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완벽한 순간
뉴욕을 기반으로 영상, 설치, 사진 작업을 꾸준히 해온 이재이 작가가 이번에는 스토리가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겨울 제15회 송은미술대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서울을 찾은 이재이 작가를 그녀의 신작과 함께 만났다.
그 어떤 완벽한 순간
이재이 Jaye Rhee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신작 ‘The Perfect Moment’ 앞에 선 이재이 작가
이재이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스코히건 회화조각미술학교를 졸업했다. 20년 넘게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예술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퍼포먼스 영상으로 탐구해왔다. 2008년 KAFA 미술상, 2011년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에 이어 2015년 송은미술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Rebecca,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45×258cm, 2015
The Perfect Moment(still image), 2채널 비디오, 사운드, 12분, 2015
송은미술대상 수상 기념 전시에서 가장 최근작 ‘The Perfect Moment’와 2005년 작품 ‘GoinPgl aces’가 마주 보고 있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각각 내레이션이 등장하는 작품과 수행적 퍼포먼스를 담은 작품이고 그 사이에 10년의 시간이 있죠. ‘The Perfect Moment’는 제 첫 번째 내러티브 작품이에요.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과정을 되짚어보니 과거 작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 작업이 반환영적 환영을 만드는 것인데, ‘Going Places’가 런그 면을 응축해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에요. 만들어낸 이미지는 다 환영이지만, 뻔히 보이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새로운 환영을 만드는거죠. 영상으로 그런 퍼포먼스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이번에는 댄서의 이야기로 작품을 만들게 됐어요.
12분짜리 영상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 든 무용수가 내레이션으로 잊지 못할 과거의 경험과 동작을 자세히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재연하는 젊은 댄서의 동작이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에 존재한 완벽한 순간을 결코 완벽하게 묘사할 수 없다고요. 작품의 제목 역시 그런 의미인가요? 그렇죠. 하지만 꼭 과거는 아니에요. 분명히 존재했고 지금도 항상 존재하는거죠. 재연 불가능하지만 경험에 의해 존재해요. ‘The Perfect Moment’란 제목은 촬영을 하면서 정했어요. 촬영하기 전까지 지난한 과정이 있었고 불확실한 면도 많았어요. 그런데 촬영을 시작하니 모든 것이 퍼즐이 맞아떨어지듯 순조롭게 흘러가더군요. 햇살까지 아주 정확한 순간에 실내로 가득 들어왔죠. 이거야말로 다시 설명하기 쉽지 않은 완벽한 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경험이란 개인 고유의 것이니 전시장에서도 관람객이 작품을 통해 나름 완벽한 순간을 찾길 바랐습니다.
2013년 작품 ‘The Flesh and the Book’에도 댄서들이 등장해요. 그리고 2007년에는 ‘Noest’가 있죠. 이렇게 몸짓이나 춤과 연관된 작품을 만들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머스 커닝엄(Merce Cunningham) 댄스 컴퍼니를 좋아했고 그들의 워크숍에도 가봤어요. 그런데 2011년 마지막 공연을 하곤 무용단이 해체했죠. ‘The Flesh and the Book’을 준비하면서 머스 커닝햄 댄스 컴퍼의니 무용수들과 작업하고 싶어 찾아봤는데 연결이 됐어요. 그 작품 속 댄서 한 명이 ‘The Perfect Moment’에 나든이 댄서로 등장하죠.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작업을 하기 때문에 댄서들에게까지 관심이 이어진 거예요.
당신의 작품은 ‘반복’과 ‘수행’이라는 키워드가 상당히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Going Places’에서는 화면 가득한 풍선 사이를 떠다니듯 반복적으로 오가고, ‘Mediterranean’에서는 몸에 테이프를 감는 동작이 등장하죠. ‘Saesaw’나 ‘Swan’에서도 마찬가지로 직접 반복적인 수행을 하셨어요. 작품마다 그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꽤 노동 집약적인 반복이었고, 이후엔 형태나 의미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반복을 했어요. ‘Seasaw’(2003년)에서는 실뭉치를 들고 분주히 오가면서 바다의 이미지를 채워나갔죠. 그런데 2005년을기 점으로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Swan’(2007년)은 제가 백조 형태로 타월을 머리에 두르고 목욕탕에서 백조가 그려진 타일 벽 앞을 오가는 동작을 반복하는, 슬랩스틱 같은 요소를 더한 작품이에요.
‘Cherry Blossoms’(2012년)도 슬랩스틱 같은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벚꽃이 떨어지는 장면을 분홍색 껌으로 연출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웃음 짓게 되죠. 아까 ‘환영’이란 표현을 쓰셨는데, 이런 작업이 진짜와 가짜에 관한 고찰인가요? 그런 면이 있죠. 가짜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진짜는 무엇일까 생각하는 거예요. 벚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그렇다면 우리의 실제 경험 속에 있는 벚꽃은 뭘까, 우린 무엇을 벚꽃이라 부르는가, 그런 이미지를 보는 경험을 벚꽃을 봤다고 하는 거라면 껌도 벚꽃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질문해요.
미국에서 생활한 지 20년이 넘었어요.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그리고 지금 뉴욕에 살면서 느끼는 한국인 그리고 여성으로서 정체성이 분명히 있을 텐데 작품에 많이 드러나진 않는 것 같아요. ‘인종’과 ‘젠더’라는 이슈는 작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작가가 어떤 제스처를 취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초창기 작품에서 그런 이슈를 전면적으로 내세울 수도 있었지만 전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한국 관람객에겐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개최한 송은미술대상 수상작 전시가 작가님의 신작을 만날 수 있는 반가운 자리였어요. 상반기에 미국과 유럽에서 전시가 이어진다고 들었습니다. 2월 4일부터 3월 10일까지 텍사스 주 산마르코스에서 개인전 < Shaping the Presence, Formngi the Absence >를 개최해요. ‘The Flesh and the Book’을 위주로 영상 설치와 사진을 전시합니다. 그리고 4월에는 밀라노 공예 트리엔날레의 일환으로 열리는 그룹전에 참여해 4채널 비디오 ‘Tear’를 전시할 예정이에요.
퍼포먼스 기반의 작품에서 내러티브가 있는 작품까지 왔는데, 이후 작품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궁금해요.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어요. ‘The Perfect Moment’가 현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라면이, 제는 과거에 상상한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로드 무비에 가까운 작품이 될 텐데, 머릿속에 있는 걸 어떻게 풀어지낼는 작업을 해봐야 알게 될 것 같아요. 또 ‘패턴’에 대한 작업도 해볼 생각이에요. 호흡이 긴 작업과 짧은 작업을 함께 진행하는데, 분명한 건 올해 신작 하나가 나온다는 겁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탐구할 한 가지 주제가 있다면 뭔가요?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탐구할 것, 바로 이미지의 허상이에요.
The Flesh and the Book, 4채널 비디오, 사운드, 4분 45초, 2013
Swan, 디지털 C-프린트, 91.4×161cm, 2007
Cherry Blossom, 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 140×108cm, 2012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김정근(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