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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라서 남 준다

LIFESTYLE

‘yes’와 ‘no’ 대신 ‘maybe’라고 말하는 당신에게 필요한 그 서비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묘비에 이런 글을 남겼다. 아마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한 채 살아온 자신의 삶을 탄식하며 미래를 살아갈 우리에겐 제발 그러지 말라고 충고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쇼가 겪은 문제를 여전히 되풀이하고 탄식한다. 뭐 하나를 제대로 결정하지 못해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지금 타고 다니는 차를 파는 게 좋을지 가지고 있는 게 좋을지, 이사를 하려는데 아파트가 나을지 빌라가 나을지, 유학을 가려는데 미국이 좋을지 영국이 좋을지 등 어떤 선택이 나에게 맞는지 고민해달라고 요청한다. 그것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에게 말이다. 이직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월급은 비슷한데 각 회사의 분위기와 업무 강도가 달라 장단이 있으니 나에게 맞는 곳을 골라달라고 부탁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 식당에선 삼겹살과 목살 중 메뉴를 선택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적당히 섞은 ‘결정장애 메뉴’가 등장하기도 했다.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결정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나온 짬짜면의 새로운 버전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인터넷을 통해 첫날밤 입을 속옷 색깔까지 골라달라는 사회. 결정장애라는 신종 유행병이 봄철 꽃가루 날리듯 번지고 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정보의 과잉 탓이 크다. 언젠가 테드(TED) 콘퍼런스의 창시자 리처드 솔 워먼(Richard Saul Wurman)은 평일 하루 치 <뉴욕 타임스> 기사가 17세기 평균적 영국인이 평생 접한 양보다 많은 정보를 싣고 있다고, 현시대의 과잉 정보 실태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 요샌 휴대폰 케이스 하나 사려고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도 너무 많은 물건과 정보가 쏟아져 두통이 온다. 그러니 자연스레 믿을 만한 누군가가 척 하고 원하는 물건을 골라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데 최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바로 결정장애자의 니즈에 의해 생겨난 ‘큐레이션(curation)’ 서비스. 큐레이션은 미술계에서 작가를 발굴하고 작품을 선별해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에서 파생한 신조어다.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해 사용자에게 필요한 정보만 제공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흥미로운 건 이런 큐레이션 서비스가 근래 결정장애를 앓는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시키며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부상한 것이다.
가령 삼성전자가 내놓은 음악 스트리밍 앱 ‘밀크뮤직’은 전문가가 직접 고른 음악을 카테고리별로 즐길 수 있다. 또 특정 가수나 노래를 검색하면 그와 비슷한 장르의 노래를 검색한 이용자들이 들은 곡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이들은 지난해 말 가수 겸 작곡가 박진영을 음악 큐레이터로 영입해 보다 전문적인 큐레이션 서비스를 이어가고 있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은 지난해 말 책 전문 SNS ‘북플’을 선보였다. ‘북(book)’과 ‘피플(people)’의 합성어인 북플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책을 추천하고 소통하는 소셜 네트워크다. 가입자끼리 ‘독서 친구’를 맺어 어떤 책을 읽는지, 책을 읽은 느낌은 어떤지 등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사용자의 구매 내역과 독서 활동을 기반으로 책을 추천하는 ‘추천마법사’를 통해 같은 책을 구매한 회원이 관심을 보인 책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또 사용자가 검색한 책과 관련해 사람들이 쓴 모든 글이 나오는 기능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가입 시 이용자가 매긴 영화의 별점을 기반으로 날마다 새 영화를 추천하는 ‘왓챠’

데이트, 취침, 샤워, 공부 등 이용자의 현 상황에 맞는 음악을 추천해주는 ‘송자’

