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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이끈 길엔

LIFESTYLE

마냥 그림이 좋아 갤러리를 드나들던 한 미술 애호가가 어느덧 ‘큰손’ 컬렉터가 됐고,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갤러리의 대표가 됐다. 그림에 대한 사랑이 이끈 길이다.

베르나르 오베르탱 작품 앞에 선 안혜령 대표

리안갤러리의 안혜령 대표를 만난 날은 개관 10주년 기념전이 막을 내린 바로 다음 날이었다. 서울과 대구의 2개 갤러리를 각기 다른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며 매주 두 도시를 오가는 그녀는 수많은 관람객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들었다며 활짝 웃었다. 지난 10년을 점검하고 평가받는 자리로 리안갤러리 대구에 마련한 10주년 기념전에선 지금까지 전시한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였고, 안혜령 대표의 소장품도 공개했다. 리안갤러리에서 전시한 작가 중에는 2015년 세계 최대 미술 전문 사이트 아트시(Artsy)가 ‘최고의 생존 작가 10인’으로 선정한 데이미언 허스트, 앨릭스 카츠,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도 있다.
사실 리안갤러리는 시작부터 화려했다. 앤디 워홀 추모 20주기 전시가 바로 개관 기념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당시 의도치 않게 갤러리를 열게 됐다고 한다. “컬렉터 경력은 올해 34년째예요. 그림을 10년쯤 수집했을 때 주위에서 화랑을 해보는 게 어떠냐는 조언을 많이 하더군요. 터를 알아보면서 준비하라고요. 20년쯤 됐을 땐 더했죠. 하지만 너무 어려운 길이라는 걸 알기에 선뜻 마음먹지 못했는데, 2005년 대구 시공갤러리 대표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갤러리가 문을 닫게 됐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피악(FIAC)에 네 번이나 참가했을 만큼 규모와 영향력을 갖춘, 꼭 필요한 갤러리였는데 폐관한다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죠.” 그렇게 절반은 아쉬운 마음에, 절반은 의무감에 시공갤러리를 인수했고, 2007년 리안갤러리를 개관했다. 그녀는 갤러리 대표가 된 뒤 신생 갤러리의 기획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국내외 주요 작가의 전시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수십 년간 그림을 구입해온 터라 갤러리를 운영하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면 전시할 수도, 판매할 수도 없었다. ‘너무 좋아서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가’여야 했다. 누구보다도 그림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자연스레 컬렉터가 좋아하는 갤러리가 됐고, 서울에서도 적잖은 관람객이 대구에 내려와 리안갤러리를 방문했다. 하지만 지방이라는 지리적 어려움은 있었다. “무엇보다 작가들에게 미안했어요. 세계적인 작가가 한국에서 여는 첫 전시인데, 지방에서만 작품을 선보이고 떠나는 거니까요.” 그래서 2009년부터 약 3년간 청담동에 쇼룸을 열어 대구에서 전시 중인 작가의 작품을 홍보했고, 2013년에는 창성동에 건물을 신축해 리안갤러리 서울을 오픈했다.
물론 갤러리 운영이 쉽지만은 않았다. 초창기 김환기 화백의 대작을 4점이나 가지고 있을 만큼 뛰어난 컬렉션을 자랑했는데,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작품을 여러 점 팔기도 했다. 그래도 컬렉터나 관람객보다 한발 앞서가며 그들을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고, 잘 팔리는 작품만 전시하는 게 아니라 좋은 전시를 기획해 미술계의 전체적 수준을 높인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리안갤러리의 이런 행보에는 당연히 작가와 작품을 보는 안혜령 대표의 안목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굉장히 주관적인 ‘작품을 보는 눈’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의 소장품을 모아놓고 보면 소위 잘나가는 작가나 유행을 따라가는 건 아니다. 되팔 수 없고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작품도 많지만, 그녀가 스스로 ‘성공한 컬렉터’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운 것이 큰 자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창적이고 개성이 뚜렷하면서 작품성이 느껴지는 작가가 있어요. 단순히 경력이 좋다는 이유로 작품을 사진 않습니다. ‘감(感)’이 필요하죠. 그림은 가슴으로 보는 것이니 자주 접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 보다 보면 간절히 갖고 싶은 그림이 생겨요.” 오래전부터 그녀에게 작품 구입은 뜨는 작가를 찾는 일과는 무관했다. 전시도 마찬가지. 해외 작가의 전시를 개최할 때는 작업이 중요하고 가치 있으면서 국내에선 쉽게 볼 수 없던 작가를 소개했고, 국내 작가의 경우는 작업 소재가 다양하면서 해외에 소개해도 좋을 만큼 참신한 느낌을 주는 이들을 선정해왔다.

리안갤러리 개관 10주년 기념전 전경

요즘 그녀가 특히 공들이는 것은 한국 작가를 해외에 알리는 일이다. 지난 3월 아트 바젤 홍콩에서도 이교준과 구자현 작가의 2인전 부스를 마련했다. 아트 페어에 참가하는 이유는 작품 판매보다 세계적 갤러리와 매체가 모이는 곳에서 작가를 소개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 경비가 많이 들어도 해외에 한국 작가를 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라는 점에서 더 큰 아트 페어에 참가하려고 노력한다. “이번에 홍콩에서 만난 독일과 영국 갤러리의 관계자들이 한국 작가의 전시를 하고 싶다며 추천을 부탁했어요. 요즘처럼 한국 작가에 대한 관심이 높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좋은 전시를 하면서 갤러리를 알려왔다면 이제는 우리 작가를 알리는 일에 매진하려 합니다. 사실 갤러리의 역할 중 가장 어려운 게 그 역할인데, 이제는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최근 미술 시장이 침체됐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지만 그녀는 오히려 나아졌다고 말한다. 단색화를 선두로 경매시장이 호황이고, 작년과 올해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컬렉팅을 시작하는 인구도 늘어났다는 것이 그 이유다.
안혜령 대표는 ‘컬렉터는 행복하다’는 내용의 강의도 수차례 했다. 그러고 보면 그 자신도 오직 그림이 좋아 여기까지 온 셈이다. 미술 작품에 깃든 치유의 힘을 알기에, 인생을 즐겁게 살고 싶다면 아트 컬렉팅을 하라고 조언한다. 20만 원짜리 판화 한 점으로 시작해 10억 원대 작품까지 구입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 있게 권한다. 좋은 작품 앞에선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예술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작품이 곧 소통의 통로가 되기도 하죠. 좋은 작품을 통해 좋은 사람을 만나면 삶이 지루할 틈도, 우울할 일도 없어요.” 가끔 사람들이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그림 가격에 대해 말하면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리먼 머핀 갤러리의 디렉터 데이비드 머핀이 우리 쇼룸을 방문했을 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가격이 뛸 것 같던 그림이 오르지 않는 상황도 있지만 그게 바로 인생 아니겠느냐고. 최선을 다하지만 우리가 전시하는 모든 작가가 승승장구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미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그런 부분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술 작품은 그 자체로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해주니까요.”

에디터 |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 김잔듸(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