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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분투 최열

LIFESTYLE

40년 가까이 환경 운동에 힘써온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은 자연이 파괴되는 곳을 찾아가 세상에 알리고 공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만나온 국내 대표 환경 운동가다.
일흔을 목전에 두고도 여전히 ‘제1선의 환경 운동가’로 살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 시절 운동가들의 수고를 본다.

Profile
19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소장, 1993~2003년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2005~2013년 환경재단 대표를 거쳐 현재 2대 환경재단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브라질 리우 환경회의 한국 민간 대표단 단장, 서울환경영화제 집행위원회 위원장, 기후변화센터 공동대표, ‘골드먼 환경상’ 수상, 세계적 환경 연구소 월드워치연구소의 ‘세계 환경 운동가 15인’ 선정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환경 운동가로, 특히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문제를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10대와 20대에겐 생소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으면 종업원이 일사불란하게 일회용 종이컵과 일회용 젓가락을 세팅해주곤 했다. 동네 슈퍼마켓에서는 과자 한 봉지만 사도 자연스럽게 비닐봉지에 담아주었으며 가정에서는 플라스틱, 캔, 유리 그리고 건전지까지 모든 걸 한 장의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집 앞에 휙 던져놓으면 청소아저씨들이 새벽녘 말없이 가져가곤 했다. 바로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가 한창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가고 있을 때의 풍경이다. 지금 우리는 스위스나 독일이 간직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부러워하지만, 사실 40~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모습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푸른 산과 들,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고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 후 반세기가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우리는 곳곳에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오염된 환경을 목도한다. 누군가의 말대로 “일부러 망가뜨리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생태 환경에서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오염된 토양과 해양에서 재배한 음식을 먹는다.
어느 날 한순간에 백화점과 다리가 무너지고, 지하철 화재나 고속도로 30중 추돌 사고로 사람이 죽는 사건이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해도, 이러다 둘 중 한명이 암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1급 발암물질인 미세먼지를 이렇게 태연히 들이마시고 있는 것만큼은 아니다. 왜 이런저런 사고에는 수십만 개의 댓글을 달아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며 그 해결 방안을 위한 국가 차원의 정책이나 지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서서히, 조용히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그것의 몇 배나 되는 숫자의 사망자와 피해자를 낸 것으로 증명된 환경오염 문제엔 왜 이리 관대한 것일까? 1급 발암물질인 미세먼지가 앞으로 더욱 심해지면 호흡기 질환과 뇌경색, 암 발병률은 급격히 증가한다. 이런 시대에 각 개인이 방독면 수준의 마스크만 쓰면 괜찮은 것일까? 아니면 우리 집 거실과 침실의 공기청정기로 해결되는 것일까? 이렇듯 여전히 나만 조심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대응 방식으로 환경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일까? 최열환경재단 이사장은 “이제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더불어’ 행동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그것이 생태계 안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1993년 환경운동연합을 창립, 사무총장을 지냈고 기후변화센터 공동대표와 환경재단 대표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환경 운동가로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아닐까 싶어요. 지난 7월에는 환경재단 이사장으로 선임되셨는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이 다가오면서 내년 사업 구상 등으로 매우 분주하실 것 같습니다. 지금 업무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내년 사업 구상입니다. 우리 재단이 독자적으로 구상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정부와 지자체, 기업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 관계자들을 만날 일이 많네요. 해양수산부, 문화체육부, 환경부 장관과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내년에는 어떤 방향으로 일을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1975년에 강원대학교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1982년에 국내 첫 민간 환경단체인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하신, 그야말로 ‘1세대 환경 운동가’입니다. 노동운동, 민주화 운동 등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운동’을 ‘투쟁’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환경 운동가로 살아오신 것, 과연 어떠셨나요? 환경·인권·여성·장애인·노동문제 등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운동’인데, 다들 운동이라고 하면 딱딱한걸로 생각해요. 운동은 움직이는 것, 부드러운 것입니다. 정지한 것은 딱딱하고, 죽은 것이죠. 이처럼 운동의 원래 뜻은 굉장히 좋은 거예요. 그중에서도 환경 운동은 여느 사회 운동과 달리 자기 분야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태 파괴를 막고 ‘그 자리에 있던 걸 있게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속된 말로 운동가들에게 생기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환경 운동가들은 대단한 존경을 받죠.

‘미세먼지 없는 6월의 기적’ 음악회 현장.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수감되면서 환경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셨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기에 전공을 살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 환경을 택했습니다. 같이 옥중에 있던 故 김근태 선배는 “공해라도 배불리 먹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당시 환경문제는 민주화·노동운동에 한참 밀려난 상황이었어요. 크게 환경문제가 대두되지도 않았고,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죠. 그러나 저는 우리나라가 지속적인 산업화·도시화를 꾀하다 보면 분명 환경문제가 크게 부각되는 시점이 올 것 같았어요. 그래서 환경 공해와 관련한 일본 서적을 구해 읽으며 공부했고, 1982년에는 공해로 피해를 본 사람들을 돕자는 생각에 ‘공해문제연구소’를 만들어 구로공단, 여천, 온산 등 공단 지역의 피해 실태를 살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던 1990년대 중반만 해도 2호선 구로공단역(현 구로디지털단지역)은 공기도, 주변 환경도 쾌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특히 공장이 밀집한 울산의 온산과 여수반도에 있던 여천은 상황이 열악했어요. 한번은 명동 성당에서 울산 공해 피해 지역 주민에 대한 사례 발표를 한 적이 있는데, 울산에서 올라온 한 주민이 “와, 서울은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나무가 다 살아있네요” 하는 거예요. 그때 서울 대기오염지수가 세계 1위였는데 말이죠.

