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사랑한 것, 메건 헤스 Megan Hess
소설 <섹스 앤 더 시티>의 커버를 장식한 데 이어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을 선보인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메건 헤스. 특유의 독창적 시각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메건 헤스 아이코닉>전을 통해 그녀가 첫 아시아 투어의 여정을 시작한다.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며 패션과 예술을 접목한 작품을 선보이는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메건 헤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빌딩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다리. 도시의 풍경을 비추던 TV 속 장면은 이내 어느 여성의 얼굴로 바뀐다. 크게 부풀린 파마머리에 분홍빛 슬리브리스 톱, 새하얀 튀튀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다. 잠시 후 신호등을 확인하고 큰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찰나,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가 속도를 늦추지 않은 탓에 사방으로 흙탕물이 튀기고 만다. 당황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지만 사람들은 각자 제 갈 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이곳은 회색 도시 뉴욕. 그녀에게 위로를 건네는 건 지나가는 버스의 커다란 광고 포스터뿐. 사진 속 여유 넘치는 포즈로 누운 한 여성은 뉴욕 한가운데에 서 있는 주인공,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의 캐리 자신이다.

1 펜디의 캔 아이백을 콜라주 형식으로 그림과 결합한 메건 헤스의 작품.
2 메건 헤스가 자주 활용하는 블랙, 화이트, 골드 등의 컬러로 꾸민 호주의 작업실 테이블.
시그너처와 같은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오프닝의 <섹스 앤 더 시티>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무려 6년간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인기 드라마다. 배우 세라 제시카 파커가 완벽히 구현한 뉴욕 대표 여성 캐리를 접하기 전, 사람들은 원작인 동명 소설을 통해 저마다 그녀와 그녀의 세 친구를 어렴풋이 상상해보곤 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작가 캔디스 부슈널이 써 내려간 무수한 문장으로 책 속에 세밀히 묘사돼 있고, 이를 누구나 수긍할 법한 장면으로 다시금 눈앞에 펼쳐 보인 건 다름 아닌 메건 헤스의 삽화였다.
“뉴욕을 정말 사랑하거든요.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준 <섹스 앤 더 시티>의 배경인 매력적인 도시예요. 그곳에 가면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버그도프굿맨 백화점 7층의 예쁜 인테리어 소품을 둘러본 뒤, 5번가를 거닐며 가게들에 어떤 새로운 디자인의 물건이 들어왔는지 확인하곤 해요. 그다음에는 뉴욕 도서관에 잠깐 들르기도 하고, 길가에 쭉 늘어선 소규모 갤러리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시내 구경을 하죠. 소호의 레스토랑 ‘발타자르(Balthazar)’의 맛있는 저녁 메뉴는 꼭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예요. 뉴욕에 머무는 동안에는 복잡하면서도 자유로운 그 도시의 분위기를 만끽하려고 매번 24시간을 바삐 보내요.” 작가는 이런 메건 헤스의 뉴욕을 향한 남다른 애정을 진작 알아차렸다. 그리고 4명의 각기 다른 뉴욕 여성 이야기를 더욱 실감 나게 전하기 위해 특별한 시각이 담긴 그림으로 커버를 장식하고자 도움을 요청했다. 극 중 칼럼니스트로 등장하는 캐리의 글이 그러하듯 메건 헤스가 완성한 일러스트는 특유의 아이덴티티가 확실히 드러난다.

