잃은 나무 위에 다시 나무로 옷을 입혀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닥나무의 섬유질을 조각에 활용한 자연적 설치 작품이다.
장은진 교수는 수학 코딩이나 과학의 물질성과 달리 예술에는 공식이 없다고 말한다. 예술의 영역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분야이며, 상상력을 통해 무한히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또 그녀는 작품의 장르가 어디에 속하든, 그 안에 작가의 혼이 담겨 있고 작품 그 자체로 보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장르 융합의 목적 역시 분명하다. 분야를 막론하고 통합한 장르가 인간을 감동시키고 움직일 수 있다면, 분명히 예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목재가 된 나무 위에 다시 나무로 옷을 입혀 생명을 불어넣은 장은진의 ‘나무에 옷을 입히다’ 시리즈

정태섭의 ‘바이올린 위의 선율’

정태섭의 ‘장미’
겹겹이 숨은 아름다움을 드러내다, 엑스레이 아트
엑스레이 꽃 사진. 아트 페어나 갤러리를 즐겨 찾는 이라면 언젠가 한 번쯤 만난 기억이 있어 낯설지 않게 다가올 것이다. 이는 ‘엑스레이 아트’라는 독립된 장르로 인정받고 있는 강남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정태섭 교수의 작품이다. 엑스선 기기로 사진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의사의 단순한 취미 활동이 아니냐는 의구심 어린 눈초리는 일찌감치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15회의 개인전을 치렀고 그중 세 차례는 해외 전시였으니, 경력으로만 보면 전업 작가 못지않은 활동이다. 그뿐 아니라 올해까지 KIAF에 6년 연속 작품을 출품하는 등 국내외 아트 페어에도 수십 차례 참여했다. 최근 정태섭 교수의 작업이 더욱 주목받고 있는 것은 올해 하반기부터 국내 초등학교 과학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실리기 때문. 이미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는 2010년부터 그의 작품이 수록되고 있다. 과학과 의학, 미술을 융합한 새로운 예술 장르를 소개하면서 말이다.
1990년대 이후 엑스선 사진을 분석하면서 특이한 형태를 찾아온 정태섭 교수의 작품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6년부터다. 기형도 시인의 작품 ‘입속의 검은 잎’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다 그것을 엑스선 사진으로 표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입에 나뭇잎 모양의 브로치를 물고 촬영해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초반에는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감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예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첫 번째 전시를 개최하기까지 과정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첫 전시가 열리자 지금까지 보지 못한 신선한 작품 세계로 예술의 영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단체전과 개인전도 계속 이어졌다.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이 엑스선을 발명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이를 사진 예술과 접목해 작품으로 탄생시킨 예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으니, 해외에서도 그의 작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11년 파리에서 초대전을 개최했고, 러시아 모스크바에 이어 올해는 노보시비르스크 주립 미술관(Novosibirsk State Art Museum) 전시를 통해 다수의 현지 언론에 소개되었다. 내년 10월, 러시아 페름 지역에서 전시 계획도 잡혔다. 의료용 촬영 기기로 대상 내부의 아름다움을 끌어내 표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학과 예술이 만나 일으킨 시너지 효과다. 하나의 목적을 가지면 다른 부분은 망각하기 쉽기 때문에 사람들은 엑스레이로 미적 요소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쉽사리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태섭 교수는 이미 아름답다는 인식이 깃든 사물인 꽃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다. 요즘은 윗부분에 장미, 아랫부분에 고동을 합성한 작품 ‘진화’와 같이, 융합을 통해 아름다움을 공유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는 물과 기름처럼 나뉜 과학과 예술 두 영역이 융화되어 함께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유의 장르로 인정받은 엑스레이 아트 분야에서 그가 장기적으로 시도하고자 하는 일은 과학적 영상에 감성을 불어넣는 작업을 통해 예술성을 더욱 키워나가는 것이다. 생소한 실험을 하다 보면 결국 세계가 폭넓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의사이자 예술가인 그의 아트 작업에도 이미 한계는 없다.
에디터 류현경
글 안미영(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