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열공’ 중
오피니언 리더들이 갈수록 문화 예술 강좌에 빠져들고 있다. 소설 커뮤니티 형성에도, 기업의 문화 예술 경영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몇몇 사설 아카데미의 문화 예술 강좌를 살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오피니언 리더들을 위해 개설한 ‘세종 클래시카 오페라와 발레’
에이트인스티튜트의 CEO 심화 과정 미술클래스 ‘신예’
“지인의 추천으로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하나의 유파가 생겨 트렌드를 형성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유파가 생성돼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비교하는 게 흥미로웠죠. 이런(예술) 사조에 대해 알고 토론하는 건 회사의 경쟁력 향상에도 분명 도움이 됩니다.” 토종 건전지 제조업체 벡셀 박훈진 대표의 말이다. 그는 미술 전문 컨설팅 기업 이안아트컨설팅의 정규 미술사 수업에 참여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와 함께 클래스를 듣는 이들은 이명순웨딩드레스의 이명순 대표, 이씨 자이크의 이정순 대표 등 주로 토대가 탄탄한 중소기업 CEO. 이들은 그간 국내의 여러 사설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지금같이 차별화된 수업과 수강생간의 활발한 커뮤니티가 가능한 적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CEO를 대상으로 하는 사설 아카데미의 문화 예술 강좌가 늘고 있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건 단연 미술 강좌다. 이러한 미술 강좌는 수년 전 우후죽순 생겨난 강좌와 달리, 이론 중심의 학습에서 벗어나 다양한 실습과 체험으로 이어지는 게 특징으로 수강료가 꽤 고가임에도 지원자가 몰린다. CEO나 자산가에게 미술품 수집이 갈수록 인기를 끌며 좀 더 고차원의 심미안을 기르기 위한 수업이 주목받는 것이다. 이 같은 미술 교육 강좌는 대부분 인맥 형성의 루트가 되기도 한다. 수업이 끝난 후엔 자연스레 커뮤니티를 꾸려 결속을 다진다. 한 미술 아카데미의 큐레이터는 “수업에 참여한 CEO들끼리 알아서 커뮤니티를 만들고, 직접 작가나 큐레이터를 초빙해 강의도 듣고, 국내외 미술관 탐방, 아트 페어 참관 등 미술 기행을 가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국내 최초의 민간 미술 교육기관 에이트인스티튜트도 진작부터 CEO 심화 과정 미술 클래스를 개설해 운영해오고 있다. 올해로 9기째에 접어든 이들의 ‘신예(新藝)’는 국내 대기업, 중소기업 CEO와 임원진, 미술 애호가를 대상으로 한다. 이 강좌는 미술을 비롯해 총체적인 인문학적 소양을 갖출 수 있는 24강 수업을 1년 과정으로 진행하는데, 오는 10월에 열리는 런던 프리즈 아트 페어 참관, 상하이 미술관 투어 등 글로벌 아트 마켓을 직접 돌아보는 아트 투어도 참여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
이안아트컨설팅의 프리미엄 아트 투어. 지난 3월 프라이빗 멤버와 함께 아트 바젤 홍콩에 다녀왔다.
세종르네상스CEO합창단은 합창단 수업이 자연스레 아마추어 합창단 창설로 발전한 케이스다. 이들은 1년에 한 번 세종문화회관에서 정기 공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그간 국내의 미술품 경매 시장을 주도해온 서울옥션도 새로운 강좌를 열었다. 이들은 현재 사진과 건축 등의 인문학에 포커스를 맞춘 수업을 개설해 진행하고 있다. ‘창조적 사고를 위한 10가지 비밀’이란 주제로 지난 5월 7일 시작한 이들의 ‘문화예찬’은 사진과 건축미학을 중심으로 두 달간 진행하는데, 배병우와 이명호 작가가 직접 자신의 카메라와 작품, 장비를 들고 나와 강의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김봉렬 교수는 ‘비움의 건축, 마음의 풍경’을 주제로 한국 건축미의 특징을 들려준다. 서울옥션의 정지영 담당은 “수업 자체가 심화 과정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일반인보다는 오랫동안 사진과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기업의 오너나 예술 애호가가 몰렸다”며 최근 일고 있는 CEO들의 문화 강좌 ‘열공’ 현상을 실감하게 했다.
국내의 CEO나 자산가들이 본격적으로 사설 아카데미 수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대략 2012년부터다. 이들은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서 제품을 개발하고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고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의 말을 듣고, 부랴부랴 인문학을 비롯한 각종 예술 강좌 수업을 찾기 시작했다. 이들이 그간 듣고 배운 예술 강좌의 중심엔 늘 사람과 역사가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고 사람이 사회에 적응해온 과거의 흔적을 공부하는 게 이러한 문화 예술 강좌의 핵심이다.
이 같은 문화 예술 강좌의 열풍에 힘입어 한쪽에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클래식이나 합창단 수업이 생겨나기도 했다. 더 이상 미술관에서 얌전히 작품만 감상하며 공부하긴 싫다는 얘기다. 세종문화회관 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세종 클래시카 오페라와 발레’는 오케스트라와 발레, 서양 음악사와 오페라 등 클래식 전반에 걸쳐 리더라면 꼭 알아야 하는 클래식 교양을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총 15회의 강의 중 첼리스트 이강호의 음악 이야기와 함께 연주를 눈앞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살롱 음악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세계적 피아니스트 윤디 리의 공연을 프리뷰 강의와 함께 만날 수 있다.
한편 수년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오피니언 리더를 대상으로 한 합창단 수업에 참여한 법무법인 지평의 임성택 파트너 변호사는 1년 과정 수업을 마치는 마지막 날 아예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세종르네상스CEO합창단’을 결성해 1년에 한 번 정기 공연까지 하고 있다. 그는 “합창을 통해 조화와 배려가 중요하다는걸 알게 되었고, 합창단원과의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업무에도 경청과 소통, 배려와 하모니가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다”며 문화 예술 아카데미의 교육 효과를 진지하게 전했다. 그뿐 아니라 현재 세종르네상스CEO합창단에 소속된 각 기업의 CEO나 오피니언 리더들은 합창단 경험을 살려 회사에서 합창단을 조직하거나, 노래 모임을 만들고, 심지어 사옥에 공연장을 만든 이도 있다고 한다.
갈수록 회사의 주력 분야 전문 지식 못지않게 문화, 예술 분야의 소양을 쌓으려는 경영인이 늘고 있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지면서 사람을 아우르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CEO들에게 인간을 이해하고 지혜를 습득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해진 거라고 볼 수 있다. 이제 금전적 가치뿐 아니라 정신적 만족을 동시에 아우르는 수단이 예술이라는 사실을 이전보다 많은 CEO나 기업의 결정권자들이 터득하고 있다. 자본이 세상을 지배하는 오늘날, 기업의 CEO들이 다양한 예술 강좌를 들으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써 접근하고 활용한다면 분명 지금보다 창조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수준 높은 각종 예술 아카데미의 수업을 통해, 앞으로 예술 경영에 힘쓰는 기업인이 더욱 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