1980년대는 중앙정부 안에 지자체가 속해 있던 터라 각 지자체의 파워가 약했을 것 같아요. 지자체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겠죠.중앙정부에서 “너희가 반대하면 우리 기업 수출길이 막힌다. 경제가 무너진다”고 겁주는데 누가 감히 나서겠습니까. 당시 조사차 온산초등학교에 갔는데, 교정에 아름드리나무부터 작은 묘목, 화초까지 모조리 죽어 있었어요. 6학년 교실에서 들어가 “뼈마디가 아픈 사람, 눈병, 피부병 증세가 있는 사람 손들어봐라” 했더니 52명 중 22명이 손을 들더라고요. 그래서 1985년 온산병(대한민국 최초의 공해병)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아 온산 공단 부근의 8800가구, 총 3만8000명을 집단 이주시켰습니다.

1992년에는 브라질 리우 환경회의 한국 민간 대표단 단장을 맡으셨고 이듬해에 환경운동연합을 창립해 2003년까지 사무총장으로, 2005년부터는 환경재단 대표로 일해오셨습니다. 이사장님이 해오신 환경 운동 중 가장 큰 성과는 뭐라고 보세요?환경 운동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강연만 1만 5000번 이상 하고 지속적으로 캠페인을 이어왔습니다. 그 덕분에 이제는 전 국민이 환경문제를 간과할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의식의 변화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우선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적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신 것도 많죠? 우리나라에선 1980년대에 한창 일회용품을 많이 소비했어요. 그러던 차에 1988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 환경회의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인도네시아 대표가 저에게 한국이 인도네시아 나무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베어간다는 거예요. 빈자리에 나무를 안 심고 가서 자기네 나라가 사막화되고 있다면서 “한국은 식당에서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쓴다던데, 당신이라도 우선 그것을 사용하지 말고 젓가락을 가지고 다녀라” 이러더군요. 그해 가을부터 가방에 젓가락을 항상 넣어 다니면서 식당에 가면 그걸로 밥을 먹기 시작했어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나요?식당 종업원들이 늘 놀라는 눈으로 쳐다봤어요. 지인들은 저에게 “편하게 일회용 젓가락을 그냥 쓰고 버리면 되지 그걸 왜 가지고 다니냐, 너하고 밥 먹으면 밥맛이 떨어진다”면서 우스갯소리로 “최열 네가 공해다” 그랬어요.

말레이시아 셀랑고르 자연공원에서 진행된 ‘그린리더십과정’.

그런데 어떻게 식당에서 일회용품이 사라지게 됐을까요? 1990년 중반부터 못 본 것 같아요.당시 제가 환경부의 폐기물 국장과 가깝게 지냈어요. 일회용 젓가락 사용을 중단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한번 노력해보자 했는데, 정말 시행됐죠. 쓰레기종량제도 그래요. 예전에는 쓰레기 양과 상관없이 일괄적 처리 비용을 부담했는데, 그렇게 해서는 쓰레기가 줄지 않으니 내버리는 양만큼 돈을 부담하게 하자고 했어요. 환경부와 논의해 1995년부터 쓰레기종량제를 실시했죠.

환경 운동가들 사이에서 이사님은 ‘놀라운 실천력을 자닌 분’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선천적 성향인지, 아니면 길러진 것인지 궁금합니다.어릴 적부터 정치나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대구 출신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대통령 선거 유세 때 거길 많이 쫓아다녔습니다.(웃음) 그리고 아버지가 꽤 진보적인 분이셨어요. 일본의 종합 교양지를 많이 보셨는데 덩달아 저도 같이 봤어요. 삼선 개헌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고, 대학교 4학년 때는 1969년부터 실시한 ‘대학 군사 교육’을 반대하다 전국에서 대학생 180명이 제적됐어요. 같이 제적된 사람이 故 김근태 의원, 이석현 의원, 원혜영 의원 등이죠. 대학 군사 교육은 그 후로도 계속되다 1988년에 폐지됐습니다.

