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아티스트인가, 영화감독인가
<잠수종과 나비>의 줄리언 슈나벨, <노예 12년>의 스티브 매퀸, 데이비드 린치, 박찬경 등은 아티스트로 명성을 얻어 영화감독으로 전향한 이들이다. 아티스트와 영화감독, 두 마리 토끼를 좇는 그들의 성공 혹은 실패.
왼쪽부터_ 박찬경, 줄리언 슈나벨, 데이비드 린치, 스티브 매퀸
“<만신>은 보는 영화가 아니다.” <만신>을 연출한 박찬경 감독이 한 말이다. <만신>은 영화다. 그런데 박찬경 감독은 영화를 보지 말라고 말한다. “<만신>은 체험하는 영화다.” 박찬경 감독은 관객이 <만신>을 통해 굿을 체험하길 바랐다. <만신>은 만신 김금화에 관한 영화다. 만신은 무속에서 큰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김금화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를 다룬다. 영화로 인물의 일생을 다루는 교과서적 접근법은 일대기다. 그래서 영화의 뿌리는 신화까지 올라간다. 박찬경 감독도 얼마든지 <만신>을 신화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연대기적 구성이 진부하다면 서사 구조를 잘 쪼개 추리소설처럼 만들 수도 있었다. <만신>은 무당 얘기다. 그 때문에 원혼이 나오는 사건 하나쯤 중심에 두면 얼마든지 극적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박찬경 감독은 오히려 <만신>의 서사 구조를 파괴한다. 영화에는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고 갑자기 임경업 장군이 나타나 활을 쏜다. 문소리가 극 중에서 굿을 하는데 김금화가 다큐멘터리처럼 등장한다. 어떤 장면은 그림 같고 어떤 장면은 사진 같고 어떤 장면은 꿈같다. 이쯤 되면 영화인지 미디어 아트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박찬경 감독은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아티스트다. <만신>은 박찬경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만신>은 미디어 아티스트 출신 영화감독다운 실험정신으로 넘쳐난다. 미술의 목적은 체험이다. 과거부터 미술은 체험을 확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문법을 파괴해왔다. 시각에서 영상으로, 청각을 넘어 다시 촉각과 후각까지 감각을 확장시켰다. 미디어 아트는 이런 문법 파괴의 첨단에 있다. 회화와 사진과 영상을 통해 관람객이 대상의 본질을 체험하게 한다.
박찬경 감독은 상업 장편영화 <만신>에도 미디어 아티스트답게 문법 파괴를 그대로 적용한다. 서사 구조를 파괴하고 시각 체험을 확장해 관객의 체험을 극대화한다. 그에게 중요한 건 이야기가 아니라 체험 그 자체다. 극장에 앉은 관객은 <만신>을 보며 굿판의 구경꾼이 된다. 박찬경 감독은 체험을 위해 영화를 해체해버린다. 그 덕분에 <만신>은 한 편의 완성도 높은 예술 작품이 됐다. 성공적 상업 영화는 되지 못했다.
영화적 문법의 본질은 한마디다. 영상은 서사를 위해 복무한다. 관객은 이야기를 원한다. 영상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영상을 만드는 영화감독에게 이건 족쇄와 같다. 이야기꾼이 되려고 했으면 감독 대신 소설가나 래퍼가 됐다. 박찬경 감독의 형 박찬욱 감독은 이런 영화적 문법의 경계를 슬쩍슬쩍 넘나든다.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은 그렇게 탄생했다. 넘어가진 않는다. 관객이 외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찬경 감독은 넘어가버린다.
영화는 영상과 서사가 결합한 예술이다. 영화는 한편으로 서사적이지만 늘 새로운 영상미를 욕망한다. 박찬경 감독 같은 아티스트 출신 영화감독이 꾸준히 등장하는 배경이다. 서사 구조에 짓눌린 기존 영화감독은 불가능한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린치, 안톤 코르베인, 줄리언 슈나벨, 샐리 포터, 데릭 저먼이 그런 감독이다. CF를 영화와는 다른 미디어 아트의 한 범주로 보면 리들리 스콧도 있다. 최근엔 <노예 12년>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스티브 매퀸이 있다.
그런데 영화감독으로서 이들의 성패를 가르는 건 예술적 재능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영상과 서사의 균형이다. 아티스트 출신 영화감독은 태생적으로 영화적 문법을 해체해야 한다. 해체해주길 원해 제작자가 돈을 댔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도 과거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영화를 재해석하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문제는 해체한 이후다. 다시 조립해야 한다. 영화 속에서 영상과 서사의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한다.
