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개 있는 그녀
2017년은 배우 최희서의 해였다. 신인여우상을 휩쓸었고 대종상영화제에서는 여우주연상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흥분하지 않는다. 무명 시절부터 그랬다. 조용히 다음 작품을 준비할 뿐이다.

블랙 슬립 원피스 Wnderkammer.
화보 촬영 경험이 많지 않은데 오늘 촬영은 무척 적극적이더라. 그동안 노하우가 생겼나? 촬영 때마다 늘 긴장하는데 오늘은 신기하게 덜 떨렸다. 사실 의상을 입은 나 자신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진다. 난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예를 들면 키가 작고 얼굴이 작지 않다는 것?(웃음) 잘 아니까 언제부턴가 걱정이 생기더라. 근데 오늘은 전혀 긴장이 되지 않아 신기했다. 아마 영화 <박열>이 극장에서 내려가고, 연말 시상식도 모두 끝난 후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가짐이 편해져서 그런 것 같다. 아니면 얼마 전에 크랭크업한 영화가 몸에 대한 작품이라 그런 걸지도.
어떤 영화를 찍었나? 제목은 ‘아워 바디’. 한 여성의 몸이 변하면서 정신도 함께 변하는 이야기다. 자괴감에 빠진 무직의 고시 실패생이 운동을 하면서 몸도 달라지고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바뀌고, 그러면서 그녀의 태도도 바뀐다. 몸과 정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계기였다. 아까 앞이 다 트인 옷을 입었는데 카메라 앞인데도 너무 편하더라. 오히려 스타일리스트가 움직이지 말라고 걱정할 정도였다.
<아워 바디>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과정에서 진행하는 독립 영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영화 쪽에서 무척 유명한 기관이다. 1년에 10명의 연출 전공생을 뽑아 교육하고 전년도 졸업 기수와 해당 연도 졸업생까지 합쳐 총 20명 중 3명에게 장편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본인이 쓴 시나리오로 연출, 편집까지 하는 장편 입봉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봉준호 감독이 여기 출신이고, <박열>에서 같이 호흡을 맞춘 배우 이제훈도 장편제작과정에서 탄생한 영화 <파수꾼> 덕분에 그해에 신인상을 휩쓸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제훈뿐 아니라 배우 박정민, 변요한, 류준열, 전여빈 등 요즘 촉망받는 신인 배우들이 다 여기서 나왔다. 이번 청룡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은 감독의 작품도 장편제작과정의 결과물이고. 감독 지망생과 무명 배우들에겐 최고의 등용문인 셈이다.
역할을 맡은 주인공은 어떤 인물인가? 평범하면서도 자기 고집이 있는 31세 고시생이다. 고시를 8년째 실패하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지고 자취방은 쓰레기 더미에 가까운 상태에서 어느 날 편의점에 가다 러닝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맨 앞에서 한 여자가 다부진 자세로 달리는 모습이 멋져 보여 자신도 그다음부터 조금씩 달리기를 해본다. 1분이 5분이 되고, 10분이 되면서 몸이 달라지고 성격도 달라진다. 그러다 주인공이 어떤 기업에 사무 알바생으로 취직하게 되는데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달리기로 풀면서 이야기가 심화된다.
배역을 소화하며 육체적·심적 변화가 극심했을 것 같다. 실제 달리기를 해야 하니까! 보통 여배우들은 운동으로 요가, 필라테스 정도를 한다. 나는 킥복싱을 한 적이 있는데 취미로 즐긴 거라 숨이 차서 쓰러질 때까지 한적은 결코 없다. 그런데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거의 쓰러질 때까지 격하게 운동을 해보고 여러 가지 느낀 바가 많다. 사실 공부나 연기는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운동은 연습한 만큼 몸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닭 가슴살 섭취량이 50g이냐, 100g이냐에 따라 차이가 바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시도한 도전 중 운동만큼 결과가 명확한 것도 없었다. 가령 촬영은 내가 생각한 정도에 못 미쳐도 변명이 가능하지만 운동은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숨을 곳이 없다. 그냥 그만큼 노력하지 않은 거다. 한 달 보름 동안 하루 종일 운동하니 체지방률이 14% 감소했다. 체중은 3kg 줄었는데 지방이 6kg 빠지고 근육이 3kg 늘었더라. 운동, 특히 달리기를 극한으로 하며 명상 효과도 경험했다. 사람이 좀 더 차분해진다. 그래서 오늘 촬영할 때 마음이 편했던 걸까?

레더 셔츠 Demoo.
