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혀 웃다
가수 한대수가 곧 서울을 떠난다고 인터넷 뉴스에서 그랬다. 또 다른 곳에서는 그가 뉴욕으로 이민 간다고 했다. 막 새 책이 나왔는데, 한창 앨범 작업 중이라 들었는데 그는 왜 떠나기로 한 걸까. 이번에도 역시 반응이 좋은 신간에 대한 이야기도, 5월 초에 마무리되는 앨범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는데. 떠나기 전에 빨리 약속을 잡아야 했다. 며칠 만에 겨우 전화가 연결됐다. “선생님! 언제 뉴욕으로 가시는 거예요?” 수화기 너머에서 그가 대답했다. “뉴욕? 나 안 가!”
한대수는 음악가 겸 사진가 겸 저술가다. 그가 2주에 한 번씩 글을 기고하는 신문에 그렇게 적혀 있다. 실제로 한대수는 글을 잘 쓴다. 산문집이 벌써 10권이 넘는다. 범세계적 정치, 경제, 군사 등의 무거운 주제가 원고지(아직도 그는 원고지를 사용한다)를 거치면 가볍고 위트 있는 글로 탄생한다. 노랫말처럼 귀에 착착 감긴다. 한대수는 사진도 잘 찍는다. 1975년 2집 <고무신>이 금지곡으로 묶이자 미련 없이 뉴욕으로 건너가 사진으로 밥벌이를 했다. 그는 시에도 조예가 깊다. 그중에서도 영시를 잘 쓴다. 미국비평가협회에서 주는 상을 두 번이나 탔다. 가만 보면 그는 타고난 예술가다. 그러나 그는 이 말에 고개를 저으며 두 눈을 짝짝이로 뜨고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예술가는 만들어진다. 록 스타가 되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야 하고, 둘째 애정 결핍이어야 한다. 나 역시 부모 없이 자랐다.” 실제로 그의 칼럼에서 고백한 이야기다. 조건만 보면 그는 이미 세계 제1의 록 스타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물리학도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세계 최고 핵물리학자인 에드워드 텔러 박사의 제자로 들어간 아버지는 한대수가 7살 무렵 실종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아들을 두고 재가했고,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을 설립한 할아버지가 부모를 대신해 그를 키웠다. 한대수가 뉴욕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열일곱 살 때, 아버지는 출판업을 하는 인쇄업자가 되어 나타났다. FBI가 겨우 찾아낸 아버지는 한국어를 모조리 잊은 상태.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굳게 입을 다문 아버지 옆에는 미국인 아내까지 있었다. 가락은 경쾌하지만 가사에 한의 정서가 묻어 있는 그의 노래는 이렇듯 도저히 정상적이라고 보기 힘든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실제로 그가 지금껏 작곡한 약 140곡 중 스물세 살 전에 완성한 노래가 80여 곡에 달한다. 특히 질풍노도의 시기인 고등학교 때는 일기 쓰듯 곡을 썼다고.한대수는 뉴욕에서 만나 결혼한 모스크바 출신 아내와의 사이에 열 살 난 딸이 하나 있다. 아내가 알코올의존증을 앓고 있어서 딸 양호는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들었다. 한대수에게 아버지의 (비상식적인) 부재가 큰 결핍으로 작용한 것처럼 딸 양호에게는 상대적으로 엄마에 대한 애정 결핍이 있다. 딸을 볼 때마다 자신의 어릴 적이 떠오르는 이유다. 힘들게 발표한 앨범이 체제 전복을 꾀한다는 이유로 모두 소각되고 음악 활동을 못하기도 하고, 1970년대 록 음악이 뉴욕의 골목골목을 휘감고 히피들의 ‘피스’가 공연장 안팎으로 넘실댈 때조차 아시아 변방의 가수 출신으로 오디션 기회조차 얻지 못한 힘든 나날을 보내며 굶는 것이 다반사였어도 부모의 부재로 인한 고통과 결핍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몇 년 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밥 딜런의 앨범
지난 3월에 펴낸 신간 <바람아 불어라>를 읽고 ‘아, 이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넷 뉴스에서 선생님이 뉴욕으로 간다는 기사를 보고 맘이 급해졌어요. 근데 “뉴욕 안 간다” 하셔서 놀랐죠. 어떻게 된 거예요? 사실 모국같이 살기 좋고 편한 데가 없어요. 우선 나이가 일흔이 되면 젊을 때처럼 욕망이 없어져요. 가장 먼저 없어지는 게 성욕. 가능성이 없으니까. 다음엔 물욕. 페라리도 젊을 때나 타고 싶은 거고. 그리고 성취욕, 소유욕, 명예욕도 다 사라져요. 남는 건 딱 하나. 식욕, 먹는 즐거움이에요. 한국처럼 골목골목 먹을 게 많은 나라가 없어요. 이제 그런 게 좋더라고. 그건 그렇고, 뉴욕 이야기는 딸 양호 교육 이야기를 하다 나온 거예요.
