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지만 강함이 깃든 곳
겉보기엔 완벽한 미니멀리즘 건축이다. 그러나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면 그 너머로 감각적 긴장과 매혹적인 불협화음이 느껴진다. 벨기에 건축가 글렌 세스티그의 개인 주택 ‘파빌리온 세스티그’는 그가 추구해온 건축적 신념과 미학이 가장 순도 높게 구현된 공간이다. 삶, 취향, 건축에 대한 철학이 맞물린 대담한 선언을 만나보자.
벨기에 겐트 근교의 울창한 숲과 구불구불한 골목 사이, 언뜻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콘크리트 주택이 있다. 건축가 글렌 세스티그(Glenn Sestig)의 주거 공간이자 건축 스튜디오이기도 한 이 집은 겉보기에 평범한 파빌리온 같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미묘하면서 강렬한 미감이 펼쳐진다. 유리와 콘크리트, 철과 대리석이 정교하게 맞물린 이 구조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조각품이자 수십 년의 기다림 끝에 완성된 건축가의 인생이 축적된 집약체다.
“30여 년 전 처음 이 집을 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친구들과 근처를 산책하다 집이 너무 아름다워 문을 두드렸죠. 젊은 건축가라고 소개한 뒤 외관만이라도 자세히 보고 싶다고 정중히 요구했지만, 집주인은 단호히 거절하더군요.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주변 풍경이라도 사진으로 남겼죠.”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기자에게 매물로 나온 집을 소개받았는데, 바로 이 건물이었다. “기존 소유주는 로저 & 힐다 마테이스(Roger & Hilda Matthys)라는 유명한 예술 컬렉터로, 벨기에 건축가 이반 판모세벨더(Ivan Van Mossevelde)에게 의뢰한 건물이었어요. 작품을 보관할 더 큰 장소가 필요해 이사를 결심하면서 매물로 내놓은 거죠. 꿈꾸던 집이지만, 가격이 예산을 훨씬 넘어섰어요. 그래서 예술을 위해 지은 이 집을 최선을 다해 복원하고 지키겠다는 친필 편지와 함께 사용 가능한 금액을 적어 보냈고, 집주인이 제안을 받아주며 꿈에 그리던 공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운명적으로 이사하게 된 세스티그는 곧장 복원을 시작했다. 꿈꾸던 구조, 공간, 질감, 빛의 구성이 완성되기까지 수년에 걸쳐 파빌리온 세스티그가 탄생했다. 그는 바닥, 난방, 전기, 석고, 창호 등 모든 내장 요소를 철거했다. 하지만 60cm 두께의 콘크리트 구조체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완벽했기에 따로 손대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파빌리온 세스티그의 실내는 감각적 절제가 돋보인다. 광택 없는 그레이 톤 콘크리트 바닥, 깊은 블랙의 철제 프레임, 오닉스 대리석으로 마감한 욕실 벽, 그리고 그의 시그너처인 부드러운 베이지 텍스타일까지. 모든 요소가 조화로우면서도 각각 존재감을 드러낸다. “공간이란 명상처럼 작동해야 해요. 복잡한 장식보다 재료와 구조 자체가 이야기를 하도록 설계합니다. 내게 아름다움은 균형과 침묵을 상징하죠.”
건물은 외부에서 보면 닫힌 듯하지만, 내부에선 정원으로 연결되는 긴 복도와 갤러리 공간을 관통하며 하나의 산책로 같은 흐름으로 연결된다. 정사각형 평면도라 전통적 주택의 틀을 벗어나지만, 방을 벽으로 단절하지 않으면서 레벨의 변화와 투명한 파티션, 가구 배치로 공간이 자연스럽게 나뉜다. “설계를 할 때면 항상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 발생하는 감정의 흐름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파빌리온 내부는 하나의 산책로처럼 디자인했어요. 벽면마다 투입된 긴 수평 창은 자연광을 드라마틱하게 끌어들이고, 그렇게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은 내부 분위기를 전환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는 기존 건물에 적용된 UV 차단용 검은색 창을 모두 투명 유리로 교체했고, 내부로 스며든 빛이 벽을 타고 흘러 입체적 공간을 완성한다.
한편 공간 내부를 채운 가구와 예술 작품은 집주인의 강한 개성을 대변한다. 집 안 곳곳에 글렌과 그의 파트너 베르나르 세스티그가 수년에 걸쳐 수집한 예술적 오브제와 디자이너 가구를 비치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거실 한쪽을 채운 미니멀리즘 거장 솔 르윗의 모노크롬 그래픽 드로잉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전 집주인을 위해 1972년 작가가 직접 이 집에 머물며 제작한 3 × 8m 규모의 펜슬 드로잉 벽면으로, 건축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듯 압도적 스케일이 인상적이다. 또 자하 하디드의 아이코닉한 ‘모레인(Moraine)’ 소파, 샤를로트 페리앙의 암체어, 카를로 스카르파의 소파, 오스카르 니에메예르의 벤치 등 현대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 디자이너의 가구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이들은 장식을 넘어 공간의 사용성을 결정하는 건축적 요소로 기능한다. 글렌 세스티그 건축 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기도 한 베르나르는 최근 아티스트로 활약하며 집 안 갤러리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을 정기적으로 선보인다. 러프하면서 유기적인 형태의 작업은 건축물과 미묘한 대비를 이룬다. 글렌의 건축이 구조와 질서라면, 베르나르의 조각품은 감정과 직관에 기반한다. 두 사람은 비슷한 듯 다른 방식으로 각각 공간을 채우고 또 유지한다.
파빌리온 세스티그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가 아닌 만큼 글렌의 건축적 실험은 한층 과감했다. 일상의 동선과 시선의 흐름 등을 오로지 그와 파트너의 생활 리듬에 맞춰 설계했다. 그럼에도 이 집은 그 자체로 이상적 건축의 모델처럼 기능한다. 자연과 완벽하게 연결되는 동시에 실용성과 미학을 균형 있게 담아낸 덕분이다. “이 집은 나의 선언이에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보여주는 공간이죠.” 글렌은 여전히 이 공간에서 건축 도면을 그리고, 가구를 디자인하고,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파빌리온 세스티그는 그에게 작업실이라는 장소적 기능을 넘어 감정의 보호막이자 사유의 원천과도 같다. 겐트 골목 어귀에서 우연히 발견한, 마음을 설레게 한 콘크리트 건물은 이제 세스티그 자신이 되었다. “나는 이 집에서 잊고 있던 것을 되찾아요. 시간, 정적, 본질, 그리고 나 자신까지.”

위쪽 조경을 굴곡 있게 디자인해 집이 마치 잔디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아래쪽 옥상 테라스로 이어지는 미니멀한 콘크리트 계단.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글 양윤정(파리 통신원)
사진 장 피에르 가브리엘(Jean-Pierre Gabri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