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옆자리
“어떤 사람을 앞서게 하는 것은 그 뒤에 있는 사람이다.” 미국의 정치 평론가 멀 크로웰의 말이다. 홀로 빛나야 하는 일인자는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으며 완벽할 수도 없다. 그래서 늘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유능한 이인자를 필요로 한다. 일인자를 성공적으로 보필한, 때로는 일인자를 질책하고 나무란 위대한 이인자들의 이야기.

일인자를 넘어선 이인자, 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 시대에 이인자를 자처한 남자다. 그는 당시 중국의 상황에서 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련된 댄디였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해 서구 외교관과도 친밀한 대화가 가능했고, 잘생긴 외모에 슈트 차림으로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영국의 몽고메리 경도 저우언라이에 대해서만큼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다. 20세기 초반 프랑스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교양을 갖춘 엘리트가 이인자의 길을 자처한 건 마오쩌둥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투박한 남자였다. 저우언라이와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에 서 있었다. 하지만 난세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강력한 상징이 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마오쩌둥은 강력한 자기 확신이 있었고, 대중의 눈높이에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탁월한 웅변가였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대중적 카리스마를 확인했고, 기꺼이 그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걸 택했다. 물론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모든 독재자가 그렇듯 마오쩌둥 역시 늘 배신을 두려워했고,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가 그토록 오랫동안 이인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그가 마오쩌둥을 불안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보스에게 확실히 복종했고, 파벌도 만들지 않았다. 확고한 이인자의 자리를 기반으로 권력 이면에서 중국 공산당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특히 사실상 국가권력이 붕괴 직전에 이른 문화대혁명 기간에 그가 보여준 리더십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꽤 벌어졌다(저우언라이의 대중적 인기가 올라간 것을 질투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치 않다). 저우언라이는 말년에 삼인자로 밀려났고, 지병으로 사망한 뒤 장례식장에도 마오쩌둥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9개월 후 마오쩌둥 역시 죽음에 이르렀지만 당시 중국인은 일생 동안 국민을 위해 헌신한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더 슬퍼했다. 저우언라이의 가장 큰 실패는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는 공동의 선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포기한 사람이었고, 그건 곧 공산주의의 이상적 인간형이었다. 그는 어쩌면 애초에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조국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 힘이 필요했을 뿐. 그가 여전히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는 이유다.
단호히 ‘No’를 외친다는 것, 루이스 하우 좋은 참모란 어떤 사람일까? 일인자의 의도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일까? 그건 그것대로 옳을 것이다. 하지만 일인자의 판단을 단호히 거역할 수 있는 이야말로 좋은 참모일지 모른다. 검증하고 비판할 수 없는 자가 충신일 리 없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모인 루이스 하우(Louis M. Howe)처럼. 루스벨트는 미국 대통령 중 처음이자 마지막 4선 대통령이다. 그만큼 국민의 사랑을 받은 대통령이기도 하다. 루스벨트의 장기 집권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루이스 하우다. 키는 작고, 눈빛은 늘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심한 천식으로 목소리가 갈라졌음에도 담배를 입에서 놓지 않은 헤비 스모커. 아마 여자들 입장에서는 최악의 남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외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역량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상원의원 선거를 목전에 두고 병으로 쓰러진 루스벨트를 대신해 선거운동에 나서 ‘후보가 얼굴을 드러낼 수 없음에도 당선시키는’ 기적을 일으키는가 하면, 불륜으로 이혼을 결심한 루스벨트를 설득해 바람기를 잠재우기도 했다. 소아마비로 쓰러져 7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한 루스벨트를 곁에서 지키며 결국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것도 루이스 하우다. 그는 일인자인 루스벨트를 무조건 떠받드는 대신 충실한 비판자 역할을 자처했다. 성격이 괴팍한 그는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루스벨트에게도 욕을 퍼붓고 독설을 일삼았다. 감히 일인자에게 그렇게 대들면서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루스벨트에게도 루이스 하우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가 아이디어를 내면 하우는 그 의견의 결점을 샅샅이 찾아내는 비판자 역할을 담당했다. 루스벨트는 하우의 모든 비판을 방어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계획을 공표했다고 한다. 물론 일인자의 면전에서는 괴팍했지만 대외적으로는 루스벨트를 위해 악역도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인 조력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루스벨트가 그를 끝까지 중용한 것이다. 하우는 이렇게 말했다. “참모의 ‘예스’는 먹기 좋은 독약이나 다름없다. 지도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예스맨 무리다.” 그렇다. 잘못 흘러가는 조직에는 지도자의 선택에 태클을 거는 자가 없다. 루스벨트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것은 하우처럼 ‘노’를 외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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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마비로 쓰러져 7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한 루스벨트를
곁에서 지키며 결국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것도 루이스 하우다.