아이의 학교 문제 때문에 뉴욕을 생각하신 거군요? 아이 생각이 없다가 뒤늦게 양호를 낳았는데,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내 인생이 아이가 있기 전과 후로 나뉘더라고요. 마치 1부작, 2부작처럼. 내가 아주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양호를 낳고 보니 그 전의 나는 엉터리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생명을 돌보고 키우는 것만큼 인생의 극적인 경험은 없더라고요. 그런데 양호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선생님과 면담을 하는데 우리 애가 한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학교에 보내는 겁니다” 하니까 다른 애들은 다 읽고 쓴대요. 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아이들을 그렇게 빨리 가르친 결과가 뭡니까? 어려서부터 경쟁을 시키고 1등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도 결국 노벨 수상자가 한 명도 없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양호는 좀 천천히 가는 교육을 시키고 싶다” 뭐 이런 이야기를 지난해 공연 끝난 술자리에서 했는데, 그게 어떤 기자에 의해 와전돼서 ‘한대수 뉴욕 이민’ 이런 기사가 난 거예요.
사실 뉴욕으로 간다는 기사를 봤을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가난한 록 가수인 줄 알았는데 역시 명문가 출신답게 집안에 돈이 있었구나’라고요. 선생님의 집안 배경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그의 할아버지는 백낙준 박사와 함께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신학대학원 원장을 지낸 한영교 박사다).우리 집안은 전형적인 한국 스타일이 아니에요. 아주 독립적이죠. 간섭을 안 하는 대신 돕지도 않아요. 물론 만날 땐 서로 격려해주고 박수를 쳐주긴 해요.
섭섭하지는 않으세요? 습관이 되어서 섭섭하지는 않아요.
그럼 다시 뉴욕 이야기로 돌아와서, 지금이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뉴욕으로 갈 생각이 있으신지. 아니면 모국에 남고 싶은 건가요? 뉴욕이 얼마나 멀고, 또 얼마나 확실한 도시입니까. 우선 생활비가 한국의 약 3배예요. 한 달 방값만 500만 원이더라고. 상황을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믹 재거가 아닌 게 슬프지 뭐.(웃음)
근데 선생님께 뉴욕은 아버지와의 아픈 상처가 있는 곳이잖아요. 다시 가고 싶진 않을 것 같은데…. 물론 훌륭한 조부모님 밑에서 자란 건 다행이지만, 어린아이에게 부모의 부재는 분명 보통의 상황은 아닐 테니까요. 할아버지께서 정말 잘 돌봐주셨지만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당연히 혼란스러웠어요.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상당한 특권을 누리고 살았구나 싶긴 해요. 내 친구들이 여권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때 난 비행기를 탔으니까. 큰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도 특권이었고.
