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古都)를 기다리며
오래된 도시를 산책할 때는 걸음이 느려진다. 지나간 세월이라 치부해버리기엔 너무도 선명한 가치와 깊은 역사, 그리고 켜켜이 쌓인 삶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묻어나기 때문이다.

드레스덴 도시 전경.
클래식으로 물들다, 드레스덴
지난해 가을, 사전 정보 없이 독일 드레스덴(Dresden)으로 향한 적이 있다. 체코에서 일주일을 머물 때였는데, 프라하의 아기자기한 정취가 지루해질 즈음 잠시 다른 분위기의 인근 도시에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프라하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였다. 그때까지 내가 드레스덴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이라곤 탄핵된 전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며 대북 관련 연설을 한 곳이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의 융단폭격에 도심 전체가 폐허로 변했다는 아픈 과거 정도였다. ‘독일의 피렌체’라 불린다는 유혹적 문구와 그곳에 가면 세계 최고 음향과 건축미를 자랑하는 오페라하우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친한 음악평론가의 살뜰한 추천이 아니었다면 굳이 발걸음을 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로크 양식의 걸작 츠빙거(Zwinger) 궁전과 오페라하우스 젬퍼오퍼(Semperoper)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한나절 일정으로 드레스덴에 온 것을 후회했다. 전쟁을 겪으며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던 지난 세기의 궁전과 공연장은 첫인상부터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다웠으며 견고하기까지 했다.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섬세한 보수와 복원을 거쳐 다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지막한 감탄사가 또 한번 터졌다. 하필 젬퍼오퍼는 내부 수리 중이었다. 독일 클래식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도시에서 공연 관람은커녕 오페라하우스를 들여다볼 수조차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나는 좌우대칭이 명징한 바로크식 정원과 화려한 연못 분수가 인상적인 츠빙거 궁전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궁전 한편에 들어선 드레스덴 국립미술관에서 왕실의 오랜 컬렉션인 라파엘로와 루벤스, 렘브란트의 화폭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작센주에서 가장 크다는 대성당(Katholische Hofkirche)과 옛 시절 군주들의 화려한 행렬을 담은 웅장한 벽화가 남아 있는 슈탈호프(Stallhof) 벽도 발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노이마르크트 광장에 이르러 그동안의 감탄은 감동으로 물들었다. 광장에는 시민들이 공습으로 타버린 교회 벽돌을 모아 재건한 프라우엔 교회(Frauenkirche)가 있었다. 평화를 갈망하는 시민의 에너지가 이토록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공간이 또 있을까. 광장 곳곳에서 클래식 버스킹을 하는 음악가를 만날 수 있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동상 옆에선 누군가가 비틀스의 ‘이매진’을 첼로로 연주했다. 거리에서 맞닥뜨리는 현악 4중주는 낯설었지만, 드레스덴이 더 이상 폐허일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 선율이었다. 오페라 무대를 보진 못했지만 그날 나는 오래된 도시가 들려주는 클래식을 제대로 만끽한 것 같다.

프라우엔 교회 야경.