3 메건 헤스가 손꼽은 패션 아이콘과 브랜드의 드레스를 일러스트로 담아낸 서적 <더 드레스> 속 발렌티노의 레드 드레스.
4 도시를 상징하는 상점과 브랜드 등의 로고를 활용해 완성한 일러스트.
“말하자면 일러스트는 일상 속 탈출구와 같은 역할을 해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고, 동시에 무엇보다 편안한 자신만의 표현 도구가 되어주죠. 언제나 재미있는 순간으로 가득한 제 상상 속 세상을 직접 소개하는 일. 그림을 그릴 땐 그게 누구든, 어떤 장면이든 전부 실현 가능해요. 제 작품을 보는 사람들 또한 짧은 순간일지라도 이곳저곳 제가 만들어놓은 세상에 뛰어들어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주제, 특정 인물을 통해 그리는 메건 헤스의 세상은 매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 사람들에게 모험의 기회를 선물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자 표현 대상은 ‘패션’이다. “어떤 사물의 특징을 오래도록 관찰해 그려내야 하는 것이 저를 비로소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일련의 과정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어떤 작업은 아주 세심하고 정밀하게 디테일을 표현해야 하는 반면, 어떤 장면은 선을 좀 덜어내는 게 더 간결하고 멋스러워 보일 때가 있잖아요. 특히 패션 브랜드와 협업할 때는 그 브랜드의 특이점,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지점 등을 포착해 고스란히 그림에 드러내야 하죠. 그들의 오랜 역사와 뜻깊은 유산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유념해야 할 점은 저만의 방식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거예요.” 디올, 루이 비통, 티파니, 메르세데스-벤츠 등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을 비롯해 미셸 오바마의 초상화 작업을 맡은 것은 물론, 현재 재임 중인 호텔 외트커 컬렉션(Oetker Collection)의 아트 디렉터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흥미로운 결과물을 선보여온 메건 헤스에게도 누구보다 소중한 주인공 하나쯤은 있을 것. 그녀는 마치 그에 대한 헌정처럼 단 한 인물에 대해 다룬 자신의 책 이야기를 꺼낸다. “전 영원히 코코 샤넬을 사랑할 거예요. <코코 샤넬>이란 책 한 권을 오로지 그녀에 관한 그림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던 이유죠. ‘샤넬’이라는 브랜드는 패션을 통해 코코 샤넬이 나타내고자 한 근본적 비전을 잘 실현해주고 있어요. 이탈리아의 아이코닉 브랜드 중 하나인 펜디, 프라다도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들과 하나 되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은 언제나 놀랍고 특별한 경험이니까요. 전 세계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각 하우스 고유의 뛰어난 장인정신이에요. 영혼이 느껴지는 장인들의 섬세한 손길과 뚜렷한 철학에서 매번 참 많은 걸 배운답니다.”
오는 10월, 메건 헤스는 아시아 투어의 시작을 알리는 국내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서울숲 갤러리아포레에서 열리는 <메건 헤스 아이코닉>전에서 그간 출간한 총 6권의 도서를 모두 관람객에게 소개한다. <섹스 앤 더 시티> 속 4명의 주인공처럼 총 4가지 대표 컬러로 구성한 이번 전시에는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아티스트의 확신에 찬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세계 난소암 캠페인 활동, ‘LOVE’, ‘BRAVE’, ‘CONFIDENCE’라는 전시의 주요 키워드를 통해 그녀는 자신의 강인함과 자신감을 누구나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제가 그린 캐릭터들은 전부 당당하게 서 있죠. 연약하고 나약한 여성은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들을 위해 만든 패셔니스타 생쥐 캐릭터 클라리스조차 작은 몸집에 핑크 튈 드레스를 입은 깜찍한 외모인 반면, 용감한 자세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거든요. 이게 바로 어린 소녀들에게 전하고 싶은 저만의 분명한 메시지예요.”

5 10월 8일부터 내년 3월 8일까지 서울숲 갤러리아포레의 더 서울 라이티움 1관과 3관에서 열리는 <메건 헤스 아이코닉>전 포스터.
6 특유의 패셔너블한 시각으로 그려낸 뉴욕 센트럴 파크의 일상 풍경.

패션 일러스트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파리를 소개한 서적 <파리>에서 메건 헤스가 제안한 상황별 스타일.
메건 헤스의 작품은 주로 세련된 블랙 컬러로 이루어져 있다. 동시에 그녀는 패션 일러스트 특유의 화려한 분위기를 강조하려 화이트, 골드와 같은 우아한 분위기의 컬러 또한 자주 활용한다. 직접 꾸민 작업실 곳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런 몇 가지 색상은 내포한 깊은 의미와는 달리, 사뭇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아시아, 특히 한국에는 멋진 아티스트가 굉장히 많다고 생각해요. 다채롭고 강렬한 색채와 인상적인 형태가 작가의 신념을 대변하는 것 같거든요. 아시안 예술 문화의 자유분방한 미디어 활용, 관람객이 교류하며 즐길 수 있도록 흥미를 유도하는 고유의 표현 방식 등 색다른 시도도 매우 독특해요. 유럽의 아티스트들이 지향하는 낭만주의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잖아요.”
호기심 많은 소녀, 패션을 사랑하는 현대 여성. 그 두 이면을 모두 지닌 아티스트 메건 헤스에게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게 해줄 예술적 요소는 도시를 온통 둘러싸고 있다. 뉴욕, 파리를 거쳐 이제 아시아에까지 첫발을 내딛는 그녀의 상상은 더할 나위 없는 설렘과 즐거움으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처음 뉴욕에 도착했을 때, 노란 택시가 경적을 울리던 그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요. 시크한 분위기의 업타운 지역 여성들과 쿨한 애티튜드의 다운타운 지역 여성들을 마주한 순간도요. 다양성을 갖춘 뉴욕의 모습을 사랑하듯 여러 도시의 열정적인 분위기를 직접 느끼며 상징적인 장면을 저만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인물, 브랜드, 사물 등 무엇이든 마찬가지일 테죠.”
메건 헤스
호주에서 태어나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2008년 캔디 스부슈널의 소설 <섹스 앤 더 시티> 속 일러스트 작업을 계기로 <타임>, <베니티 페어> 등의 잡지에 그림을 싣게 되었고, 이후 까르띠에, 샤넬, 디올 같은 패션 & 주얼리 브랜드와 협업하며 뉴욕 버그도프굿맨을 비롯한 백화점의 쇼윈도를 장식했다. 전 미국 영부인 미셸 오바마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현재 외트커 컬렉션 호텔의 아트 디렉터로 재임 중이며 웹사이트 www.meganhess.com에서는 자신의 그림을 프린트한 스카프와 쿠션 등 다양한 아이템을 판매 하고 있다.
에디터 박소현(angelapark@noblesse.com)
사진 제공 J&John, Megan 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