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장에서 읽은 장서 문화의 역사
경매 현장은 장서 문화의 역사를 알기에 좋은 장소다.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데 헌신한 윌리엄 모리스,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만든 책이 심심치 않게 거래될 뿐 아니라, 장 그롤리에 등 유명 장서가의 컬렉션도 때때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 Christie’s Images Limite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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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쓰인 시도서
‘시도서’는 매일 정시에 기도하기 위해 보는 기도서를 말한다. 특히 중세 유럽에서는 왕족이나 귀족, 성직자들이 수도원에 직접 의뢰해 제작하는 것이 유행했다. 수도원의 사자생(寫字生)이 일일이 양피지나 송아지 피지에 손으로 글을 쓰면, 표지에 상아나 보석을 장식하거나 테두리를 금으로 장식하는 등 의뢰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장식을 했다. 특히 첫 글자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내지의 가장자리에 포도넝쿨이나 잎을 수놓듯 그렸다. 또 12절기에 맞게 신년 축하연과 혼례 같은 일상적 풍경이나 내용에 맞는 삽화를 그리고 채색했다. 이 ‘채색 사본’은 귀족의 호화 장서 문화를 보여주는 예시로 꼽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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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로링 앤드루스의 장서 <Jean Grolier de Servieres Vicomte d’Aguisy>
미국 장서가 윌리엄 로링 앤드루스(William Loring Andrews)의 컬렉션 중 하나인 <장 그롤리에 드 세르비에르, 아귀시의 자작>은 지난해 경매에서 낙찰됐다. 유명 제본가 앙리 마리위스 미셸(Henri Marius Michel)이 제본한 책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눈여겨볼 만하다. 14개의 삽화를 11개의 컬러와 금으로 장식했고, 버건디 컬러 모로코 가죽으로 장정했다. 책을 보호하기 위한 별도의 슬립 케이스 역시 모로코 가죽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평소 장 그롤리에를 흠모하던 소장가를 위해 그의 장서 수집 일대기를 담았다. 장 그롤리에는 ‘애서가 중의 애서가’로 꼽히는 인물. 프랑스 귀족 출신인 그는 3000권이 넘는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고 이탈리아 알두스가(家)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대체로 그는 모로코산이나 어린 송아지 가죽을 즐겨 사용했고, 금박으로 표지를 장식했다. 그의 장서 표지에는 항상 ‘Jo. Grolierii et Amicorum(장 그롤리에의 친구들)’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의 사후 1476년 책은 각지로 흩어졌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400여 권이다. ? ? ?
ⓒ Christie’s Images Limited 2016
?켈름스콧 프레스의 책, <The Order of Chivalry>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공예 운동인 ‘아트 앤 크래프트’의 창시자 윌리엄 모리스는 1890년 영국의 해머스미스에 켈름스콧 프레스(Kelmscott Press)를 설립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빅토리아 시대 아르데코 스타일의 패턴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유명한 애서가인 그는 켈름스콧 프레스에서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만드는 수제 종이와 독일 하노버에서 가져온 최상급 잉크만 사용하고, 표지 역시 벨럼(어린 송아지 가죽)을 고집했다. 아름다운 테두리 장식과 캘리그래피는 물론 평생 친구인 화가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Coley Burne Jones)의 삽화를 싣기도 했다. 특히 <초서 저작집>은 켈름스콧 프레스에서 가장 수작으로 꼽히는 책으로, 지난해 12월 런던에서 열린 크리스티 책 경매에서 약 2억4000만 원에 낙찰돼 눈길을 끌었다. 공방의 특징적 면모가 잘 드러나는 <The Order of Chivalry>는 모리스가 개발한 ‘초서체’를 사용하고, 에드워드 번 존스가 그림을 그렸다. 이 책은 미국의 저명한 북 컬렉터 로버트 호(Robert Hoe)의 소장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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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두스 마누티우스의 인쇄소에서 만든 플라톤 저작집
영국에 윌리엄 모리스가 있었다면, 이탈리아에는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있었다. 윌리엄 모리스가 영감을 받을 만큼 마누티우스 역시 애서가에게 끼친 영향이 크다. 그가 16세기 베네치아에서 만든 책은 ‘알두스판(A´ldine Edition)’이라는 명칭이 따로 있을 정도. 지금은 흔한 이탤릭체와 그리스 활자체를 처음으로 인쇄에 적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플라톤의 저작을 고대 그리스어로 펴내기 위해 그리스어 아카데미를 설립할 만큼 학구열이 대단한 학자이기도 했다. ?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의 장서표 / ?사진 제공 남궁산

쥘 파생의 장서표 / ⓒ Christie’s Images Limited 2016
미술가의 장서표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Maurits Cornelis Escher)는 초현실주의 판화가였다. 그의 작품을 보면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가 어느새 하늘의 새가 되고, 천사 속에 악마가 존재하는 등 현실과 비현실이 모호하게 처리돼 있다. 그가 북 컬렉터 흐라벤산더(Gravesande)를 위해 제작한 장서표는 1940년 일본에서 완성했다. 책을 둘러싸고 섬광이 뻗어나가는 가운데, 부엉이와 새 그리고 붓과 펜으로 모서리를 장식했다. 마르크 샤갈 역시 장서표를 제작했다. 마치 수채화처럼 표현한 이 장서표는 루이스 스턴(Louis Stern)이라는 사람의 것으로 샤갈 특유의 화풍이 고스란히 담겼다. 프랑스 근대미술 사조인 ‘에콜 드 파리’를 대표하는 쥘 파생(Jules Pascin)은 파도 위 뗏목에 몸을 의지한 채 나체로 망중한을 즐기는 여자와 남자를 표현했다. 재미있는 것은 노 젓는 사공이 아기 천사라는 사실.
에디터 | 신숙미(프리랜서)
자료 제공 | 크리스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