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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세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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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한 올 한 올 칠한 붓질이 우리의 잊힌 감각을 일깨운다. ‘세필의 화가’, 김홍주가 다시 돌아왔다. 지난가을, 평창동의 한 카페에서 그와 주고받은 세필화 같은 이야기.

김홍주는 한국 미술계에서 세필의 화가로 통한다. 캔버스를 채운 대상이 무엇이든 그가 작업하는 방식은 늘 변함이 없었다. 거대한 꽃으로, 산수로, 인물로, 지도로, 읽을 수 없는 글자 형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그의 작품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꽃, 산수, 인물, 지도, 글자라고 인식한 우리의 감각은 방향을 잃는다. 새끼손가락보다 가는 붓으로 캔버스의 올을 따라 하나하나 공들여 쌓아 올린 짧은 붓질의 집합이 꿈틀거린다. 캔버스에 돋아난 체모이자 평생 몸을 써서 무언가 한다는 것의 본능적 감각을 일깨우는 촉수와 같은 선. 그의 작품은 아름답지만, 그만큼 변태적이며 폭력적이고 자기 파괴적 에너지가 응축돼 있다. 그는 그저 덤덤하게 말한다. “내 그림은 그냥 세필화죠. 그것이 다른 작품과의 유일한 차이점입니다.” 그렇다. 그냥, 세필화. 김홍주가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12. 17~2016. 1. 24)을 연다. 5년 만이다. 30년 넘게 몸담은 대학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평창동에 새롭게 마련한 작업실에서 쌓아 올린 붓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무제,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91×91cm, 2013, Photo by Sangtae Kim,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야 뭐 그냥 그림 그리면서 살았죠. 그거밖에 할 일이 없어요.(웃음) 학교도 정년퇴임했고.

5년 만에 개인전이 열립니다.
세필로 혼자 그리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국제갤러리에서 오랜만에 전시하자고 제안을 했어요(그는 국제갤러리의 소속 작가다). 그런데 이번엔 몇 점 안 나가요. 작품 크기도 크지 않고. 많이 알려진 꽃 그림도 아니고, 예전처럼 묘사 중심의 작업도 아닙니다. 그리는 대상이 형상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고.

선생님의 꽃 그림을 좋아하는 독자가 이 인터뷰를 보면 조금 섭섭하겠네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꽃 그림이 선생님께서 상업 갤러리와 일을 시작하면서 만들어낸 ‘잘 팔릴 만한’ 대중 친화적 작품으로 치부하기도 해요.
그러게요. 꽃 그림을 처음 발표한 건 지금은 없어진 수화랑에서 열린 전시였어요. 그때 출품한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죠. 1997년에 금호미술관에서 내 개인전이 열렸는데, 어느 날 국제갤러리에서 전화가 왔어요. 전시 한번 하자고. 당시 국제갤러리에서 일하던 박경미(현 PKM갤러리 대표) 씨가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교 연구실까지 찾아왔어요. 얘길 들어보니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한 사람이 작가 코디 최라고 하더군요. 자기가 한국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머문 전시가 없었다고요. 참, 거기에도 꽃 그림이 몇 점 있었죠. 코디 최가 내 작품에 관심을 보이며 좋게 말하니까 국제갤러리에서도 같이 해보자고 한 거죠. 내가 먼저 꽃 그림으로만 전시해보자고 제안했어요. 꽃 그림을 막 그리기 시작한 때니까 아이디어가 많았죠. 오케이하더군요. 2002년에 전시가 열리고 삼성에서 작품을 거의 싹쓸이해가니까, 국제갤러리에서도 놀랐겠죠. 내 추측이 그래요. 그 당시에 사간 그림들이 아직도 신라 호텔에 전시돼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꽃 그림 초기 작품들이에요. 근데 왜 이렇게 오래 걸어놓는지 모르겠어요.(웃음)

2005년에 로댕갤러리(현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개인전을 열게 된 배경에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런데 그땐 꽃 그림을 슬슬 포기하던 시기예요. 지겨워져서. 그때 몸이 아파서 정말 힘들었어요. 심장병 수술을 한 데다 작업할 기력도 없고, 우울증까지 겹쳐서. 그렇게 한 10년을 고생했죠. 그래도 나는 상업적 성공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요. 작가도 돈이 있어야 작업을 하죠. 상업 화랑을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에요. 아무래도 나이가 드니까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그냥 버티는 거죠. 완쾌된 게 아니라 지금도 약을 먹고 있어요. 내가 50대 후반부터 돋보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돋보기를 쓰고 20~30분만 그림을 그려도 초점이 안 잡혀요. 이런 상태로는 계속 못할 것 같아서 돋보기를 안 쓰고 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에요.