환경은 정치라는 바퀴와 잘 맞물려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환경 운동가와 정치인의 지난 관계를 돌이켜보면 때로는 맞서기도, 때로는 함께 걸어오기도 했는데, 환경과 정치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환경은 환경 단체와 정당, 이 둘이 함께 시너지를 내야 합니다. 환경 단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환경운동연합, 환경재단 등의 NGO고, 정당은 녹색당을 말하죠. 이 둘이 서로 시너지를 내는 곳이 바로 독일이에요.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은 환경 선진국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나라죠. 특히 독일은 그 시스템이 무척 잘 정착화되었다고 들었습니다. 1988년에 독일 녹색당 초청으로 처음 독일을 방문했어요. 당시 녹색당의 공동대표가 3명이었는데 페트라 켈리라고 여자 대표가 나와 동갑이었어요. 당시 분단 국가였던 독일에선 핵발전소 반대 운동이 격렬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야 하고 있는 걸 말이죠. 그녀가 연설을 하면 수십만 명이 모여 그 연설을 듣는데,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독일은 어떻게 환경 단체와 정치가 잘 결합할 수 있었나요? 독일에서는 환경 운동가들이 지자체 의원으로 출마해서 곧잘 당선되곤 합니다. 그러다 중앙 정당 중 하나와 결합해 녹색당을 만들었고 독일 정권을 잡았죠. 또 한쪽에서는 여전히 ‘Friends of the Earth’, ‘Green Peace’ 등의 환경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NGO와 정당 이 두 단체가 함께 시너지를 냅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1세대 환경 운동가인 이사장님은 정치권에서도 자주 제의를 받으셨을 것 같은데요. 집권 정당에서는 비중 있는 사람들을 영입하려고 노력합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대통령에게 정치 참여 제의를 받고 독대를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우리나라 정치 풍토는 귤을 심으면 귤 대신 탱자가 열립니다. 저는 그냥 환경 운동을 계속하겠습니다”라며 거절했어요. 개인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해서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14회 서울환경영화제 개막식.

환경 논의의 범주가 확장되면서 환경 운동의 방법 또한 변해가고 있습니다. 환경재단은 어떤가요?저지, 투쟁, 반대, 플래카드 등 과거와 비슷한 패턴의 운동은 한계에 달했습니다. 환경 운동도 문화적 접근을 통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쪽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2004년부터 시작한 서울환경영화제도 그런 정책의 일환이에요. 영화라는 콘텐츠를 통해 환경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을 보여주는 거죠.

매년 한국 참가자와 일본 참가자가 한 배를 타고 아시아 곳곳을 함께 여행하는 피스앤그린보트도 환경재단의 시그너처 프로젝트가 된 것 같아요. 2005년부터 시작한 피스앤그린보트는 일본의 대표적 NPO(비영리단체) 피스보트(Peace Boat)와 함께 계획한 것으로 한일 참가자 1000여 명이 함께 3만5000톤짜리 배에서 일주일 동안 역사 문제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환경 . 사회문제 등을 열린 시각으로 바라보며 토론하는 행사예요.

컨셉이 흥미롭습니다. 강의와 토론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바다 여행이라니….제가 평생을 지켜온 원칙이 하나 있어요. 남이 하는 건 안 한다! 남이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왜 하느냐는 거죠. 제가 한 환경 운동도, 환경영화제도, 피스앤그린보트도 모두 국내에선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활동을 하다 보면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와요.

어느 기사에서 이사장님의 마지막 목표가 5만 톤 규모의 친환경 배를 준공해 매년 그 위에서 세계환경포럼을 개최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봤습니다. 언제쯤 그날이 올까요?2022년쯤엔 5만 톤짜리 에코 크루즈를 만들고 싶어요. 가장 환경친화적이면서 적은 에너지를 쓰는 배로요. 수개월을 배에서 보내며 그 안에서 교양과목, 리더십 강의, 체험형 학습, 그리고 세계환경포럼을 만들어 전 세계 환경 전문가들이 모여 회의도 하는 거죠. 기항지에서는 여행도 하고, 배 안에 큰 온실을 만들어 탑승자들이 함께 채소를 재배하고 그걸 아침 식단에 올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곧 그런 날이 곧 오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국민이 적극적으로 NGO에 참여해야겠죠.선진국이 되려면 깨끗한 정부, 신뢰할 만한 정치인이 많이 생기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국가가 스스로 그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이 개입하는 겁니다. 우리 국민은 각자 너무 바빠요. 그걸 대신해주는 것이 바로 비정부기구입니다. 정부, 국가를 견제하는 비정부기구가 튼튼한 나라가 바로 우리가 선진국이라 부르는 나라예요.

말씀을 듣고 보니 단순히 개인 소득과 GDP만 높다고 해서 선진국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익적 부분이 빠졌다면 말이죠. 그런 면에서 중산층 이상의 국민이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국민이 각자의 발전과 함께 공익을 위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여전히 그 국가가 개발도상국이라는 소리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소득이 높다 해도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선뜻 말하진 않잖아요.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선진국으로 불리는 이유는 국민 대부분이 일하는 시간 외에 일정 시간을 쪼개 장애인·인권·여성·환경문제 등에 관심을 보이고 그런 비정부기구에 다양한 방법으로 힘을 보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큰 통에 큰 유리구슬을 넣습니다. 그 사이에 공간이 생기는데, 거기엔 작은 구슬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까지 국가가 할 수는 없어요. 국민이 그 작은 구슬이 되기를 자청해야 하고, 그럴 때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되는 겁니다.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