콘텐츠 앱 ‘피키캐스트’는 60명에 달하는 에디터가 SNS상의 수많은 이슈 중 사용자가 좋아할 만한 정보를 직접 엄선한 뒤 재가공해 제공한다. 20대가 타깃인 만큼 이들은 점잔을 빼지 않는다. 피키캐스트가 집중하는 건 오로지 ‘재미’와 ‘흥미’. ‘외모 안 본다는 YG에서 연예계 휩쓸 여자 연습생’이라는 제목으로 연예 정보를 알려주는가 하면, 최근 인기몰이를 한 각종 ‘허니버터’ 시리즈의 식품을 모두 먹어보고 리뷰하기도 한다. 또 다음카카오의 ‘카카오토픽’은 시사, 연예, 스포츠, 유머 등 총 13개 분야를 한데 모아놓은 개인별 맞춤형 뉴스 서비스 앱이다. 사용자가 관심 분야를 미리 설정해놓으면 카카오토픽이 콘텐츠를 선택해 보여준다. 온라인상에 떠다니는 수많은 정보 중 내가 관심 있는 정보만 골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별도의 가입 없이 기존 카카오톡 아이디로 연동할 수 있어 편리하다.
이외에도 무작위로 선정한 영화 50편에 별점을 매기면 자신이 선호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영화 큐레이션 서비스 ‘왓챠’, 술에 평점을 매기면 이를 바탕으로 취향에 맞는 다양한 종류의 술을 추천해주는 주류 큐레이션 서비스 ‘쉐이버’, 매월 일정 금액을 결제하면 화장품 샘플을 박스에 담아 집으로 배송해주는 화장품 큐레이션 서비스 ‘미미박스’, 가입자의 취향에 맞는 계절 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2주마다 배송해주는 남자친구 같은 꽃 큐레이션 서비스 ‘꾸까’, 동네 인기 빵집의 빵을 선별해 배달해주는 빵 서비스 ‘헤이브레드’ 등도 모두 큐레이션 서비스 바람을 타고 생겨났다.
최근엔 애플도 큐레이션 서비스에 관심을 두고 있다. 지난 2월 영국 BBC 라디오1의 12년 차 유명 DJ 제인 로위를 아이튠즈 라디오로 영입한 것. 로위는 영국에서 꽤 이름을 날리는 스타 DJ 중 한 명이다. 당대의 록 스타들을 초대해 인터뷰하는 것은 물론, 실력 있는 신진 밴드를 발굴해 스타로 견인하기도 했다. 애플이 로위를 영입한 건 온라인 라디오의 단점인 ‘아날로그 감성’의 부재를 보강하고 좀 더 사용자 중심의 음악 서비스로 시스템을 개편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한편 이에 질세라 구글도 지난해에 이용자의 기분에 따라 음악을 골라주는 서비스 ‘송자(Songza)’를 인수했다. 송자는 음악 전문 디렉터가 사용자의 음악 청취 시간과 장소, 지역 날씨 등을 모두 고려해 최적의 플레이리스트를 제시한다. 그간 제품 선택 과정에 필요한 도움을 가족이나 친구 등 인적 네트워크에서 얻어왔다면 이젠 믿을 만한 사람이 추천하는 상품만 골라 접할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지난해 <결정장애 세대(Generation Maybe)>라는 책을 낸 독일의 저널리스트 올리버 예게스(Oliver Jeges)는 “소비자가 선택의 미로에서 헤맬수록 경제는 활력을 잃는다”고 말했다. 제한된 합리성을 지닌 인간에게 지나친 합리성을 강요할 때 시장은 디스토피아가 된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정보가 많으면 의외로 선택은 어려워진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 정보의 접근성이 높아진다고 해서 정보에 대한 효과적 활용을 보장해주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측면에서 누군가의 진심 어린 조언을 원하는 소비자의 니즈는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다. 큐레이션 서비스는 정보의 정확성과 출처, 신뢰성 등에서 사용자에게 신뢰를 준다. ‘yes’와 ‘no’ 대신 점점 ‘maybe’라고 말하게 되는 지금 세대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한 서비스인지도 모른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일러스트 곽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