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걷는 미래
한국의 ‘빌리 엘리엇’으로 주목받으며 성장해온 발레리노와 선입견에 맞서 클래식 아코디언의 매력을 널리 알리는 아코디어니스트, 하루 이틀 된 신선한 고기만 판매하는 축산 유통 스타트업 대표. 용기 있는 선택으로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3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발레리노,
임선우
어떤 이에겐 임선우란 이름 석 자보다 ‘선우 빌리’라는 애칭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7년 전, 큰 인기를 모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탄광촌의 가난한 소년 빌리의 모습을 훌륭하게 소화한 그는 이 작품으로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신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뮤지컬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있다. 꾸준히 발레리노의 꿈을 키워온 그가 지난 2월, 2017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서 만 17세의 나이로 최종 수상자 8인에 포함된 것. 15~18세를 대상으로 하는 이 대회는 바르나 국제 발레 콩쿠르, 미국 잭슨 국제 발레 콩쿠르 등과 함께 세계 5대 발레 콩쿠르로 꼽힌다. 스타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그는 현재 발레계가 주목하는 차세대 유망주다.
그가 발레에 입문한 건 여섯 살 무렵 동네 문화센터에서였다. 처음엔 자세 교정이 목적이었지만, 곧 흥미를 느껴 본격적인 무용의 길로 들어섰다. 어려서부터 감정 표현이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2008년 서울발레콩쿠르 초등부 클래식 부문 은상, 2010년과 2011년 2년 연속으로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자유 경쟁 부문 금메달을 차지하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2013년 서울 국제발레콩쿠르 대상, 2016년 동아국제무용콩쿠르 발레 고등부 금상을 수상한 그는 얼마 전 2017 스위스 로잔 콩쿠르로 방점을 찍었다.
로잔 콩쿠르의 최종 수상자 8인에겐 1년 동안 해외 유수의 발레단에서 연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는 한국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우선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국내 발레단에 입단해 더 역량을 쌓은 뒤 해외로 나갈 계획입니다.” 그가 최종 목표로 삼은 발레단은 34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 이곳의 수석 무용수 마티외 가니오(Mathieu Ganio)는 임선우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그의 영상을 수백 번 봤어요. 특히 동작과 동작 사이의 연결이 매끄러워서,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연기에 몰입할 수 있죠. 저도 그처럼 관객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발레리노가 되고 싶습니다.”
선화예술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그는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를 연습한다. 발레곡을 직접 연주하면 발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나중엔 안무가의 길을 걷고 싶어서다. 학교에서 안무를 짜는 수업을 들었는데, 자신이 만든 동작이 음악과 잘 맞아떨어지는 게 좋았다고 말한다. “우선 최고의 발레리노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죠. 그리고 언젠가 제가 만든 안무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발레리노 임선우는 미래를 차근차근 설계하며 성장해가는 중이다.

섬세한 감정을 전하는 아코디어니스트,
전유정
아코디어니스트 전유정은 올해 아코디언을 연주한 지 꼬박 10년이 되었다. 2007년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클래식 음악 공부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러시아 국립영재음악원, 우파 국립음대를 거쳐 올해 그네신 국립음대 석사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콩쿠르 필모그래피도 화려하게 채웠다. 클래식 아코디언을 배운 지 11개월 만에 2008년 이탈리아 란차노 국제 아코디언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국제 무대에 데뷔한 후, 같은 해에 쿠레프레바 콩쿠르 우승, 2010년 클라바 콩쿠르, 2011년 발티도네 콩쿠르에서 잇따라 우승을 거뒀다. 해외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존재감을 드러낸 그녀는 작년부터 국내에서도 연주회를 통해 얼굴을 알리고 있다. 2016년 금호 영아티스트 콘서트, 대학로 하우스 콘서트에 이어 올해 2월 금호아트홀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그녀가 처음 아코디언을 접한 계기는 2006년 그녀가 중학교 3학년 시절 아마추어 요들 앙상블 팀에 속한 아버지의 스카우트 제안이었다. 노래에 아코디언 화음을 넣고 싶어 피아노 연주 경험이 있는 전유정을 팀의 아코디언 연주자로 영입한 것. 그녀는 처음 연주하는 악기임에도 자신의 악기임을 운명적으로 느꼈고, 연주하면 할수록 그 마음은 강해졌다. “아코디언을 배우기 전 기타, 플루트, 피아노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지만 제 마음을 사로잡진 못했어요. 그런데 아코디언은 달랐어요. 답답함, 분노, 기쁨 등 제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비로소 내면의 자유를 얻은 기분이 들었어요. 사람들한테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도 아코디언을 통해 말할 수 있어서 홀가분했죠.”
