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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침 도는 예술

ARTNOW

한 끼 식사를 즐기듯 여유로운 마음으로 예술을 맛볼 시간! 밥상 위 친숙한 음식이 예술 작품으로 변신했다.

파블로 피카소는 20세기 미술사를 대표하는 천재 예술가이기도 하지만 음식에 대한 탐닉과 욕구가 강렬한 미식가였다. 식탁에서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커피를 마시다 냅킨에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음식을 소재로 한 정물화를 많이 남겼다. ‘그린피스를 곁들인 비둘기구이’, ‘뱀장어 마틀로트’는 피카소가 즐겨 먹은 요리를 그린 작품으로 자주 회자된다. 피카소뿐 아니라 폴 세잔, 살바도르 달리, 에두아르 마네 그리고 앤디 워홀까지 미술계 거장에게 음식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한국 미술계도 다르지 않다. 김홍도, 신윤복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풍속화가의 그림에서도 음식을 둘러싼 장면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힘든 김매기 후 먹는 푸짐한 새참이나 숭어찜에 막걸리 한잔 곁들이는 어부들의 점심시간처럼 조선시대 서민의 기쁨과 애환을 담은 그림에 빠지지 않고 술과 음식이 등장한다. 과거 음식을 미술에 활용한 예는 이 정도였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다르다. 끊임없이 새로운 재료를 탐구하는 국내 젊은 작가의 경우 차려낸 음식을 화폭에 담는 것을 넘어 식자재를 작품의 주재료로 활용하는 것. 그중에서도 우리네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식이나 한식 식자재를 기반으로 하는 작가가 눈에 띈다.

이동재, Icon, 캔버스에 쌀, 아크릴물감, 162×130.3cm, 2006

황인선, 밥풀 모자상, 자연 밥풀 캐스팅, 레진 에폭시 코팅, 150×168×45cm, 기변 설치, 2014

먼저 한식 식자재를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부터 살펴보자. 영국 코미디 프로그램의 주인공 미스터 빈을 콩으로,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을 쌀로, 여성 가수 현미를 현미로 그린 재치 있는 초상화로 미술계에서 주목받은 이동재 작가는 곡물 중에서도 일상생활과 가장 밀접한 ‘쌀’에 집중한다. 작가는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환기시키며 생존과 직결된 쌀밥의 가치를 작품에 담는다. 초기에는 하얀 캔버스에 검은 쌀을 나열해 문장을 새겼다. 이후 콩, 팥 등 고유의 색을 지닌 곡물을 조밀하게 붙여 색면 회화처럼 구성하는 실험적 과정을 거쳐 지금은 시대적 인물을 쌀로 재현하는 작업에 다다랐다. 디지털 화면의 망점같이 쌀을 촘촘하게 붙여 이미지를 재현하는데, 쌀 입자 특유의 질감 덕분에 입체적으로 보이는 효과가 있다.
쌀을 물에 불려 밥솥에 쪄낸 밥풀을 이용해 작업하는 작가도 있다. ‘밥풀 작가’로 불리는 현대미술가 황인선이 그 주인공. ‘고단한 어머니의 삶’에서 영감을 얻어 콩나물, 시금치나물, 총각김치, 배추김치, 된장찌개 같은 반찬을 소재로 목판과 석판, 실크스크린 작업을 해왔다. 그러다 2008년에 밥풀 작업으로 개인전을 연 후 밥풀 오브제에 주목하고 있다. 밥풀을 캐스팅과 몰딩 기법으로 한 톨씩 붙여 만든 그릇으로 상을 차린 ‘밥상 위의 연금술: 동서의 대화’가 대표작. 찌개 냄비를 중심으로 양옆에 동양의 그릇과 서양의 그릇을 배치해 동서양의 조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건 밥풀로 대형 작품 제작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2014년 작 ‘밥풀 모자상’이다. 실물 크기의 어머니와 아들 모습은 밥풀로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스케일이 돋보인다. 형태를 유지하는 밥풀의 밀집력이 놀라운 한편, 구수한 누룽지 생각이 절로 나는 비주얼에 한 입 베어 먹고 싶은 마음도 든다.

김진아, Accumulation-Cabbage1, 아크릴과 혼합 재료, 260.6×162.1cm, 2007

김진욱, 비빔밥 이야기(1110-20120530), 캔버스에 유채, 60.6×72.7cm, 2012

하루.K, Delicious Scape-spring, 장지에 수묵 채색, 58×78cm, 2014

김문영, 아침 햇살, 뱅어포와 삼베, 30×28×30cm, 2012

밥과 함께 한식을 대표하는 반찬 김치도 빠뜨릴 수 없다. 김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속이 꽉 찬 배추. 김진아 작가는 특별하진 않지만 그 안에 숨은 아름다움과 친숙함에 끌려 배추를 작품 소재로 선택했다고. 그녀는 켜켜이 쌓인 배춧잎의 조형적 매력을 담아 ‘Accumulation-Cabbage’ 시리즈를 발표했다. 점묘화 작업 방식으로 중첩된 배춧잎을 밀도 있게 표현한 것이 특징. 그녀의 작품을 보면 풍성한 배춧잎이 마치 화려한 꽃 같은 형상이라 흥미롭다. 푸른 잎 식물이지만 식탁 위에 오르는 식자재로 익숙한 배추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낄 수 있다.
한국의 미를 음식과 연결 지어 다채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가도 있다. 세계적으로 한식 붐이 불고 있는 요즘, 그 중심에 비빔밥이 있다. 우리 선조의 삶과 지혜가 담긴 비빔밥을 소재로 한국의 미를 알리는 김진욱 작가는 어느 등산로 식당에서 먹은 비빔밥의 색채와 재료의 어우러짐에 반해 ‘비빔밥’ 연작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언뜻 보면 사진인지 그림인지 헷갈릴 정도로 리얼리티가 살아 있다. 직접 비빔밥을 만들고 촬영한 다음 밥과 나물, 양념 등 재료의 형태와 색감이 좋은 사진을 골라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기 때문. 단순히 비빔밥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색채로 시각적 유희를 부여하고, 각 재료의 조화와 역동적인 모습을 통해 어울려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가 하면 하루.K(본명 김형진) 작가는 점잖고 고루하다는 인식이 있는 전통적 동양화에 친숙한 음식을 더해 재미있게 접근한다. ‘맛있는 산수’ 시리즈는 절벽과 폭포가 어우러진 풍경에 당근, 버섯, 고기 등을 절묘하게 배치하거나 접시 위에 음식 대신 산수를 그려 초현실적 분위기를 낸다. 산수와 음식이 만들어내는 의외의 조합을 보면 “동양화도 재미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에 수긍이 간다.
한편 김문영 작가는 음식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좀 더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과 음식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다 수많은 생명이 식탁에 오르기 위해 죽어간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 생닭, 생고기, 닭발, 말린 뱅어포, 말린 문어 다리 등의 식자재로 가방이나 책, 구두 같은 일상 소품을 완성해 작은 생명의 존엄성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표현 방식은 각기 다르지만 작가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흔히 접할 수 있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음식이 예술 안에서 아름다움과 특별한 가치를 발한다고. 물론 이것은 독창적인 예술의 표현 기법과 음식의 본질이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식자재의 변신을 통해 탄생한 맛있는 작품은 현대미술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들에게도 분명 반가운 소식일 듯하다.

 

참고 서적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주영하 지음, 사계절출판사 펴냄)
<피카소의 맛있는 식탁>(에르민 에르셰 지음, 예담 펴냄)

에디터 문지영 (jym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