어떤 방법인가요?
세필이 아니라 큰 붓으로 해보는 거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몸이 안 받아들여요. 생각은 자꾸 다른 걸 해야겠다 하는데. 그리고 뻔한 그림이 나와요. 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소위 ‘페인터리’하다는 작업과 다른 건데, 그런 그림이 나오더라고. 내가 이런 식으로 하면 내 작품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요. 그래서 아직도 이렇게 세필에 매달리고 앉았어.(웃음)

이번 전시 출품작을 이미지로 미리 봤는데, 몇몇 작품에서 흘러내린 물감을 그냥 두셨더라고요.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요. 그런 부분이 도드라져 보였어요.
​초벌을 할 때 흘러내린 물감을 몇몇 작품에 그대로 뒀어요. 세필로 하기 전에 바탕칠을 하는데, 저는 원체 물감을 옅게 바르니까 아무리 조심해도 죽죽 흘러내려요. 처음엔 열심히 닦았지만, 이번엔 살려봤어요. 옛날 꽃 그림 중에도 그런 것이 있긴 했죠.

무제, 캔버스에 유화물감, 236×460cm, 1985~1987,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흘러내린 부분을 그림으로 칠 것이냐 아니냐, 그림의 안과 밖의 관계를 무엇인가 묻는 거죠. 물론 판단은 보는 사람의 몫입니다. 제 그림은 그린 부분과 그리지 않은 부분이 명확하게 나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서양에선 회화를 창문을 통해 본 스크린이라 여겼죠. 나는 평생 그 스크린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어요. 일부러 틀에 그림을 집어넣거나, 배경 없이 대상만 그려놓았죠. 누군가는 그림 같지 않은 걸 그림이라 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프레임화하지 않은 두 작품을 선보여요. 핀으로 꽂아둘 거예요. 꽃 그림도 처음엔 천으로만 전시했거든요.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이 프레임화한 것과 안 한 그림을 비교해서 봤으면 좋겠어요. 앞으론 이런 방식으로 전시를 많이 해보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 경대나 창틀 같은 일상의 오브제에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인물을 그려 넣은 초기작을 정말 좋아해요. (사진을 보여주며) 이건 1978년 2월에 서울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 전경인가요?
이런 걸 어디서 구했어요? 나도 팸플릿이 다 없어졌는데. 초기작은 내가 갖고 있는 것도 있지만, 누가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요. 시장에선 내 옛날 작품에 관심도 없는데. 그게 대전에 내려가기 전 서울 대광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그린 작품이에요. 작업실이 없어서 작은 사물을 이용해 그린 거죠. 나를 모델로 해서 완성한 작품도 많고요. 그림이 작은 데다 거울이나 유리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아주 얇은 실크 천에 세필로 작업했죠. 그걸 하면서부터 세필의 감각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초에 개념미술을 표방하는 전위예술 단체인 ST(Space and Time) 그룹전에 출품한 작품도 세필과 유사한 붓질이 도드라져 보였어요.
그땐 큰 붓으로 직직 그린 거죠. 수채화 붓 정도 크기였어요. 그 당시 작품을 보면 자국 같은 게 보이는데, 거기에 원래 인형을 붙여놓고 작업한 거예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보존하기 어려워 둘둘 말아 가지고 다니다 떨어졌죠.