아코디언은 연주자가 몸에 완전히 밀착시켜 연주해야 하는 악기다. 같은 레퍼토리라도 연주자의 마음과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따라 선율이 미세하게 달라지고, 그만큼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크다.
지난 2월 금호아트홀 공연 레퍼토리를 선정할 때도 클래식 아코디언의 다채로운 매력을 알리는 데에 주안점을 뒀다. “아직은 클래식 아코디언을 낯설게 여기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를 통해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건반을 위한 파르티타 제2번 C단조’를 아코디언 솔로로 선보임으로써 다양한 음색을 자아낼 수 있는 클래식 아코디언의 매력을 전하고 싶었죠. 리샤르 갈리아노의 ‘조스를 위한 노래’를 통해서는 피아노와 첼로뿐 아니라 퍼커션과 어우러져도 좋은 앙상블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리고 싶었어요.” 인터뷰를 마칠 즈음 누구 못지않은 화려한 이력을 쌓아온 그녀에게도 고민이 있을지 궁금했다. “아코디언이 클래식용으로 개량된 지 7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아코디언은 요들송이나 트로트 같은 대중가요를 위한 악기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아요. 국내에는 제가 설 자리가 없는 것 같아 허무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몇 년간 슬럼프도 겪었죠. 하지만 그런 시선에 좌절하기보다 연주를 통해 증명해 보임으로써 당당하게 헤쳐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적이 드문 길엔 무성한 가시덤불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덤불을 헤치며 그 길을 꾸준히 걷는다면 아코디어니스트 전유정의 이름이 우리의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될 날이 곧 오지 않을까.

돼지고기를 파는 수학도,
정육각 대표 김재연
정육각은 온라인으로 돼지고기를 판매하는 육가공품 유통 스타트업이다. 이곳의 대표 김재연은 도축한 지 1~4일 된 신선한 고기를 곧바로 소비자에게 전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 축산업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알고 보면 그는 한국과학영재학교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응용수학을 전공한 수학 영재다. 그럼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 축산업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그가 돼지고기에 푹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김재연 대표는 어지간한 돼지고기 맛집은 거의 가봤을 정도로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어릴 적 시골 친척집에서 먹던 돼지고기만은 못하다고 느꼈다. 막연히 의문을 품고 있던 그는 어느날 우연히 돼지고기의 도축 날짜를 보고 유통기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평소 먹는 돼지고기의 평균 유통 기간은 20일 정도예요. 반면 친척집에서 먹던 고기는 갓 도축한 거였죠.”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고 싶어 직접 도축장에 찾아간 그는 최소 판매 단위인 50인분을 구입해 주변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이 고기를 맛본 사람들의 호평이 이어지자, 그는 신선한 고기만이 낼 수 있는 맛의 차이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갓 도축한 돼지고기를 판매하겠다는 그의 아이디어를 들은 축산업계 관계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으로 고기는 여러 유통 단계를 거치면서 가격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유통업자는 고기가 오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로 이익을 내죠. 더군다나 수익을 많이 낼 수 있는 건 소고기예요. 돼지고기의 소량 판매로는 사업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그러나 김재연 대표는 이 유통 단계를 생략하고 직접 소비자와 연결할 수 있다면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육각은 고객이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농장에서 떼온 갓 도축한 돼지고기를 자체 작업장에서 먹기 좋은 크기로 손질, 포장해 발송한다. 이 모든 과정이 하루 만에 끝나기 때문에 고객은 다음 날이면 냉장 포장된 고기를 받을 수 있다. 질 좋은 고기를 이처럼 빨리 전달하면서도 가격은 마트와 비슷하다. 합리적인 가격에 신선한 돼지고기를 공급하는 정육각의 전략은 건강한 먹거리를 찾는 소비자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판매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길 만큼 시장 반응이 좋았고, 7개월 만에 투자 유치에 성공해 자동화 공장 설비도 확충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정육각은 4월 1일부터 신선한 닭고기와 달걀 판매도 시작한다. 또 6월엔 서울 강남에 정육각이 직접 운영하는 정육 식당을 오픈할 계획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해가는 김재연 대표는 신선한 고기만 판매하겠다는 정육각의 소신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식품관에 위탁 판매를 해보겠냐는 제안도 받았어요. 하지만 팔릴 때까지 고기를 가지고 있으면 재고가 되죠. 이건 제 원칙에 위배됩니다. 단순히 수익만을 좇기보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우선으로 회사를 키워가고 싶어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가치의 시장을 창출한 김재연 대표, 그의 바람대로 더 많은 가정집에 신선한 고기가 전해지길 바란다.
에디터 최윤정(amych@noblesse.com), 황제웅(hjw1070@noblesse.com)
사진 박용빈 헤어 구예영(고원) 메이크업 안희정(고원) 소품 협찬 스와로브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