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샷과 OB의 외교학
21세기 외교의 화두는 골프다

외교는 제로섬 게임이다. 교섭이란 수사적 표현 뒤엔 총탄보다 무서운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각국의 관료와 수상은 말로 전쟁놀이를 벌인다. ‘아’와 ‘어’ 차이로 얻거나 잃고, 다 죽거나 덜 죽는 낭떠러지 협상인 셈이다. 외교는 국가의 미래를 좌우한다. ‘누구와 싸우고 어디와 손잡을 것인가?’, ‘어떤 것을 내주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언제 Yes를, 어디서 No를 외칠 것인가?’ 등 이제껏 역사 속에서 이뤄진 무수한 선택의 결과가 현재 세계의 정세다. 특히 요즘처럼 민감한 시기에 외교란 화약고 옆에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불씨가 꺼지면 굶고, 과하면 터진다. 이처럼 살벌한 외교에 최근 여유롭고 고상한 스포츠가 함께 거론되고 있다. 신사의 운동, 골프다.
골프 외교, 이 이질적인 조합은 정초에 이뤄졌다. 미합중국 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일본 98대 총리 아베 신조에 의해서다. 두 국가원수는 지난 2월 10일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들은 ‘견고한 동맹 유지’나 ‘양국 이해관계를 위한 노력’ 등의 빤한 말로 2시간을 채웠다. 아쉬울 것은 없었다. 워싱턴 회담은 워밍업일 뿐 본게임은 따로 있었다. 트럼프와 아베는 이튿날 함께 에어포스원을 타고 플로리다로 향했다. 목적지는 트럼프가 소유한 초호화 리조트 ‘마라라고(Mar A Lago)’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2차 회담을 치렀다. 장소는 필드, 손에는 펜 대신 클럽을 쥐고서다.
21세기 외교의 화두는 골프
이번 회담엔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트럼프는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일본을 강하게 압박했다. 그는 보호무역을 앞세워 일본의 환율 조작(?)을 비난했고 미국 내 인프라 투자, 국방비 추가 부담 등을 요구했다. 특히 환율 이슈는 아베노믹스와 정면 충돌하는 사항이었다. 이제 갓 취임한 트럼프가 물러설 리 없고 경제정책 하나로 지지율을 유지해온 아베 역시 막다른 길목으로 내몰렸다. 아베는 영리한 러브콜을 보냈다. 트럼프가 당선인 시절이던 지난해 11월 뉴욕 트럼프타워로 달려가 골프 회담을 성사시킨 것이다. 아베는 1957년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방미 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과 골프 회담을 한 것을 언급하며 대화의 상당 부분을 골프로 채웠다. 그리고 만남 직후 트럼프에게 50만 엔 상당의 ‘혼마 베레스 S05’ 드라이버를 선물했다. 트럼프는 유명한 골프광이다. 역사상 골프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사업가(그가 보유한 전 세계 골프장은 20개에 이른다)이자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골퍼(핸디캡 3)다. 골프 이슈에 귀가 솔깃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 일본 수제 클럽이라니(여전히 미국인은 Made in Japan 클럽에 대한 동경이 있다)! 마다할 리 없었다.
회담의 성과를 나열하긴 아직 이르지만 현재까지 상황으론 양국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는 평이다. 미국은 실리를, 일본은 명분을 챙겼다. 일본은 미국에 ‘미국 내 인프라 투자’와 ‘미국 국채 추가 구매’, ‘셰릴가스 수입’ 등을 약속하고 ‘엔저 비판 자제’, ‘일·중 마찰에서 미국의 역할 요청’, ‘G7에서 일본 지지’ 등에 대한 암묵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가장 센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은 일본 국내나 대외 관계에서도 과시할 만한 성과다. 아베는 회담 직후 “누가 이겼는지는 국가 기밀이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라며 애틋함을 과시했다. 전 세계 미디어도 일제히 이들의 밀월 관계를 보도하며 ‘아베토라 콤비(일본 미디어가 생성한 신조어, 아베 + 트럼프)’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사실 이 회동이 골프 외교의 첫 사례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기시 전 일본 총리와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의 필드 회동을 시작으로 1980년대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등은 동맹 강화나 협정을 앞두고 필드를 찾았다. 한국도 일찌감치 골프 외교에 힘을 써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정부 수립 1주년 기념 연회장에서 주한 외교관들이 국내에 골프장이 없어 주말마다 일본 오키나와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즉각 코스 설립을 지시했다. 은행에서 약 200만 환을 대출받아 조성한 군자리 클럽은 국내 최초의 골프 외교 장소로 쓰였다. 이후 외교관이나 해외 주요 인사가 방한하면 군자리 클럽으로 초대해 군사 협력 우방국을 넓힌 것으로 전해진다. 골프가 외교 외에 국내 정치의 윤활제로 쓰인 사례도 많다. 대표적 정치인은 미국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 프로 암 대회의 단골 멤버로 불릴 정도로 골프광인 그는 자신의 후원자와 결속을 다지거나 공화당 의원들과 타협점을 끌어내는 데 라운드를 적극 활용했다. 미국의 <타임>은 이를 빗대 “클린턴에게 골프는 아부하는 데 활용하는 스포츠”라며 비꼬기도 했다. 골프 덕을 가장 많이 본 것은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조깅 애호가로 알려졌지만 민주당 총재 시절 YS는 매 주말 골프장을 방문해 정치세를 불려나갔다. 국내 정치의 역사적 사건으로 꼽히는 3당 합당을 이끌어낸 곳도 골프장이다. 1989년 10월 안양 컨트리클럽에서 김영삼 총재는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를 초청해 27홀의 라운드를 돌며 합당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처럼 정치인들은 골프를 사랑한다. 왜일까?