예전에 평론가 윤진섭 선생이 이런 글을 썼어요. “김홍주는 당시 동료 작가들이 현학적이고 개념적인 얘기를 할 때, 아주 명확한 자기 세계가 있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미술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까, 한마디로 ‘회화는 죽었다’였어요. 1960년대부터 외국에서는 그림에 관심이 없었거든. 그러면서 나온 게 이벤트, 설치, 대지미술 같은 거죠. 페인팅을 뛰어넘어 확장된 개념적인 미술. 나도 젊으니까 그런 최신 미술에 관심이 있어서 ST에도 참여했죠. 한 3~4년 곁에서 겪어보니까 이건 나하고 안 맞는구나 싶더군요. 당시 한국은 컨셉추얼한 걸 시도하기도 쉽지 않았고 그런 문화적 토양도 없었죠. 무엇보다 내 성격하고도 안 맞았어요. 에이, 나는 그냥 선생이나 하면서 내 그림을 그려야겠다 생각했죠. 어쩌면 그때 아티스트로서 포기한 거죠.(웃음) 그런데 전통적 회화도 재미없고, 누굴 따라 하고 싶지도 않아서 회화에 관한 내 나름의 해석을 시도해보려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이상한 그림이 나왔지.

1945년에 충청북도 회인에서 태어나셨죠.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포털 사이트에 회인을 검색해보니 고지도가 나오더라고요. 섬네일 이미지를 보고는 1980년대 풍경과 인물을 지도처럼 나열한 글씨 그림을 보는 기분이었어요.
굉장히 오지죠. 그런데 내 고향과 1980년대 작업에 특별한 연관성은 없어요. 내가 듣기로는 워낙 외진 곳이라 중앙 정치계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그곳에 숨어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출세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웃음)

작가 생활을 하면서 줄곧 학교에 계셨어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요.

퇴직하고 작업만 하려니 조금 허전하진 않으세요?
글쎄, 서울로 올라오고 나니까 대전에 갈 생각이 없네요. 거기까지 내려가려면 끔찍하니까요. 학생들하고 5년 넘게 얘길 안 했더니, 이젠 수업도 못하겠어요.

수업은 어떻게 진행하셨어요?
퇴직을 앞두고 한 10년 전부터는 토론식 수업을 했어요. 학생들이 하고 싶은 작업을 에스키스해서 실기실에 가져와 작업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내가 코멘트를 해줬죠. 애들이 발표하면서 미술 용어나 개념을 잘못 쓰면 고쳐주고요. 그런데 학생들은 그 수업을 제일 무서워했어요. 저를 막 피하기도 하고요. 자기가 크리틱한 순간에 놓이는 게 싫었겠죠. 우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말씀을 좀 직설적으로 하시는 편이니까요.(웃음)
그래도 졸업하고 작가로 활동하는 친구들은 작품이 잘 안 풀리면 내 생각이 난다며 가끔 연락이 와요.

수업 중에 많이 하신 말씀은 어떤 건가요?
내용에 매달리지 말라고 많이 얘기했어요. 학생들이 작품을 얘기하면서 사회 이슈만 줄줄 쏟아내요. 그럼 내가 그러죠. 그런 의식을 개인적으로 갖는 건 관계없다, 하지만 지금은 미술 시간 아니냐, 내가 사회학을 가르치는 선생도 아닌데 그런 것만 얘기하면 우리가 무슨 대화를 어떻게 하겠느냐. 대학은 동시대 미술이 어떻게 변화해가는지 살피고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곳이죠. 그리고 싶은 대상, 그 대상과의 관계를 고민해야 합니다.

무제,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96.5×96.5cm, 2009,
Photo by Sangtae Kim,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무제,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59×212cm, 2014,
Photo by Sangtae Kim,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2000년대 중반,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젊은 작가 몇몇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대전까지 내려간 일이 기억나요. 선생님을 뵈러요.
그때 많이 놀랐어요. 나야 시골에 있으니까 젊은 작가들이 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랐죠. 좋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나같이 옛날식으로 그림 그리는 사람한테 왜 관심을 갖느냐. 그랬더니 매체로 뭔가를 하는 한국 작가들이 너무 뻔하니까, 소박하게 그림을 그리는 내게 더 관심이 간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들은 지금도 만나면 나를 반갑게 맞아줘요.

특정 흐름이나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당신만의 길을 걸어오셨으니까요.
내 작품을 긍정적으로 보는 젊은 작가가 있구나 싶어서 기뻤어요. 그런 생각이 나한테 도움도 많이 됐죠. 예전엔 미술계가 관료적이라 협회나 모임 같은 데 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미술협회 같은 곳에 가입은 해놓고 회비만 내면서 나가진 않았어요. 그 시간에 앉아서 그림이나 그리는 거죠.