운동 말고 혹시 연기 쪽으로 기억나는 도전이 있나? 2009년 영화 <킹콩을 들다> 오디션을 보기 전까지 나는 연극에 빠져 살았다. 그때 영국에 있는 로열연극아카데미에 그렇게 가고 싶었다. 세계 최고 연기학교인데, 영국 하면 셰익스피어의 본고장 아닌가. 연극에 미쳐 있던 스물두 살 최희서는 다짜고짜 거기에 들어가겠다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3차까지 진행한 오디션에서 최종적으로 떨어졌지만 오디션을 준비하던 마음과 연기라는 예술을 연마하는 자세가 이후 연기 인생에 좋은 자양분이 됐다. 자기 성찰을 엄청나게 했다. 연습하고, 또 하고, 수십 번 같은 장면을 반복 연습하다 어떨 땐 한 번만 해보고, 비디오로 녹화도 해보고….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연극영화과를 다니지 않았으니까(최희서는 연세대학교에서 언론홍보영상학과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선생님이 없어서 혼자 한 거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했다. 본고장에서 셰익스피어를 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도전한 일이었다. 하하.
연기를 배운 적이 없다니 의외다. 혼자만의 비법이 있나? 일단 책을 많이 본다. 특히 희곡류를 좋아한다. 대학교 때는 연극 동아리 연희극회에서 활동했는데 그때 현업에 종사하는 선배들이 워크숍을 많이 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몇 마디가 있다. “연기는 언제나 리액션이다”, “네가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듣고 보는 것에 집중해라”, “한 캐릭터의 동선은 다른 캐릭터의 동선과 맞물리며 관계를 만든다” 등등. 어릴 때 들은 말인데 아직도 도움이 많이 된다. 나는 대본을 되풀이해 읽으면서도 특정 프레임에 캐릭터를 가두고 동작과 동선을 정하진 않는다. 읽을 때마다 대본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네다섯 번 읽어본 후 인물에 대한 분석을 시작한다. 육하원칙에 따라 접근하는데 캐릭터의 과거와 성장 배경, 가족과 친구들에 대해 생각한다. 참고로 이건 영화에는 직접적으로 안 나타날 때가 많다. 그리고 영화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 사건에 캐릭터가 어떻게 녹아들고, 그가 추구하는 목적은 뭔지 고민해본다. 어찌 보면 간단해서 비법이라 할 만한 것도 아니다.
듣고 보니 대답이 무척 조리 있다. 자기 성찰을 깊게 하는 듯하다. 배우가 독백을 연습하면 자신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카메라 앞에서는 리액션이 중요하니까 연기에는 직접적으로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독백을 연습하면 대사 하나하나의 맛을 생각하고 그 대사가 내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음미하게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캐릭터의 쾌감을 느끼는 독백을 계속하면 자기 성찰이 깊어지는 효과가 확실히 있다. 참고로 영화, 연극 오디션에는 독백이 한 번은 꼭 들어간다. 그래서 난 ‘독백 노트’라는 걸 따로 만들곤 했다. 내가 정말 좋다고 생각한 대본과 캐릭터들을 모아놓은 거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부터 이창동 감독의 영화까지 다양한 여자 캐릭터의 대사가 있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적어놓은 거라 내게는 무척 중요한 노트다. 지금까지 세 권을 만들었다.
‘대본 노트’도 가지고 있던데? 독백 노트를 만들던 버릇에서 비롯된 게 대본 노트다. 2012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단편영화에 출연하면서 대본 노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왼쪽에는 캐릭터의 대본을 스크랩하고, 오른쪽에는 인물을 분석하고 연습하면서 느낀 점을 적는다. 좋아하는 노트를 사서 내가 나오는 신의 전전 신부터 붙이고 내가 출연하는 신과 신 사이의 신은 모두 스크랩한다. 이렇게 해도 영화 <동주> 때는 대본 노트의 반도 못 채웠다. 대본 노트에는 이렇게 연기해야 한다는 지시문이 아니라 캐릭터를 연기할 때 생각해야 할 태도나 집중할 부분을 적어놓는다. 사실 적는 건 늘 똑같다.(웃음) ‘순간에 집중하라’, ‘정직해야 한다’, ‘거짓말하지 마라’, ‘진실한지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물어봐라’ 등등 늘 똑같은 말을 다시 쓴다. 그게 제일 어렵기 때문이다. 아! ‘지금 일어나는 일은 내가 처음 겪는 일이다’도 뺄 수 없다. 대본을 많이 읽고 연습을 계속하면 새로운 정보를 듣고 놀라야 하는 장면에서 너무 힘들어진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순간이라고 생각해야 도움이 된다.