1 보로부두르 사원의 스투파에 안치된 불상. 2 프람바난 사원.
고대 자바의 신비를 찾아서, 욕야카르타
욕야카르타(Yogyakarta)에 이르러 나는 진짜 인도네시아를 접했다. 개성 없이 번창한 대도시나 휴양객으로 들끓는 관광지가 아닌, 감칠맛 나는 전통문화와 뭉클한 전설로 가득한 자바의 신비를 그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너져 내린 힌두교 신전 프람바난(Prambanan) 사원을 산책하고, 세계 최대 불교 성지인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을 오르내리며 술탄의 왕궁을 수리하던 인부, 축구를 즐기던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여정은 즐거웠다. 이상한 것은 욕야카르타를 통해 인도네시아를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파고들수록 흥미로운 고도만의 매력이 아닐까? 8세기 힌두교 신전 프람바난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무너진 채 거대한 석탑 8기만 복원되어 있다. 하지만 지진에 무너져 내렸거나 발굴 당시부터 훼손되어 있던 돌무더기는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중심에 우뚝 솟은 시바 사원은 높이가 47m에 이른다!). 그리고 놀랍게도 1000년 세월을 더 지나온 단단한 돌무덤에는 사랑의 전설이 흘러넘쳤다. 오랜 옛날, 고대 자바의 왕자 반둥은 이웃나라 왕을 암살하고 공주 라라 종그랑(‘날씬한 아가씨’라는 뜻)에게 구애했는데, 공주는 하룻밤에 찬디(석탑) 1000기를 쌓으면 결혼하겠다는 불가능한 조건을 내세워 거절한다. 그런데 반둥이 마술을 부려 찬디를 세워나가자 공주는 무너뜨리려 했고, 화가 난 반둥은 공주를 돌로 만들어 1000번째 찬디로 삼아버린다. 돌 속에 갇힌 공주가 아름다워서였는지, 돌속에 가두고 싶을 만큼 사랑한 왕자의 애증이 안타까웠는지 모르지만 욕야카르타 사람들은 프람바난 사원을 ‘라라 종그랑’ 사원이라 부를 만큼 전설과 그 신상을 좋아했다. 누군가가 욕야카르타의 젊은 연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데이트 장소라고 귀띔해줬다. 실제 프람바난 사원은 전설과 달리 200여 기의 찬디로 구성되어 있다. 아시아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오른 보로부두르 사원은 힘겹게 산에 오를수록 규모가 분명해졌다. 1000년 동안 화산재 속에 묻혀 있다 발굴된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언덕 위에 흙을 높이 쌓아 올린 뒤 세웠다는 불교 사원은 1000년 세월을 잠자코 묻혀 있었다 하기엔 지나치게 웅장했다. 벽돌 100만 개를 접착제 없이 쌓아 만든 구조도 혀를 내두르게 했다. 벽면의 부조는 석가모니의 수행과 가르침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8~9세기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보로부두르 사원은 말 그대로 불가사의였다. 누구도 이 둔중한 불교 사원을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축조했는지 규명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왕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는가하면 왕조의 사당, 승려들의 승방 혹은 만다라라는 등 의견도 분분하다. 사원 꼭대기 72개의 스투파 주변에는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두런두런 앉아 있었다. 인도에서 찾아온 승려도, 독일에서 여행 온 가족도 보로부두르 사원의 부처상이 느긋하게 내려다보듯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다들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보로부두르 사원은 예배를 드리는 신전이라기보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공간이 아닐까?

해질녘의 보로부두르 사원 전경.

리비에라마야의 아름다운 풍경.
리비에라마야에서 만난 멕시코
멕시코에서 처음 찾은 곳은 수도보다 유명한 휴양지 칸쿤이었다. 하지만 때깔부터 다른 해안 도시는 놀기 좋은 관광지일 뿐 그 이상의 매혹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마야 문명의 유적 치첸이트사(Chichen Itza)를 찾기 위해 카리브해를 따라 남쪽으로 달렸을 때, 비로소 멕시코다운 풍광과 여유로운 해안 도시가 차례로 다가왔다. 길고 긴 해안 지역 리비에라마야(Riviera Maya)였다. ‘마야의 해안’이라는 뜻인데, 하나둘 늘어가는 리조트 덕에 칸쿤을 위협할 만큼 기세등등한 휴양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스카레트(Xcaret)와 셀하(Xel-ha)처럼 멕시코를 대표하는 블록버스터급 해양 공원까지 포진했으니 이곳을 비껴가면 서운할 만했다. 그런데 리비에라마야에서 정작 마음을 훔친 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치첸이트사나 화려한 테마파크가 아니었다. 고대 마야 문명이 가뭇없이 사라지기 직전 가파른 절벽을 끼고 건설한 성벽 도시 툴룸(Tulum)은 나무로 만든 모든 것이 없어진 채 둔중한 돌기둥으로 지은 성전과 가옥만 아련하게 남아 있는데, 돌무더기만 남은 그 도시가 느닷없이 지구의 세월을 사색하게 만들었다. 사라진 도시의 절벽과 맞닿은 카리브해는 망연히 아름다웠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았다. 융숭한 고대 마야 문명의 성전 치첸이트사로 향하는 길에 점심식사를 하고자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들어섰을 때는 지난밤 클럽 코코봉고에서 마르가리타와 테킬라에 흠뻑 취했을 때보다 반가운 환호성을 질렀다. 비비드한 컬러의 낮은 건물들과 한산한 비포장도로를 느릿하게 달리는 1965년형 폭스바겐, 바깥 계단에 모여 앉아 광합성을 즐기는 콧수염 사내들, 타코를 팔며 순박한 미소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마야족 여인…. ‘이상한 나라’에 빠져든 폴처럼 나는 고대 마야의 신비한 수도를 찾아가려다 근대 남미의 후미진 마을에 불시착한 것 같았다. 아득한 시절 마야인의 땅이었으며, 그 자손들이 뒤섞여 스페인의 통치를 받아온 작은 도시 바야돌리드의 레스토랑 전축에서는 여전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레퍼토리가 환영받고 있었다. 나는 다진 소고기와 고수를 푸짐하게 올린 타코를 입안에 쑤셔 넣고 곧장 거리로 나섰다. 벽에 그래픽적 서체로 적어놓은 가게 이름이나 빛바랜 코카콜라 광고판, 서걱거리는 모래바람이 부는 골목도 반가웠다. 그제야 나는 먹고 마시다 죽기 딱 좋은 칸쿤만으로 멕시코를 재단하려던 지난밤의 속단을 반성했다. 툴룸과 바야돌리드에 우연히 이르러서야 아주 조금 멕시코의 민낯을 만난 것 같았으니까. 그것이 문명과 문화가 뒤섞인 채 평화롭게 숨 쉬는 리비에라마야가 내게 준 선물이다.

