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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소유욕

LIFESTYLE

‘희소한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은 더 이상 패션, 뷰티업계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음반, 도서, 블루레이 등 ‘컬처 피플’의 마음을 흔드는 문화 예술 분야의 리미티드 세계를 소개한다.

한정판 음반을 낙찰받고 우탱 클랜과 기념사진을 촬영한 튜링제약의 최고경영자(오른쪽)

지난 연말, 전 세계 음반업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의 전설적인 힙합 그룹 우탱 클랜(Wu-Tang Clan)이 단 한 장 발매한 마스터피스 음반 이 온라인 경매업체 패들에이트(Paddle8)에서 벌인 열띤 경쟁 끝에 200만 달러(약 23억 원)에 낙찰된 것. 니켈실버 도금으로 만든 금고 형태의 케이스 속에 가죽 커버로 제본한 174페이지 분량의 가사집이 들어 있고, 총 31곡의 공식 저작권은 88년 동안 앨범의 주인에게 주어진다. 그 행운의 주인공은 미국의 악명 높은 펀드매니저이자 제약 회사 튜링제약(Turing Pharmaceuticals)의 최고경영자 마틴 시크렐리(Martin Shkreli). 세상에 유일무이한 음반을 손에 넣은 그는 트위터를 통해 “나는 당신들에게 특별한 음악을 들려줄 수도 있다”라고 밝혀 우탱 클랜 팬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구매 기회와 기간, 공간을 제한하고 제품에 고급화와 희소가치를 부여해 ‘한정판’의 명성을 더한 순간이다.
이런 단 한 점의 한정판이 아니더라도 ‘리미티드’, ‘100개 한정 판매’ 등의 수식어로 구매자의 마음을 유혹하는 아이템은 세계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작가의 친필 사인과 넘버링을 더해 1000부 한정 수량만 판매한 는 독일의 아트 북 출판사 타셴과 중국의 현대미술가 아이웨이웨이(Ai Weiwei)가 협업해 완성한 아트 북.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분석을 담은 이 책엔 조금 더 특별한 것이 있다. 그의 작품 ‘Straight’ 패턴이 담긴 실크 스카프와 베이징 팡산 구(Fangshan District)에서 수집한 대리석으로 그가 디자인한 북 스탠드를 함께 제공하는 것. 가격은 미화 1만5000달러, 우리 돈으로 약 1700만 원이다. 그 희귀성과 특별함에 대한 대가다. 하지만 이 상품은 이미 ‘품절 대란’을 일으킨 상태라 이제는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나 찾아야 할지 모른다.
이처럼 홍보 마케팅의 힘을 더해 인간의 소유욕을 부르는 한정판이 있는가 하면, 오롯이 작품성과 기획 의도를 높이 평가받아 없어서 못 판 사례도 있다. 클래식 음반으로는 국내에서도 마니아들 사이에 입소문 난 바이올린 걸작집 가 대표적. 2009년 1월 발매 이후 한정 발매와 절판을 반복해온 이 앨범은 세계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음원을 35장의 CD에 담은 세트 전집이다. 도이체 그라모폰, 유니버설, 데카 등 유명 클래식 레이블에서 녹음한 쟁쟁한 연주자들의 명반을 동시에 만날 수 있어 소장가치가 높다. 한 클래식 동호회의 온라인 카페와 음반사 SNS 채널에서는 이 앨범을 두고 “결국 포기했다”, “외국에 사는 지인에게 구매 대행을 요청했다” 등의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과거 자동차, 시계, 양주 등 고가 제품이 경제력 있는 일부 소비자를 대상으로 거래가 이뤄졌다면, 이제는 SNS를 통한 입소문으로 정보력 빠른 사람이 ‘득템’의 영광을 누리는 때가 됐다.