영화 <박열>의 대본 노트는 특히 두껍다고 들었다. 일부러 두꺼운 노트를 샀는데도 스크랩이 워낙 많아 결국 뒷표지까지 사용할 정도로 두꺼워졌다. 앞으로 대본 노트가 계속 생기겠지만 <박열>의 대본 노트는 첫 주연작이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가네코 후미코라는 여성의 삶과 그녀를 바라보는 서른 살 최희서가 그 안에 가득 담겨 있어 10년, 20년이 지나도 가끔 들여다볼 것 같다. 어쩌면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남길지도 모를 만큼 귀중한 시간의 조각이다. <박열>을 촬영하면서 매일 적어도 한 번씩은 새로운 발견을 했다. 내가 연습하지 않은 것이 현장에서 보이는 순간이다. 배역을 열심히 연습한 내가 아니라 그 배역이 되어 실제 현장에 가면 갑자기 튀어나오곤 했다.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느낌’이랄까. 아주 작은 구멍이라 혼자서는 못 찾았는데 현장에서 한번 찾기 시작하니 모든 게 수월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블랙 원피스 Eudon Choi, 슈즈 Josephine.
현장에서 발견한 시간의 조각에 대한 예를 들어달라. 극 중 박열과 후미코가 서로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있다. 혼자 연습할 때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막상 현장에서 이제훈과 얘기하다 우리만의 신호가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서로 상의만 했지 자세히 맞춰보진 않았는데 슛을 들어가보니 찡그리는 표정이 서로 좋다고 느껴 그다음부터는 영화 곳곳에 찡그리는 장면을 심어놨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는 시그널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박열>의 후미코가 워낙 강렬한 캐릭터라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소포모어징크스가 걱정되진 않나? 후미코라는 배역이 내게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연기로 표현하는 행위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후미코가 느꼈을 감정, 외로움, 내가 가지고 있는 그녀의 초상화와 각종 이미지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실 굳이 빠져나와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마음속에 계속 간직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앞으로 이런 캐릭터 못 만나면 어떡해?”라고 걱정하면 “맞아. 못 만날 것 같아” 라고 말하곤 한다. 후미코가 내 안에 계속 있어도 나쁘지 않다. 그래서인지 앞으로 더 좋은 역할을 맡아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없는 것 같다.
이준익 감독과 두 번 함께 일했는데 그의 연출 방식은 어땠나? 현장에 도착하면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고 말하는 분이다. <박열>에서 오뎅을 나르는데 깡패들이 칼을 휘두르며 쳐들어오는 장면이 있다. 그때 ‘나는 어디로 갈까’ 동선을 생각하는데 감독님은 그렇게 우리가 생각한 동선을 카메라에 담기 쉬운 동선으로 교정해준다. 가끔 먼저 제안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배우의 동선은 배우 스스로 편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후미코, 어떻게 움직이고 싶어? 그다음엔 어떻게 할 것 같아?” 같은 좋은 질문을 던진다. 지도자로서 완벽에 가까운 분이다. 배우 개인의 캐릭터 분석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완벽히 지휘한다. 특히 ‘그건 아니야. 그거 이상해’ 같은 부정적인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2이준익 감독과 일하려면 배우가 배역을 완벽히 숙지하고 있어야겠다. 감독님의 현장이 편하고 재미있다는 배우는 모두 엄청나게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감독님 앞에 배우가 아니라 배역으로 분해 나타난다. 그래서 감독님도 배우 이름이 아니라 극 중 이름으로 부르고…. 그런 믿음이 강해서인지 준비되지 않은 배우를 이준익 감독님 현장에서 보긴 힘든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은 어떤가? 영화 <옥자>에 통역사 역으로 출연했는데.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봉준호 감독님이 동선을 얘기하면 그 동선을 통해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관점을 엿볼 수 있다. 거기에 즉흥성 강한 행동이 덧붙여진다. 내가 맡은 역할에 대해 ‘이 여자의 손수건은 꽃무늬일 것 같다. 그걸로 부채질을 하고 싶다’고 분석했는데 바로 OK 하더니 극 중 제이크 질런홀이 카메라에서 빠져나갈 때 ‘툭’ 하고 걸쭉한 침을 뱉어달라 말하는 분이다. 굉장히 디테일하다. 어떤 동선에 대해선 몇 걸음 더 가서 한 번 더 찍자는 제안도 한다.
눈치가 빨라야 할 것 같다.(웃음) 맞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지 않고 연기를 즐기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즉흥연기를 즐기는 건 정말 어렵다. 배역에 대한 통찰과 많은 경험이 없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추가하는 디테일을 받아들이며 연기하고 카메라워크랑 맞추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변희봉, 윤제문 같은 좋은 배우만 골라 쓰는 것 같다.

블랙 원피스 Cos, 브레이슬릿 Attike.