대전에 계신 게 말 많은 한국 미술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기에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에이, 대전에서도 편하진 않았어요. 나는 관료적 시스템이 너무 짜증나요. 학교도 그렇게 돌아가고, 한국 사회 전체가 관료주의에 빠져 있다고 할까. 내가 약간 자폐성이 강할 수도 있겠죠. 게으른 편이기도 하고요. 계획을 짜고 여기저기 다니는 거 질색이에요. 내가 하고 싶을 땐 하고, 쉬고 싶을 땐 쉬는 게 좋지. 사람들은 내가 의지력이 강해서 목표를 정해놓고 작품 활동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좀 자연스럽게 살았어요.

사실 작품에서도 그런 성향이 엿보이죠. 언뜻 보면 평화롭고 깨끗하고 시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까칠하고 히스테릭하고, 어떨 땐 좀 징그럽기도 해요.
조형적으로만 예쁜 그림은 나하고 감각적으로 안 맞아요. 그렇게 화장하는 건 재미없습니다. 나는 그걸 ‘센티멘털리즘’이라고 해요. 아름답고 섹시하지만 폭력적인 인간의 어두운 면이 알게 모르게 작품에 녹아 있어야 오랫동안 사람들이 관심을 두죠. 이중성이나 다중성이랄까요. 내 그림이 세필화라 사람들이 예쁘게만 보곤 하죠. 그래서 꽃만 찾는 건가? 모르겠네요. 예쁘게 그리려고 한 건 아닌데. 욕망이 지나쳐서 폭력이 되고 진흙탕 같은 곳에서 지상으로 뻗어 올라가는 무언가를 바닥에 다시 탁 내동댕이치는 그런 순간이 더 흥미롭지 않나요? 김원방 선생이 내 작품에 대해 아주 잘 얘기했어요. “허망하다!” 예쁘다 싶어서 봤는데, 허망한 느낌이라는 거죠. 좌절, 고통 같은 것도 보인다고요. 테크닉과 작품의 관계를 언어로 콕 집어 설명했더라고요. 내가 배웠죠. 비평가의 능력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직접 세필로 한 올 한 올 붓질을 할 때는 어떤 기분이세요?
좀 퇴폐적인 느낌이 들죠. 뭔가를 긁어낸다고 할까. 세필이 그런 감각이 세요. 작은 폭력일 수도 있죠. 세균들이 갉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고요.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나 생각할 때도 있는데, 몸에 오랫동안 밴 감각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범죄 같기도 하고.

“내 작품은 그냥 세밀화다. 보이는 게 다다.”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죠.
사실 여러 가지 해석의 길을 열어놓고 그림을 그리죠. 그런데 내가 “이건 이런 의미다”라고 미리 말해놓으면 재미가 없어요. 그림은 신비함 같은 게 있고,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없으면 매력이 없죠. 추상화도 장식적 구성이 아닌 이상 사람들에게서 뭔가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발견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켜야죠. 일종의 게임처럼. 그래도 내가 차별화되는 건 세필화밖에 없어요. 상투적인 서구식 회화하고도 다르고, 동양의 한지에 그린 그림하고도 다른 감각이 그 안에 있죠.

작품 제목이 ‘무제’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겠네요.
처음엔 제목을 붙였어요. 거울, 창문, 이렇게. 그런데 너무 뻔해서 없앴죠. 꽃 그림도 그래요. 거기에 ‘꽃’이라고 제목을 붙이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번 인터뷰 제목을 마음속에 정했습니다. ‘그냥, 세필화’라고요.
그거 이외에 내가 더 얘기할 수 있는 게 없네요. 해석은 보는 사람 눈에 달린 거죠. 그런데 오늘 내가 한 말이 다 맞진 않을 수도 있어요. 체험에서 나온 건 조직화가 안 되기 때문에 내 언어도 일관성이 없을 수 있잖아요. 감각적으로 튀어나온 거니까. 예전엔 작품에 대해 억지로 얘기한 것도 많아요. 전시가 열리면 꼭 그림 설명서 같은 걸 내라고 하니까, 제일 간단하게 써 보내는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죠. 근데 뭐, 그래도 상관없어요.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사진 권현정(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