정치인들의 골프 사랑
골프장은 비밀을 철저히 보장한다.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라운드에서 엿들을 귀나 도청의 염려는 없다. 세간의 이목이 쏠리지도 않는다. 자국 국민이나 지지자들을 의식해 센 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국회나 청와대 같은 경직된 장소가 아니다 보니 편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4시간 가까이 함께 걸으며 플레이하다 보면 공감대는 자연스레 형성된다. 그렇지만 정치인에게 골프는 양날의 검이다. 골프 치는 정치인을 대중은 혐오한다. 타이밍을 잘 못 잡은 라운드에 된서리를 맞거나 정치 생명이 끝난 정치인도 수두룩하다.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를 지낸 톰 딜레이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다음가는 2인자로 평가받았다. 딜레이는 로비스트 잭 아브라모프에게 지난 2000년 영국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골프장에서 호화 접대를 받은 정황이 드러나자 하원 의장직을 사퇴하고 검찰 조사까지 받았다. 당시 라운드에 들어간 경비만 약 7만 달러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퇴임 직전 60%라는 지지율을 기록한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도 퇴임 직전까지 골프 스캔들에 시달렸다. 오바마는 두 번의 임기 동안 총 306번 라운드를 했다. 물론 재임 기간에 1200번 라운드를 즐긴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이나 800번 이상을 기록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서민과 중산층이 주요 지지자인 그에게 골프는 임기 내내 아킬레스건으로 꼽혔다. 트럼프는 현재의 추세라면 오바마의 기록을 가뿐히 넘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는 부임 후 3주 동안 골프장에서 총 25시간을 보냈다. 이는 외교(21시간), 기자회견(4시간) 시간을 더한 것과 같은 수치다.
국내에도 골프로 구설수에 오른 정치인은 수두룩하다. 전 재산 29만 원으로 기초생활수급자에 속하는 전 대통령의 황제 라운드나 전 정권 통수권자의 기일에 추모식장 인근 골프장에서 라운드를 즐긴 MB는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골프 스캔들로 망신살이 뻗친 대표적 국내 정치인은 참여정부의 두 번째 국무총리인 이해찬 의원이다. 이 의원은 남다른 골프 사랑(?)으로 참여정부 당시 곤혹을 치렀다. 산불로 낙산사에 보관 중이던 보물 동종이 불에 타던 당시 골프장에 있었고 취임 1주년 기념 라운드 때는 전국의 집중호우로 비상대책위원회가 조직되던 시점이었다. 여기에 철도노조 파업 첫날 부산 지역 상공인들과 골프를 즐긴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해 결국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처럼 골프는 정치나 외교에서 윤활제가 되거나 때론 독으로 작용한다. 관건은 ‘언제’, ‘누구의 돈으로?’라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번 필드 회동에 소요된 모든 비용을 사비로 충당했다. 외교적 교통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미국 내 공감대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현재 국내 정치권에선 13년 이후 암묵적 골프 금지령이 내려진 상태다. 한미연합합동훈련(키 리졸브) 시기에 군 장성들이 라운드 회동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 정부로서는 정권 초기 빗발치는 비난 여론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 세계에서 가장 힘 센 지도자와 묵은 갈등이 켜켜이 쌓인 국가의 수장은 필드에서 재미를 봤다. 긍정적인 굿 샷 외교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일러스트 이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