배우 최희서의 롤모델이 궁금하다. 리브 울만(Liv Ullmann)이라는 여배우가 있다. 이준익 감독님이 “눈은 영혼을 비추는 창문”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녀의 눈을 보면 올곧은 느낌이 드는 게 너무 좋다. 영혼이 느껴지는 눈이다.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지만 매번 연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항상 그 역할로 기억하게 된다. 그녀처럼 작품마다 진실된 캐릭터로 다가가고 싶다. 리브 울만은 지금 영화 연출과 연극 연출을 하며 봉사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여성으로서 작품과 함께 다방면에서 사회적 활동을 하는 그 기개가 부럽다.
이전 인터뷰에서는 송강호를 언급했던데? 롤모델이 한 명은 아니니까.(웃음) 송강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기자다. 출연 작품마다 관객들은 감동을 받고 그 캐릭터의 행동에 설득된다. 나는 ‘여자 송강호’가 되고 싶다. 여배우 중 그런 존재감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다. 연기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런 배역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자 송강호가 되고 싶다는 건 송강호처럼 연기하고 싶다는 뜻과 다양한 역할을 맡고 싶다는 중의적 의미다. 근데 그건 내 힘으로만 되는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런 역할이 한국 영화에는 많지 않으니까. 먼 미래겠지만 나도 언젠가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연출까지는 모르지만 내가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연기하고 싶다. 우리는 선택을 받는 입장이라 계속 갈증을 느낄 거다.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여성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도가 좀 더 필요한데 아직 그런 영화 시나리오와 연극 대본을 거의 보지 못했다.
2017년 상을 정말 많이 받았다. 이런 수상 릴레이가 배우 최희서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처음으로 배우로서 인정받은 느낌이다. 좋은 배우로서보다는 최희서라는 사람이 연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았달까. 1년 전만 해도 “배우 최희서입니다”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면 “네? 성함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이제 최희서의 직업은 배우고, 앞으로 연기를 계속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은 표식이 생긴 느낌이다. 앞으로 사람들이 내 연기를 지켜볼 테니 그에 걸맞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기분 좋은 책임감도 생긴다. 아마 내가 배우로 인정받은 걸 누구보다 좋아할 사람은 부모님일 것이다. 이제 딸 얘기를 할 때 제대로 말할 수 있으니까.(웃음)
혹시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조언을 구하진 않나? 가끔 인스타그램 메시지로 “연기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연락하는 경우가 있다. 1년 전만 해도 똑같은 고민을 한 나 자신에게 물어봤다. 생각해보니 스무 살에 연기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3개월 이상 쉬어본 적이 없다. 좀이 쑤신달까, 인간으로서 사는 가치가 없어지는 것 같달까…. 영화를 안 찍으면 공연을 했고, 공연을 하지 않을 땐 단편영화를 찍거나 드라마 단역을 했고, 그래도 일이 없을 땐 독백을 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으며 연기했다. 그렇게 늘 뭐라도 찾아 했기 때문에 쉬지 않고 연기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연기할 때 나는 정말 행복하다. 어떤 배역을 맡아 그 배역의 말을 전할 때, 그걸 사람들이 봐줄 때 너무 행복하다. 연기를 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은 마음이 있다. 2013년이었나, 영화 오디션, 공연 오디션 다 떨어졌을 때 운 좋게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하는 ‘아시아 연기자 아카데미 프로그램’에 붙어 강수연, 안성기에게 단기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강수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이렇게 말하는 거다. “배우는 정상이 없는 산을 오르는 것이다. 정상이 있다고 생각지 말고 계속 산을 올라라.” 듣고 보니 황당하더라.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며 이렇게 해석했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지금 하는 작품이 정상이다. 지금 하는 작품이 네게 최고의 작품이고 지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최고의 스태프니 지금을 위해 지금 열심히 하라.’ 그렇게 생각하니 쓸데없는 욕심이 사라지고 지금 하는 작품에 충실하게 되더라.
마지막으로 배우 최희서의 신념, 인간 최희서의 인생관이 궁금하다. 많은 사람이 연극과 영화를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봤다. 그들은 왜 일정한 시간과 돈을 들여 우리의 작품을 감상할까? 그들이 있어 배우가 존재하는 거다. 독백을 연습하는 건 사실 연기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관객이 없으니까. 훌륭한 대본 속 캐릭터를 연기하며 어떻게 대사를 전달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감동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책임감을 직업정신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인간 최희서는 다른 것 같다. 사실 앞으로 내가 더 잘나가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 가족과 주변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한 게 최우선이다. 효도하는 딸, 든든한 누나,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
에디터 전종현(harry.jun@noblesse.com)
사진 신채영 헤어 박정아(에이바이봄) 메이크업 김도연 스타일링 박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