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은행입니다
자산 관리는 물론 문화생활까지 총망라한 요즘 은행 이야기.

1 진달래&박우혁의 미디어 작품 ‘Skin & Cell’을 외벽에 설치한 KEB하나은행 플레이스 원 빌딩.
2 현대미술품을 비롯한 수천 권의 책을 보유한 클럽원 내부.
경제 기사를 보면 ‘PB’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이젠 하도 널리 쓰여 이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는다. PB란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의 약자로, 거액의 자산을 가진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맞춤형 자산 관리 서비스를 뜻한다. 이는 금융은 물론 세무와 부동산, 법률 등 비금융 업무에 대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 서비스는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다 1977년 미국 씨티은행이 ‘PB’라는 용어를 처음 쓰며 굳어졌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 PB 서비스를 도입했다. 강남이 발전하며 국내 부동산 부자들의 돈을 관리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PB 서비스 프로세스를 들여온 것. 초기엔 VVIP를 위한 맞춤형 자산관리에만 집중했지만, 최근엔 고액 연봉자와 젊은 부자의 증가로 문화 아지트 역할까지 책임지고 있다.
대표적 공간이 서울 삼성역 인근에 자리한 KEB하나은행의 ‘클럽원(Club 1)’ PB센터다. 2017년 여름에 문을 연 KEB하나은행의 플레이스 원(Place 1) 내에 자리한 이곳은 금융자산 30억 원 이상의 VIP를 대상으로 금융 업무는 물론 문화생활까지 즐길 수 있게 했다. 그랜드피아노 브랜드로만 알려진 스타인웨이 앤드선스가 공간에 맞게 특별히 스피커를 제작했고, 수천 장의 CD와 고가의 스크린, 미팅 룸, 도서관 등을 갖췄다. 또 주요 고객이 거액의 자산가, 벤처기업가, 연예인 등이라는 점을 고려해 그들이 읽을 만한 분야의 원서나 아트 북 등을 갖춰놓았다. 눈길을 끄는 건 전 세계에 몇 점 없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조형 작품이자 대형 아트 북 < A Bigger Book-The David Hockney Sumo >를 구비해놓은 것.
이게 끝이 아니다. 현대미술 작품도 갤러리 수준으로 전시되어 있다. 사진으로 프린트한 자작나무 판을 매달아놓은 권오상의 ‘모빌2’나 최성임 작가의 ‘더 홀로 트리’, 박윤경 작가의 ‘하이퍼네이처’ 등이 적재적소에 설치되어 있다. 심지어 이 모든 걸 아트 디렉팅한 인물 또한 현대미술 작가 김기라. 그건 그렇고, 이렇게 상품 권유가 아닌 ‘여기서 좀 즐기다 가세요’라는 생각은 얼마나 영업으로 연결되었을까? 클럽원은 개점 1년 만에 자산이 4조5000억 원에서 6조 원으로 증가했다. 지금도 빠른 속도로 예치금을 늘려가고 있다고. KEB하나은행 홍보 팀 전병재 과장은 이곳은 “은행 하면 보통 폐쇄적 공간을 떠올리는데 그런 한계에서 벗어나 꼭 가보고 싶은 공간으로, 문화 코드가 잘 접목된 친숙한 장소로 자리 잡을 수 있게 설계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소개했다.

3 한국씨티은행 분당센터에 자리한 더 웨이브 테라스.
4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Abstraktes Bild(Faust)’를 설치한 도이치뱅크 뉴욕.
5 딩이의 설치 작품으로 꾸민 지난해 아트 바젤 홍콩의 UBS은행 라운지.
