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그리는 마음
태어난 곳이자 모든 것의 출발점, 그 땅의 생명력을 길어 올려 세계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탐험하는 예술가, 체 러브레이스.

체 러브레이스 1969년 트리니다드토바고 태생인 화가 체 러브레이스는 지금도 포트오브스페인에 거주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풍부한 색채와 대담한 형태로 고향 사람들과 자연환경이 교차하는 삶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마술적 사실주의와 추상화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평가를 받는 러브레이스의 그림은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마이애미 현대미술관, 베이징 X 뮤지엄 등에 소장되어 있다. 뉴욕, 파리, 런던, 로스앤젤레스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치렀으며, 2022년에는 VSF 서울 개인전을 통해 국내 관람객과 만났다. Photo by Danielle Salloum.
카리브해 남쪽의 섬나라 트리니다드토바고, 콜럼버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곳에서 나고 자란 체 러브레이스의 회화에선 찬란한 색감과 다채로운 질감, 이국의 동식물, 춤과 카니발, 도시와 자연이 어우러진다. 평면 위의 불규칙한 입체성, 균열과 연결, 구상과 추상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그의 그림은 4개의 개별 패널을 모아 하나의 큰 장면으로 완성된다. 고향의 풍부한 심상을 담은 작품이 물리적 개성과 더불어 독자적 정서를 드러내며 예술이란 결국 세계와 인간이 조우하는 하나의 방식임을 보여준다. 삶을 이루는 다양한 단편 중에서 ‘예술’이라는 조각을 꼭 쥔 채 자유롭게 천착하는 화가, 체 러브레이스와 대화를 나눴다.
작가님의 회화를 통해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자연과 사람들을 막연하게나마 그려봅니다. 고향의 어떤 점을 가장 사랑하나요?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저를 가장 사로잡는 것은 사람들의 강인하면서도 독특한 에너지입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일이 언제나 쉽지만은 않지만, 그러한 복합적 삶의 경험이 저를 계속 깨어 있게 합니다. 여기서는 끊임없는 호기심과 창의성 그리고 유연성이 있어야 그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요.
펄프 소재 보드에 그린 그림에선 특히 색채나 표면의 개성이 두드러집니다. 이러한 재료를 통해 어떤 효과를 자아내고자 하는지, 다른 화폭을 활용할 계획도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전통적 캔버스를 대신할 대안으로 보드를 사용했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이 재료의 고유한 특성이 작품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도록 해주더군요. 펄프 소재 보드는 긁거나 찢어낸 후 그 위에 덧칠하는 기법을 적용하기에 적합했고, 표면에 생긴 상처나 덧댐의 흔적이 오히려 작품의 일부가 되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그러면서도 평범한 캔버스의 표면처럼 활용할 수 있었죠. 캔버스 스타일의 질감을 다시 작업에 도입할 수도 있겠지만, 당분간은 계속해서 보드를 주로 사용할 것 같습니다.
4개의 패널을 조합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방식은 시그너처와도 같죠. 마치 하나의 그림 안에 여러 개의 시점과 장면이 공존하면서 하모니를 완성하는 듯 보여요. 제단화에서 보이는 이면화, 삼면화와는 또 사뭇 다르고요. 이런 방식을 시도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유레카를 외친 아이디어라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발전해온 작업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여러 개의 보드 패널을 조합해 큰 구성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각각의 패널이 어떻게 다른 시점을 만들어내고, 화면의 흐름을 변화시키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패널 사이의 단절과 경계, 틈과 이음매를 강조하면서 새로운 회화적 접근 방식이 떠올랐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저만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카리브해 출신으로서 제 정체성은 여러 조각이 모여 이루어진 것처럼 느낀다고 종종 이야기하곤 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작업 방식이 저라는 존재를 가장 잘 반영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패널의 짜임이 마치 퍼즐처럼 장면을 구성하는데, 그림 안에 들어갈 세부 요소는 어떻게 선택하나요? 만약 인생을 압축하는 한 폭의 그림을 구성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장면을 그릴 수 있을까요? 제 작품 속 이미지는 대부분 제가 주변에서 보고 경험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의 형상과 풍경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구도를 찾는 게 저에게는 의미 있는 도전이고요. 그러니 제 삶을 그림 하나에 담는다면, 자연 풍경과 물 그리고 인물이 반드시 포함될 거예요.