아버지의 실종도 놀랍지만 10년 만에 FBI가 아버지를 다시 찾아낸 건 더 놀랍습니다. 어디서 재회하셨어요? 당시 맨해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롱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거예요. 1시간 반 거리였죠. 맨해튼에서 출판사와 인쇄소를 크게 하고 있더라고. 그때까지 ‘아빠 한번 만나보고 싶다’ 하면서 살았는데, 막상 만나니 전혀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왜요? 새롭게 얻은 미국인 아내가 있었어요. 나를 딱 막더라고. 가까이 못 지내게. 근데 할아버지는 “너희 아버지를 찾았으니 아버지하고 살아야 한다” 하셨고, 그래서 아버지 집으로 가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2년 정도 같이 살았어요.
같이 살면서 아버지와 새롭게 만든 추억은 없나요? 그 당시 나도 아버지가 생겼으니 다른 아이들처럼 용돈을 받아보고 싶었어요. 비틀스나 롤링스톤스 앨범도 사고, 기타도 좀 치고 싶다며 용돈을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래? 여긴 미국이야. 일을 도우면 용돈을 주마” 해서 주말마다 아버지 회사에 가서 인쇄기 닦고 종이 관리하고 구석구석 청소하고 그랬어요. 졸업반 때까지. 그러면서 용돈을 타 썼어요. 하루는 주말에 일을 마치고 아버지와 같이 집에 들어가려고 기다리는데 약속이 있다며 나보고 먼저 가래요. 맨해튼에서 기차를 타고 롱아일랜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벌판에 석양이 지는 걸 보는데 ‘아, 광야는 넓고 하늘은 푸른데, 가난은 왜 이렇게 슬픈가’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기차칸에 혼자 앉아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리고 집에 도착해 그날 밤 곡을 썼는데,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행복의 나라로’예요.
근데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게 있어요. 선생님이 걸어온 길을 봐도 도통 웃음이 나는 인생은 아닌데, 왜 이렇게 쾌활하세요?웃음도 많으시고. 더 나빠질 것 없는 내 인생이 기가 막혀 웃는 거예요. 행복이란 마음에 있는 것이기도 하고.
록 가수에게는 자유, 이상, 몽상가 등의 말이 늘 따라다닙니다. 선생님은 최고의 록 가수이긴 하나 스스로 ‘현실적 히피’라는 말을 자주 할 정도로 몽상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여요. 많이 변했죠. 한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완전히 나의 자세를 바꿔놓았어요. 양호 낳기 전에는 음악이 중심이었어요. ‘다 이렇게 살다 죽는 거지’ 했어요. 자아에 빠져 있었죠. 지금은 음악보다 중요한 양호가 있어요. 그게 달라요.
록 가수인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데, 가수로 살기엔 어느 쪽이 더 좋은가요? 젊을 때 아이를 가졌다면 음악은 취미로 했겠지요. 가장으로서 예술가로 사는 건 너무나 큰 주변의 희생이 따르는 일이에요. 내가 양호를 스무 살에 낳았다면 아마 지금쯤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만들고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선생님은 성공한 가수 아닌가요? 최소한 가난하진 않잖아요. 그렇죠. 음악을 통해 책도 쓰고, 저작권도 조금이지만 들어오고, 라디오 DJ 같은 방송 활동도 했고. 성공했다고 볼 수 있죠.
금의 젊은 록 가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지금 상황에선 거의 불가능하지요. 안타깝지만 계속 라면을 먹어야 한다고 봐요.
선생님도 라면 많이 드셨어요? 난 많이 굶어봤어요. 전에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살 때 제일 가난했어요. 할아버지가 하라는 것을 안 했거든요. 우리 집안에 큰 목장이 하나 있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 뜻에 따라 뉴햄프셔 대학교 수의학과에 진학했는데 도저히 못 다니겠더라고. 음악을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학교를 중퇴한 그날부터 금전적 지원을 끊으셨어요. 히피처럼 음악 한다며 돌아다니는 손자가 못마땅하셨던 거지.
전혀 도와주지 않으셨나요? 전혀. 중퇴하고 음식점에서 일하면서 음악을 했어요. 당시 뉴욕에서는 ‘사랑과 평화’라는 주제 아래 히피들이 모여 서로서로 도왔어요. 히피들을 돕는 음식점도 많았는데, 거기 가면 밥을 먹을 수 있었어요. 반찬도 콩밖에 없었지만 굶는 것보단 나으니까.