한국씨티은행 분당센터 내에도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의 VVIP고객만 이용 가능한 공간이 있다. 지난해 8월 개점한 이들의 ‘자산 관리 센터(Wealth Management, WM)’는 호주의 인테리어 기업 홀라 프로젝트(Hola Projects)가 ‘우주’를 컨셉으로 내부 디자인을 맡았다.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이탈리아산 조명과 가구를 곳곳에 배치했으며, 국내외 현대미술 작가의 페인팅과 조각 작품을 설치했다. 작품과 가구 등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 노르웨이산 테이블을 기다리는 데에만 16주나 걸렸다고. 또 야외엔 홍콩의 건축 회사 디아뎀(Diadem)이 설계한 옥상 카페 ‘더 웨이브 테라스’가 자리하는데, 보이는 대부분의 인테리어를 최고급 편백으로 마감해 리조트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씨티은행 황유식 분당센터장은 “하드웨어적으로 차별화된 고급화에 소프트웨어적 선진 금융 시스템을 접목해 고객이 업무를 본 뒤 편안히 쉬다 갈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은 벌써 15년 가까이 PB센터 ‘골드앤와이즈라운지’를 통해 현대미술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전국 20여 곳에 자리한 이들의 PB센터는 ‘갤러리뱅크’라는 이름으로 국내의 신진 작가와 중견 작가의 작품 수백 점을 1년 단위로 전시한다. 특정 PB센터 한 곳에 콘텐츠를 집중하기보다는 여러 점포로 그것을 분산하고 아트 강좌와 작품 구입 자문까지 수행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은행은 여전히 ‘PB’라는 본래 속성에 맞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서비스를 추구한다. 우리은행은 10억 원 이상 금융자산을 보유한 소수 고객을 대상으로 서울 소공로 본점 23층에 자리한 ‘투체어센터’에서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 독특한 건, 이곳이 원래 우리금융지주의 회장실이 있던 자리라는 것. 2014년 잠시 지주 체제를 접으며 600㎡의 공간(약 180평)을 PB센터로 꾸몄는데, 현재 시점에서 따져보면 바로 아래층에 행장실이 있으니 ‘행장보다 더 높은 고객’이라는 컨셉인 셈. 우리은행 홍보 팀 조항래 부부장은 “VVIP 고객 상당수가 노출을 싫어해 가능한 한 동선을 읽히지 않는 것에 특별히 신경 썼다”고 말했다. 신한은행 또한 금융자산 50억 원 이상을 보유한 고객을 대상으로 ‘PWM프리빌리지센터’를 운영하지만, 여타 은행과 달리 밖으로 드러나는 서비스보다 내실 다지기에 더 집중하는 모양새다.
한데 취재를 진행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시중은행이 경영 악화로 시내 점포 줄이기에 나섰다는 뉴스를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왜 특수 영업 점포인 PB센터는 더 늘리거나 규모를 키우고 고급화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 말이다. 실제로 지난 1년 동안 시중은행은 114개의 점포를 통폐합했다. 하지만 남은 점포는 자산 관리 센터로 용도를 바꾸거나 고급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대체 왜? 아트 컨설턴트 이주현은 이를 ‘VVIP의 시간 빼앗기’라고 진단했다. 최근 점포가 없는 인터넷은행의 흥행에 자극받은 기존 은행이 자산 관리 부분을 새 성장 동력으로 삼기 위해 그들이 쉽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문화 콘텐츠로 포석을 다진다는 것.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멀리 갈 것도 없이 가까운 데서 찾을 수 있다. 6만여 점의 현대미술 작품을 전 세계 9000여 개 지점에 전시하는 독일의 도이치뱅크(서울과 부산에 지점이 있다)가 그렇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런던의 테이트 모던 등에서 수많은 전시를 후원한 미국의 금융 기업 JP 모건 체이스앤컴퍼니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이 같은 해외 은행은 문화 콘텐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은행을 벗어나 아트 페어를 직접 후원하는 것도 일상적이다. ‘아트 바젤’ 시리즈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후원하는 기업이 스위스의 UBS은행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은행을 금융 업무만 보는 곳이 아닌 문화생활까지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금융 업무만 보는 ‘공간(space)’에서 벗어나 주요 고객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장소(place)’로 만든다는 이 계획은 당연히 문화 산업은 물론 금융을 더 살찌우는 일이기도 하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