추상과 구상, 현실과 환상이 혼재하는 듯한 작품 속에서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 부분에서 아마도 패널 형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각 화면을 개별적 단위로 사용하다 보니, 이미지 제작 방식도 훨씬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었어요. 무언가를 닮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계획 없이 화면에 흔적을 남기고, 질감을 쌓아 올리고, 색을 탐구할 수 있어요. 어느 시점에 구체적 형상이 떠오르면, 그제야 그 추상적인 여러 요소와의 접점을 찾으려고 시도하죠. 그 과정은 미리 계획하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마다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기분이 듭니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예술을 추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질은 호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가인 아버지 얼 러브레이스(Earl Lovelace)의 영향에 대해 한 인터뷰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문학과 달리 그림은 비언어적 요소로 나름의 메시지를 담아내잖아요. 조형적 표현 방식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그림이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림이 인간의 경험을 전달하는 강력한 매개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회화는 기억과 시각, 그리고 우리가 상상으로 그려내는 내면세계를 불러일으키니까요. 그림은 제게 상당히 신비로운 대상입니다. 때때로 회화라는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울 정도죠! 그림을 꼭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알 수 없는, 해독하기 어려운 상태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평소에 서핑도 즐기신다고 알고 있어요. 작업 외에 작가님에게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작가님의 생활을 이루는 많은 요소가 작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예술가의 일상과 작품의 상관관계에 대해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서핑은 제 삶에서 작업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에요. 사실 그림을 시작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서핑을 해왔고, 저에게는 굉장히 깊은 영적 의미가 있어요. 물의 흐름과 움직임에는 어떤 예술적 리듬이 있어요. 하지만 바다는 저에게 너무 가까운 존재여서일까요, 오히려 그림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물이 가진 특유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현하려면 정말 특별한 접근 방식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도 언젠가는 제 삶에서 물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한 작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동료 작가 피터 도이그(Peter Doig)와 함께 영화를 상영하는 스튜디오필름클럽(StudioFilmClub)도 꾸리셨죠. 그런 활동 역시 작가님의 작업에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나요? 스튜디오필름클럽은 포트오브스페인 외곽에 있던 큰 작업실에서 그곳을 함께 쓰는 동료 예술가들과 진행한 프로젝트였어요. 저에겐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죠. 무엇보다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활동이었어요. 저는 창작 과정에서 늘 협업을 해왔고, 그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 그 지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던 아트하우스 영화를 꾸준히 상영했는데, 그 경험이 제 작업에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때 형성된 공동체적 감각일 거예요.
‘캐리비언 동시대 미술’이라는 말로 묶을 수 있을지 조심스럽지만, 최근 국제 아트 신에서 카리브해 지역 출신 아티스트들의 활동이 한층 활발해진 듯합니다. 맞아요. 이제야 세계가 카리브해 출신 아티스트에게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이곳은 수많은 세계의 모퉁이와 맞닿은 다층적 역사를 지닌 독특한 지역이죠. 작은 섬들이 모인 지역에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적 에너지가 축적되어 있어요. 또 아직 변화하는 과정에 있지만 점점 더 많은 작가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고요. 앞으로 이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예술적 접근 방식을 반영한 더 많은 기획 전시가 열리길 기대합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아티스트는 물론, 오랫동안 활동해왔음에도 주목받지 못한 작가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생기길 바랍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이어오면서 새롭게 발견한 삶의 진리 혹은 교훈이 있을까요? 어쩌면 예술이 정체성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정체성과 작업은 항상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예술이 제게 강한 목적의식을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감사한 일이죠. 정확히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제 삶의 모든 부분과 이어져 있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찾기도 합니다. 이 외에 더 설명할 말이 있을까 싶네요.
올해 상반기에 전시를 비롯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올해 당장 눈앞에 있는 프로젝트는 뉴욕 니콜라 바셀 갤러리(Nicola Vassell Gallery)에서 열리는 두 번째 개인전이에요. 뉴욕은 언제나 도전적인 곳이지만, 동시에 전시를 열기에 아주 흥미로운 장소이기도 하죠. 또 제 첫 번째 모노그래프가 이탈리아 출판사 스키라(Skira)에서 출간되고, 프랑스/이탈리아 브랜드 라메종(La Maison), 벨리에(Velier)와 협업해 제 그림이 담긴 21종의 한정판 빈티지 럼도 출시할 예정입니다. 런던에서도 전시가 열릴 거고요.
마지막으로 예술가로서 꿈꾸는 성취 혹은 결실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제 작업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나가는지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작가로서 어떤 경력의 이정표를 세운다든지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아요. 항상 작품이 저를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작업을 성장시키는 데 몰입하면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의 문이 열리더라고요. 앞으로도 그 흐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아가고 싶습니다.
글 이가진(미술 저널리스트)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
사진 작가 베리어스 스몰 파이어스(Various Small Fires, VS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