데이비드 린치는 해체와 재조립에 성공한 드문 경우다. 데이비드 린치는 원래 미술 학도였다. <이레이저 헤드>라는 실험 영화를 만들어 충격적인 영상미로 영화계에서 먼저 각광받았다. <엘리펀트 맨>으로 인정받은 데이비드 린치는 <사구>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도전했다. <사구>는 재앙이었다. 영상에 대한 야심이 서사를 사구 속으로 처넣었다. 이때 데이비드 린치는 아티스트로서 영상에 대한 야심을 제어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영화 문법을 파괴하면서도 영화 문법을 지키는 역설적 연출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 결과가 <트윈픽스>였다. 데이비드 린치는 <로스트 하이웨이>와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서사 구조를 해체했다가 영상을 통해 재조립하는 절묘한 연출력을 선보였다. 이제 데이비드 린치는 영화를 떠나 아트로 돌아갔다. 2012년엔 뉴욕의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영상에서 서사로, 다시 서사에서 이미지로 움직인 셈이다.
반면에 데이비드 살리는 실패 사례다. 데이비드 살리는 줄리언 슈나벨과 함께 뉴욕 예술계의 최고 스타였다. 그러다 1995년 <워킹맨>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워킹맨>에는 크리스토퍼 워컨과 이선 호크와 데니스 호퍼가 출연했다. 스타 예술가 감독에게 어울리는 스타 캐스팅이었다. <워킹맨>은 졸작이었다. 영상과 서사가 따로 놀았다. 이렇다 할 영상미도 없었다. 데이비드 살리는 영화의 서사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수습하느라 영상을 챙길 정신조차 없었다. 또 다른 유형의 실패 사례도 있다. <코드명 J>를 찍은 로버트 롱고다. 그는 ‘도시인’ 연작으로 유명한 포스트모던 화가다. 로버트 롱고는 절친한 친구인 SF 작가 윌리엄 깁슨과 함께 <코드명 J>를 기획했다. <코드명 J>는 기획 단계엔 그의 미래형 이미지가 가득한 영화였다. 역시 영상과 서사의 균형이 문제였다. 그는 영상을 재창조하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서사에 집중하라는 제작자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반면에 줄리언 슈나벨은 영상과 서사 실험에서 오히려 타협한 경우다. 1980년대 특유의 무대 매너로 각광받은 스타 화가 줄리언 슈나벨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침체기를 겪었다. 그 후 영화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바스키아>로 연출력을 인정받고, <잠수종과 나비 J>와 <비포 나잇 폴스>로 칸과 베니스를 석권했다. 그의 영화는 실험적이진 않다. 그가 화가 출신이라는 배경을 모르고 보면 잘 연출한 상업 영화다.
<노예 12년>으로 아카데미상을 거머쥐며 주목받고 있는 스티브 매퀸은 줄리언 슈나벨과 데이비드 린치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 스티브 매퀸은 이미 영국 예술계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터너상을 수상한 순수 예술 작가다. 그는 지금껏 3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헝거>와 <셰임>과 <노예 12년>이다. 그는 영상 때문에 서사를 붕괴시키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는다. 상업 영화답게 영상은 서사를 위해 복무한다. 그런데 스티브 매퀸의 영화는 서사가 영상적이다. <헝거>는 식욕을 다룬다. <셰임>은 성욕이다. <노예 12년>은 자유다. 스티브 매퀸은 본능적 욕구가 거세됐을 때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세밀화로 보여준다. 붕괴돼가는 인간의 내면을 영상과 서사로 담아낸다. 관객은 식욕과 성욕과 자유의 결핍을 예술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순수 예술과 상업 영화를 오가는 스티브 매퀸의 재능은 여기에서 드러난다.
어차피 영화는 탐욕스러울 정도로 새로운 영상을 추구한다. 아티스트 출신 영화감독의 계보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라는 얘기다. 순수 미술은 체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꺼이 문법을 해체한다. 영화는 오직 시각과 청각만으로 관객의 체험을 유도해야 한다. 이 간극에서 아티스트 출신 감독은 재능과 감각을 시험받는다. 영화는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서사적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다. 자신을 시각적으로 재해석해줄 새로운 아버지를 원한다. 그렇다고 영화적 문법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영화의 이중성이다. 해체되길 욕망하지만 붕괴되고 싶진 않다. 아티스트 출신 영화감독의 운명은 그 경계에 있다. 해체할 것인가, 해체될 것인가? 해체한 후엔 영화적 문법에 맞게 어떻게 재조립할 것인가? 만신에게 물어봐도 만 가지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예술적 영화의 영원한 숙제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신기주(저널리스트) 일러스트 장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