그는 일인자인 루스벨트를 무조건 떠받드는 대신
충실한 비판자 역할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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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그늘 아래서, 팀 쿡 스티브 잡스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메시아였다. 그는 분명 놀라운 인물이었지만 실무에는 약한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멋진 물건을 만들 수는 있지만, 생산 공정의 효율성까지 지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영입한 것이 팀 쿡이었다. 컴팩의 부사장이던 쿡은 1998년 잡스에게 스카우트돼 애플에 입성했다. 당시 애플의 창고에는 재고가 넘쳐났고, 불필요한 제품 라인업도 많았다. 이는 회사 입장에서는 곧 비용이었다. 쿡은 이 정신없는 회사를 정리했고, 그 덕분에 애플의 재무 건전성은 확연히 나아졌다. 잡스가 CEO로서 큰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던 건 쿡이라는 관리형 이인자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문헌에서 드러나듯 분명 두 사람의 기질은 달랐지만 그래서 더 서로를 신뢰했다. 잡스는 사망 직전 쿡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가 뭐래도 당신의 뜻대로 밀고 나가. 잡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따위의 생각은 하지 말고.” 잡스의 유언에 따라 쿡은 지금 애플의 일인자가 됐다. 쿡이 취임한 후 애플은 달라졌다. 잡스 시절의 독선적인 애플이 아니라 시장의 트렌드와 사용자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잡스가 모든 걸 주도하던 시절과 달리 디자인과 마케팅, 소프트웨어 개발 등으로 분야를 나누어 해당 임원에게 권한을 넘겼다. 회사의 중대 사안마저 비밀리에 처리한 잡스와 달리 쿡은 직원들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이다. 쿡은 자신이 잡스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유동적 협력 관계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애플 팬들의 종교적 광기는 사라졌지만, 애플은 잡스 시절보다 (적어도 주가만 보자면) 더 탄탄하고 안정적인 기업이 됐다. 그것이 팀 쿡의 애플이다. 물론 ‘잡스가 있었다면’이라는 불필요한 가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도 쿡은 계속 이인자의 느낌으로 남을지 모른다. 하지만 경이로운 리더의 뒤를 이어받은 이 남자는 매년 잡스의 기일마다 직원들에게 메일을 쓴다. 지난해에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미래를 보는 선구자를 잃었고, 애플의 리더와 멘토를 잃었다.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매일 그가 그립다.” 잡스의 가장 큰 행운은 이렇게 성실한 이인자를 곁에 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같은 꿈을 꿨다, 데이비드 액설로드 미국은 생각만큼 좋은 나라가 아니다. 빈부의 격차가 크고, 보편적 복지 수준도 낮은 편이다. 한국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국민건강보험이 미국에서는 대선 때마다 화두가 될 정도다. 미국의 저력은 오히려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지난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 그렇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선출한 것은 미국의 정서적 개방성을 나타내는 지표처럼 보였다. 오바마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선거운동의 브레인이던 데이비드 액설로드(David Axelrod)라는 남자다. 1992년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흑인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고 둘 다 아버지가 자살했으며, 시카고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정치를 꿈꾼다는 점에서 이상향이 같았다. 둘은 정서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15년 지기 친구였다. 액설로드는 오바마가 대선에 뛰어들겠다며 선거 캠프에 참여할 것을 부탁한 순간에 대해 이렇게 소회한다. “오바마의 출마는 내 영혼을 자극했다. 내가 만약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든다면 그건 내 인생에서 정말 위대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액설로드는 오바마의 삶에 대한 공감을 정치적 스토리텔링으로 승화시켰다. 오바마의 일상을 담은 영상을 만들고 이를 인터넷에 유포해 젊은 유권자를 끌어들였다. 이 영상을 포함해 이후의 다양한 영상물과 연설로 유권자들이 오바마 개인의 삶에 매료되게 했다. 다른 후보는 일꾼처럼 보였지만 오바마는 시인처럼 보인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일인자는 결국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자리다. 돈 주고 자리 준다고 충성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오바마는 자신의 비전으로 자발적 충성을 이끌어냈고, 액설로드는 그에 감응해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마음으로 이어진 관계란 이런 것이다.
참고 서적 <1인자를 만든 참모들>(이철희 지음, 페이퍼로드 펴냄), <위대한 이인자들>(데이빗 히넌·워렌 베니스 지음, 좋은책만들기 펴냄)
에디터 이기원 (lkw@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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