3 치첸이트사. 4 툴룸.

생테밀리옹의 자랑, 와이너리.
와인을 닮은 생테밀리옹
생테밀리옹(Saint-Emilion)으로 출발하기 전 운전대를 잡은 브루노는 사진 찍을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일러주었다. 지금까지 본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하게 될 거라고. 프랑스 보르도에서 자동차로 45분 정도 달려 닿은 생테밀리옹은 도심으로 진입하는 순간 아득한 중세로 빠져드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림동화 속 풍경 같았다. 보르도보다 먼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까닭인지 생테밀리옹은 현대적 뉘앙스가 거의 배어들지 않은 중세 도시 그 자체였다. 중심부는 차량 진입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풍스러운 건축 사이 즐비한 와인 숍과 여유로운 노천카페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생테밀리옹이라는 지역 이름은 에밀리옹 성자라는 뜻인데, 8세기 부르고뉴 출신인 에밀리옹은 샤토에서 일하던 농부였다. 워낙 착해서 자신의 빵까지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준 선행이 널리 퍼졌고, 750년 지금의 생테밀리옹으로 옮겨와 동굴에 은거하며 17년을 살다 죽어 성자로 추앙받았다. 그가 묻힌 자리는 지금도 석회암으로 지은 거대한 지하 동굴 교회로 여행자와 수도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생테밀리옹을 한눈에 내려다보고자 동굴 교회 위 종탑에 올랐다. 133m에 이르는 꼭대기에 이르자 생테밀리옹 시가지를 경계 없이 에워싸고 있는 포도밭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생테밀리옹 와이너리 가운데서도 최고급 생산지로 꼽히는 샤토 슈발블랑(Chateau Cheval-Blanc)과 샤토 오존(Chateau Ausone)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종탑과 가까운 와인학교 에콜 뒤 빈 드 생테밀리옹(Ecole du Vin de Saint-Emilion)에서 기꺼이 2시간짜리 와인 클래스를 신청해 듣기도 했다. 돌아 나오는 길에는 LVMH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소유한 샤토 슈발블랑에 들렀다. 40헥타르 남짓한 대지에서 연간 8만 병의 와인을 생산한다는 샤토 슈발블랑은 적지 않은 생산량임에도 나오자마자 모든 빈티지가 매진될 만큼 전 세계 와인 애호가에게 사랑받는 명품 와인이다. 적포도주 품종 중에서도 주로 카베르네 프랑과 메를로를 블렌딩하는데, 과일 향과 오크 향이 어우러진 깊은 맛이 일품이다. 훌륭한 와인처럼 세월이 빚은 정취를 머금은 도시와 키 작은 포도나무가 끝간 데 없이 펼쳐진 대지, 고성을 방불케 하며 멋스럽게 자리를 지키는 와이너리…. 사진으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분위기는 가슴에 마저 담아야 했다.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중세의 품위를 잃지 않은 고도에서 잠시나마 귀족이 된 듯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한 것 같다. 생테밀리옹에서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더 분주히 걷는 이가 더 많은 아름다운 것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생테밀리옹 전경.
에디터 전종현(harry.jun@noblesse.com)
글 정명효(여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