밥값은 공짜였나요? 돈은 자기 마음대로 내요. 돈이 없으면 안 내도 되고. 돈이 있는 날엔 10달러도 내고. “피스 브라더.” 이게 히피들끼리 하는 인사예요. 전쟁 없는 세계, 평화로운 유토피아를 만들자는 것이 히피들의 꿈이었죠.
한국에 돌아와서 음악을 할 때 그 영향을 많이 받으셨죠? 당연히 거기에 젖어서 왔죠.
경찰에게 끌려간 적은 없었어요? 그건 1970년대 초반이에요. 근데 나는 1960년대 후반에 왔거든. 거리에 머리 긴 남자는 나밖에 없었어요. 내가 좀 일찍 시작한 거지. 아마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반체제 가수라기보다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환자처럼 보였을 거예요. 근데 몇 년이 지나니까 내가 하고 다니던 게 반체제 운동이니, 히피니, 마리화나니, 프리섹스니 하면서 다 잡아들이는 거예요. 딱 그 시기에 난 군대 영장이 나와서 마침 군대에 있었어요. 다행이었죠.
군대에 다녀와서 1975년 발매한 2집 앨범 <고무신>이 모두 소각됐고 활동에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건 가수에게 창살 없는 감옥 아닌가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딱 그 나이에 창작의 꽃봉오리를 피웠어요. 매일 하나씩 황금알을 낳는 닭처럼 아무리 써도 계속 곡이 나왔어요. 머리에선 나오는데 나라에선 못 부르게 하고. 활동 제한이 곧 풀리겠지 했는데, 군사정권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게 아니더라고. 지금은 헤어진 첫 번째 아내가 그런 내가 너무 안돼 보였는지 “뉴욕 가자” 하더라고.
멋지네요. 당시 뉴욕에선 록이 붐을 이룰 때잖아요. 장난 아니었죠. 비틀스를 거쳐 레드 제플린, 퀸, 닐 영 같은 쟁쟁한 가수가 주름잡고 있을 때니까. 내가 그 틈에 껴서 음악을 한다는 게 보통 도전이 아닌데, 아내는 나보고 할 수 있다며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OK! 가자” 했지.
가서 어떤 무대부터 시작하셨어요? 클럽에서 노래하며 관객의 호응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당시 밴드 없이 혼자 노래하고 모자를 돌렸는데, 반응이 좋은 날엔 10달러씩 들어와요. 그 당시엔 상당한 돈이었어요. 아내는 패션계에서, 나는 사진계에서 일하며 그 돈으로 점차 밴드를 구성하고 데모테이프를 만들어 레이블마다 보내고 유명 록 레이블의 눈에 띄기 위해 노력했어요.
록 스타가 되겠다며 뉴욕으로 모여든 가수가 무척 많았을 텐데 눈에 띌 확률은 어느 정도나 됐나요? 록 가수라고 몰려든 사람이 한 5000명 됐을 거예요. 그런데 1년에 한두 명만 사인을 하는 거예요. 당시엔 록 레이블이 많았어요. 컬럼비아, 워너, SBK 등 20개 정도의 레이블이 있었는데, 거기서 1년에 한 명씩 사인한다고 하면 총 20명의 가수만 음반을 내는 거예요. 그럼 그 가수들이 얼마를 버느냐. 100만 달러가 아니에요. 레이블에서 마케팅을 하기 시작하면, 그 가수들은 한 곡 가지고 수억 달러를 벌어요. 아, 문제는 비즈니스구나! 한 방 맞은 기분이었어요.
