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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을수록 맛있는 고전

LIFESTYLE

빛바랜 고전이 아니라 삶과 이어지는 살아 있는 지혜를 나눠주는 고미숙 평론가. 그녀의 삶은 심플하지만 고전이 있어 풍요롭다.

몇 년째 인문학 열풍이 거세다. 서점은 물론 TV에서도 관련 프로그램을 여럿 선보일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이 고전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가꿔나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쯤에서 ‘고전을 제대로 탐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자문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적 욕구를 채우고 흘려보내는 콘텐츠가 아니라 삶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고전을 읽는 의의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2003년 펴낸 책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통해 스스로 고전 평론가라고 칭한 고미숙은 14년째 고전 속 지혜를 현대인에게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녀는 학자처럼 문제를 제기하고 학술적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 가족 간 관계 등 우리 삶 속에서 실천 가능한 이야기를 전한다. 위의 저서를 포함한 <열하일기> 3종 세트,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등으로 구성한 <동의보감> 3종 세트,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등 다수의 책을 출간했으며, 지난 10월 출연한 JTBC 교양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를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강연을 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고려대학교 독문학과 재학 시절 우연한 기회에 고전문학에 매료된 그녀는 동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삶과 구도 등의 문제와 대면했다. 고전문학을 바탕으로 철학, 의학 등을 총망라한 지식을 얻는 발판이 된 건 1998년에 시작한 인문학 연구소 ‘수유+너머’ 활동. 3~4명의 인문학 석·박사와 함께 앎과 삶의 일치를 주장하며 식사와 여가 등 일상적 경험을 공유하는 지식인 공동체를 만들었다. “지식이 삶 속에 스며들려면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예요. 그래서 고전문학과 서양 사상을 결합한 학문은 물론, 운동과 여행 등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마련했죠.”
13년 동안 인문학도는 물론 배움을 갈구하는 수많은 대중과 학문적 교류를 이어온 그녀는 보다 넓은 세계와 마주하기로 다짐한다. 2011년 말 수유+너머를 떠나 중구 필동에 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과 인문학 공부 공동체 남산강학원을 설립한 것. “수유+너머에서는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석·박사 중심의 엘리트 교육이 아니라 많은 사람과 호흡할 수 있는 대중 지성을 추구해야 할 때라고 여겼죠. 인문학과 의역학을 접목해 나를 근원적으로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고전문학과 서양 철학에서 갑자기 의역학이라니, 변화의 계기가 궁금했다. “마흔살 이후 몸이 아프면서 스스로 건강을 돌봐야겠다고 생각해 허준의 <동의보감>을 읽었어요. 대부분 <동의보감>을 단순한 의학서로 알고 있는데 그 안에는 철학, 역학, 우주의 원리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물론 수유+너머에서도 앎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며 자신을 돌아봤지만 모호했죠. 하지만 <동의보감>을 읽으면서 내 몸에 대해 탐구하고 몸이 연출하는 운명, 더 나아가 우주에 속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대중에게 고전의 가치를 설파하는 매개자 역할을 하지만 그녀도 힘든 시절 고전으로 구원받은 한 명의 독자였던 셈. “현대사회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음에도 삶과의 연결 고리를 잃어버린 단절된 상태예요. 이런 때일수록 정보와 인간, 사물의 관계를 탐구해야 합니다. 번거롭고 괴롭다는 이유로 인간관계를 피하면 결국 고립된 단자 속에 홀로 남을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외로움을 즉각적으로 채워주는 존재에 탐닉하기보다 고전을 통해 위태로운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한 그녀는 고전이라고 해서 꼭 오래된 작품일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시대와 상관없이 인생과 세계에 대한 탐구로 강한 울림을 준다면 그 작품도 고전으로 여길 수 있어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신영복의 <담론>이 대표적 예죠. 특정 계층을 위한 내용이 아니라 자연의 관점에서 문명을 조명하며, 인간이라는 본질적 존재와 관계를 말하는 두 권의 책은 고전으로 불리기에 충분하죠.”
이뿐만이 아니다. 같은 작품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재해석이 탄생할 수 있는 것 또한 고전의 묘미 중 하나. “사계절의 리듬을 인생의 윤리와 연결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가을의 서늘한 기운은 수렴과 성찰, 겨울의 응축하는 기운은 여유로움 속 지혜와 맞닿아 있죠. 제가 요즘 연구하는 작품인 <서유기>는 구도와 평정심의 중요성을 모두 담고 있어요. 저팔계와 손오공, 사오정은 각각 탐(욕심), 진(성냄), 치(어리석음)를 상징하는데 이들의 여정을 통해 왜 우리가 구도자가 되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세 제자와 달리 삼장법사의 기준에서 <서유기>는 겨울의 고전이에요. 삼장법사는 열 번의 윤회를 거듭했지만 한 번도 평정심을 잃은 적이 없어요. 그처럼 지혜롭게 삶의 중심을 지키며 살아가라고 상기시키죠.”
인터뷰가 끝날 무렵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강의와 세미나를 소화하며 연구를 병행하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의외로 평온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많이 바빠 보이나요? 하루에 8시간 일하는 건 다른 사람과 같아요. 하루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흐름을 따라 강의와 연구, 휴식 등으로 일과를 정하면 몸과 마음이 순조롭죠.”
그녀의 말대로 강연장과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이지만 마음속에 꿈꾸는 세계는 모두를 품을 만큼 넉넉하다. “현재 제 생활에 만족해요. 다만 청년과 노인을 위한 배움의 장을 만들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청년들이 자신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삶을 열려면 스스로 리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성을 확립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청년스쿨과 더불어 노년 세대들이 담담하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인수행센터도 기획 중이에요.”
강연과 배움 그리고 그 속에서 싹트는 우정 덕분일까. 그녀의 삶은 바쁜 듯하지만 여유롭고, 단출한 듯하지만 풍족해 보였다. 아마도 삶 속에서 마주하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모든 인연을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덕이리라. 인터뷰를 끝낸 지금, 문득 그녀는 고전을 매개체로 자기만의 속도로 사는 노매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디터 최윤정(amych@noblesse.com)
사진 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