작가의 친필 사인과 넘버링을 더한 1000부 한정 아트 북 <Ai Weiwei>

8888장의 LP 앨범으로 발매한 지드래곤 솔로 2집 <쿠데타>

1936년 100부 한정 초판본을 복원한 백석의 시집 <사슴>

한편 국내에서는 최근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싱어송라이터 겸 소설가,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루시드폴이 자신의 7집 앨범을 한 TV 홈쇼핑 방송에 직접 출연해 판매한 것. 그는 이날 방송 <귤이 빛나는 밤>에서 문화 콘텐츠와 농산물을 결합한 신선한 기획으로 ‘완판남’에 등극했다. 새 앨범과 자신이 쓴 동화책 <푸른 연꽃>, 사진엽서, 제주에서 직접 재배한 귤 1kg을 1000세트 한정 패키지로 묶어 ‘음악이 중심을 이루는 종합적 창작물’로 소개했고, 제품은 단 9분 만에 ‘매진’됐다. 그는 “2014년 제주로 이주해 감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지난 2년여간의 기록을 노래, 글, 사진 그리고 직접 수확한 귤을 통해 보고 듣고 먹는 체험으로 그 감성을 공유하고 싶었다”며 음반의 가치를 색다른 방법으로 각인시켰다. 이후 일반 온·오프라인 음반 매장에서 그의 앨범을 판매하고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심리를 자극하지는 않는다. 이 기획은 리미티드 에디션계에 참신한 에피소드로 남았고, “상업성과 아이디어가 만나 제품의 잠재적 가치를 높였다”는 평을 얻었다.
이런 한정판 시장에 가장 큰 힘을 싣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컬렉터들의 열정이다. 이들은 중복 구매와 시리즈 구매를 서슴지 않으며 애정 어린 소유욕을 불태운다. 2000년대 후반, 인터넷 다운로드와 스트리밍 서비스 등 디지털 매체의 성장에 밀려 DVD 시장과 함께 차세대 저장 매체로 주목받은 블루레이 역시 극장 밖의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최근 국내 블루레이 제작사들이 ‘컬렉터 문화’를 겨냥한 상품을 선보이면서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이들은 ‘1000개 수량 넘버링 한정판’, ‘세컨드 에디션’ 등 특별판으로 수집가들을 유혹한다. 수요가 많지 않을 것을 고려해 적절한 타깃층과 적당한 공급량을 기준으로 세운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블루레이 전문 제작 유통사 ‘플레인 아카이브’는 <프랭크>, <가장 따뜻한 색, 블루> 같은 다양성 영화부터 <이미테이션 게임>, <비커밍 제인> 등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의 블루레이를 출시했다. 영화 해설이 담긴 소책자, 엽서 세트, 감독과 배우가 참여한 음성 해설과 메이킹 필름 등 자체 제작한 부록을 패키지에 담아 한정 수량 판매하고 있다. 플레인 아카이브는 7월 말 출시 예정인 영화 <올드보이> 탄생 10주년 기념 블루레이 <올드 데이즈> 제작에도 참여해 영화 팬 사이에서 기대를 모으는 중. 영화 제작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와 미공개 사진을 담은 스틸 북으로 구성할 계획이다.
몇 해 전부터는 복고 열풍과 함께 ‘아날로그’ 형식의 리미티드 상품이 인기다. 한국 대중문화 예술계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지드래곤은 2013년 솔로 2집 앨범 <쿠데타> 발매 당시 8888장의 LP 앨범도 함께 출시했다. 그의 생년월일(1988년 8월 18일)에서 착안한 발매 수량은 예약 개시 하루 만에 동났고, 구매에 성공한 팬들에겐 더없이 좋은 선물로 남았다. 정가 4만9000원에 판매한 이 음반은 현재 중고 사이트에서 5배 이상의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또한 지난해에 가장 많이 판매된 국내 뮤지션 LP 앨범으로 3000장 한정 수량 제작한 김동률의 6집 <동행>은 아날로그 세대는 물론 디지털 세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층에서 호응을 얻었다.
과거의 한정판을 현대에 새롭게 복원한 예도 있다. 지난 2월 출판사 소와다리에서 초판본을 복원해 펴낸 백석의 시집 <사슴>은 1936년 한지에 인쇄해 전통 양장 제본으로 제작, 단 100부만 출간해 좀처럼 보기 힘들던 책. 당시 2원이던 시집이 지난 2014년 경매 회사 코베이가 진행한 경매에서 7000만 원에 낙찰되며 화제를 모아 한정판계의 ‘레전드’로 꼽힌다. 원본 활자의 느낌을 고스란히 재현해 출간했고,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4위까지 올라 수십 년 희귀본의 한을 풀었다.
이제 리미티드 에디션은 일부 마니아의 전유물이 아니라 작은 차이라도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은 이들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한편에서는 ‘어차피 상술’이라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남들과 다른 특별한 문화 예술을 영위하고 싶다면 희귀한 물건을 ‘득템’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희소성뿐 아니라 실용성과 예술성까지 고려한 물건이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1500장 한정판으로 나온 영화 <프랭크> 블루레이

2009년 1월 발매 이후 한정 발매와 절판을 반복해온 바이올린 걸작집 <Violin Masterworks>

에디터 임해경 (hkl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