밑 빠진 독에 물 쏟아붓는 기분이었겠네요. 아내랑 나랑 둘이 2년 좀 지나니까 지치더라고. 워너브러더스 부사장과 저녁도 먹고 데모테이프를 전달하기도 했는데, 결정적으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건 뉴욕이 유대인의 무대라고 느끼면서예요. 소수의 유대인이 음악 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어요. 레이블 사장, 부사장, 예술 비즈니스맨뿐 아니라 밥 딜런, 닐 다이아몬드, 배리 매닐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수재나 홉스 모두 유대인이에요. 아, 나에겐 기회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좋다. 포기하자! 그래서 기타 집어넣고, 여행 다녔어요. 근데 곡은 계속 썼어요. 머릿속에서 나오는데 어떡해. ?
예나 지금이나 뮤지션으로 산다는 간 참 힘든 것 같아요. 기획사의 입김이 워낙 세야 말이죠. 우리나라도 SM이 시작한 후로 사실상 재미가 없어졌어요. 예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고. 음악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50년, 100년 넘게 사랑받는 냇 킹 콜, 루이 암스트롱, 비틀스를 보면 각자 굉장한 인생이 있었어요. 그렇게 나온 곡은 아직도 사랑을 받아요. 기획사 중심의 음악은 만들어낸 음악이에요. 그것도 사장이. 난 기획사 시스템이 너무 압도적으로 군림하는 이 모양새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내가 혼자 기타 들고 쎄시봉에 갔듯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가수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
요즘에도 가능할까요? 슬프게도 불가능하죠. 왜냐하면 기획사와 TV, 라디오, PD, 음반사 이런 데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 기획사를 통하지 않으면 음악이 아무리 훌륭해도 발표가 안 되더라고요. 더구나 한국에서 록을 듣는 인구는 좋게 봐야 100만 명 정도밖에 안 돼요. 록 가수들 고생하는 걸 옆에서 보면 할 말이 없어요. “미안하다. 계속 고생해야 되겠다” 이 말밖에는. ?
지난해에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
3월 말에 새 앨범을 녹음하셨습니다. 10년 만에 나오는 정규 앨범(14집)이라 더욱 기대가 됩니다. 지금 독일에서 마스터링하고 있어요. 오디오가이라는 레이블인데, 최고 음질을 자랑하는 곳이라 기대가 커요. 아마 5월 안으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앨범 제목은 정하셨어요? 9집 앨범 제목 정할 때는 하도 안 떠올라 고민고민하다 ‘고민’으로 정하셨잖아요. 아, 이번 제목 정했어요. ‘Cre?me de la Cre?me.’ 크림 중의 크림이다. 즉 핵심만 모았다, 일류다, 그런 뜻이에요. ?
이번 앨범에서는 국내 정상급 연주자 8명과 컬래버레이션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곡 위주인가요? 발표했는데 잘 안 알려진 곡을 주로 넣었어요.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Are You Lonesome Tonight?’ 등을 리메이크한 곡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이번 앨범은 연주자의 몫이 큽니다. 최고의 연주자가 모였으니까 색다른 사운드가 될 겁니다. ?
앨범도 나오는데 공연 계획은 없으세요? 사실상 한국에서는 큰 공연장에서 다 해서 더 이상 할 공연장이 없긴 해요. 근데 내가 뉴욕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제대로 공연을 해본 적이 없어요. 더 늦기 전에 해보고 싶어요. ‘라디오 시티 뮤직홀’이라는 아주 좋은 공연장에서요. 데뷔 40주년 헌정 앨범에 참여한 게스트 뮤지션과 함께 모이면 난리가 날 텐데 말이에요.(웃음) ?
평소 목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따로 안 해요. 목소리 관리는 다른 게 아니라 건강관리, 체력 관리인 것 같아요.?
그럼 건강관리는 하세요? 운동이랄까? 운동? 아, 나 팔운동 해요. 맥주 마실 때.(웃음) ?
이런 질문 많이 받아보셨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에게 ‘행복의 나라’는 어디인가요? 먼 곳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에요. 자기 안에 있거든. 그래서 난 요즘 양호를 보살피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서로 사랑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과예요. 내가 부모의 부재라는 고통과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몇 배로 더 행복해요. 늘 풍족하게 누리며 살아온 사람은 죽어도 못 느낄 거야. 아니, 느낄 수가 없지.
에디터 |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 김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