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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애매한, 그러나 현명한 이름

LIFESTYLE

이헌정이란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건 세라믹 소재의 아트 퍼니처지만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그를 정해진 틀 안에 가둘 수 없고, 그저 편하게 머무를 생각도 없다. 그는 이제 다시 새로운 여행을 떠날 참이다. 그 여정에서 그의 이름 앞에 또 얼마나 길고 애매모호한 수식어가 붙을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그게 무엇이든 현명한 예술가의 궤적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이헌정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6~7년 전쯤, 서미갤러리의 전시를 통해서였다. 그가 만든 가구의 소재는 특이하게도 세라믹이었다. 세라믹은 작은 화병 같은 오브제나 그릇이 전부라고 생각한 건, 가구에 꼭 기능적 소재를 사용해야 한다는 건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아마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에 서 있는 그의 작품을 접한 많은 이들이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거다. 그 독특한 예술적 미감에 감동한 건 비단 국내 관람객만은 아니었다. 지난 2009년 아트바젤 페어에선 서미갤러리를 통해 선보인 그의 아트 퍼니처를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가 구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계적 건축가 노먼 포스터와 인도의 유명 작가 수보다 굽타도 그의 벤치와 테이블을 구입했다.

그리고 지난 3월 말, 박여숙화랑에서 그의 26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이전 세라믹 작품에 손으로 10회 이상 칠해 색을 올린 옻칠과 섬세하게 새겨 넣은 나전으로 변화를 준 작품을 선보였지만, 그건 단지 그의 자연적 감성과 예술 세계를 넓히기 위한 새로운 학습이자 여러 가지 시도 중 하나라고 했다. 도자기를 뒷전으로 미루고 옻칠 작업에 몰두한다거나 그쪽으로 전환하려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유난히 눈길을 끈 달항아리도 새로운 시도다. 전형적인 달항아리의 생김새와 달리 일그러진 달항아리는 장난스러워 보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또한 그저 단순히 위트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내가 만든 일그러진 달항아리에 대해 전통을 현대화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전통의 재해석, 현대화에 대한 사명감 같은 건 없습니다. 그 고유의 가치를 존중할 뿐이죠. 우리 역사 속 도자기나 건축 문화는 한 사람의 천재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순간이 아니라 세월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가치고, 그 시대의 문화가 만든 결과물이죠. 달항아리의 선은 오랜 시간 완벽함을 추구하다 어느 순간 무심하게 놔버리고 자연의 일부가 된 흔적입니다. 만약 현대 예술가가 달항아리를 똑같이 만든다 해도 그만한 감동을 줄 수 있을까요? 옛 선조들이 표현한 것을 그대로 흉내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보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본질과 상징성을 찾아내야 합니다. 예술의 힘은 그 속에서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는 자신의 작업과 작품을 ‘여행’에 비유한다. 지난 전시의 타이틀도 ‘26번째 여행-손’이었다. 실제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에게 여행은 단순히 어딘가로 떠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태생적으로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 한 가지만 계속하는 것을 못 참는다고 했다. 학교 다닐 때도 선생님에게 한 가지를 진득하게 못한다는 잔소리를 들었을 정도다. 그건 그 자신에게도 큰 딜레마였다. 미술 작가로서 이헌정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를 확립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쿠사마 야요이의 ‘땡땡이’처럼. 그러다 어느 순간 정체성이라는 것이 꼭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 ‘돌아다니는 것’도 그만의 정체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돌아다니는 것으로 끝나면 막연한 방황이겠지만, 다시 돌아올 곳이 있을 때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최근 깨달았어요. 귀환할 곳, 미술 활동에서는 도자기고 삶에선 가정이죠.”

여행은 채우기 위한 준비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는 아무 의미 없이 떠나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세상에서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 깨치고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갈했다. 그런 그에게 여행이란 비단 짐을 꾸려 어딘가로 가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나에겐 옻칠 작업도 하나의 여행이에요. 내가 머물러 있던 도자기에서 벗어나는 거니까. 도자기, 가구, 옻칠… 작업 기술이나 리듬이 다 다르거든요. 그러다 다시 도자기로 돌아오곤 하죠. 꼭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머물던 사회적 공간에서 빠져나와 다른 걸 시도하는 것도 여행입니다.”

1 박여숙화랑에서 선보인 전시 작품
2, 3 양평 작업실의 항아리 오브제와 회화적 드로잉 소품

그는 요즘 6월에 열릴 아트바젤 페어를 위해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역시 가구를 만들고 있지만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가구와 오브제의 경계에 서 있는 이번 작품은 기능적인 것보다 오브제에 좀 더 가깝다. 보는 사람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기능이 사용자에 의해 결정되는 그의 새로운 오브제는 의자나 테이블로도 쓸 수 있고 혹은 조각품으로 볼 수도 있다.

“지난 10년간 내 작품을 접한 관람객이 ‘저런 가구도 있구나’ 하며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거기서 좀 더 변화해도 큰 무리가 없지 않을까 싶었어요. 말하자면 작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점이죠.”

이를테면 이제 곧 제작에 들어간다는 플랜터는 일반적 화분 형태와는 다르다. 큰 덩어리에 구멍을 뚫어 연못처럼 만들고 이끼만 올려놓게 한 것이다. 큰 덩어리에 비해 아주 적은 꽃이나 식물을 심게 한 이 플랜터는 그의 표현을 빌리면 ‘기능적으로 불합리한 형태’다. 어쩌면 이 작품을 보고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싶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게 필요하다고 여겼다.

“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편리함이 아니라 불편함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편리함이란 삶에서 높은 가치는 아닌 것 같아요. 선진화된 사회일수록 일상 속에서 불편함을 발생시키는 것을 즐기는 경우가 많아요. 미국인의 주택에 가보면 주차장에 공구를 다양하게 갖춘 것을 흔히 볼 수 있거든요. 차를 직접 고치기도 하고, 뭔가 손으로 만지고 만드는 걸 즐기죠. 좀 더 불편함을 즐길 줄 아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예술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수학적 계산에 의한 논리나 편리함이 아니라 불편함에 대한 갈등을 이겨내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작업을 끝낸 후 그는 오랜만에 긴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한 달간 미국의 유타, 네바다 등 여러 주를 차와 자전거로 여행할 거라고 했다. 그 후 나머지 한 달은 현지에서 작업하면서 미술뿐 아니라 문학, 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가 모여 서로의 퍼포먼스를 보고 협업도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계획이다. 아마 이 여행이 새로운 시도의 가능성을 넓혀줄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도자기나 가구, 건축 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의 새로운 호기심이 어떤 모습으로 표현될진 아직은 그 자신도 알 수 없다.

“한번 호기심이 발동하면 거기서 뭔가 구체화해 표현하기까지 한 10년은 족히 걸려요. 오래 고민하지만 그런 만큼 선택은 명쾌하게 하는 편이에요. 이것저것 재거나 분석해서 결정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판단해요. 선택의 길이 둘 이상일 때 갈등하게 마련인데,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취하면 다른 하나는 미련 없이 놔버립니다.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어요. 주저하는 순간 에너지가 분산되거든요. 내 선택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거죠. 범죄가 아닌 이상 잘못된 선택은 없다고 생각하고, 그 선택에서 가치를 찾습니다.”

그는 두려울 게 없다고 했다. 옻칠 작업을 하면서 옻칠의 대가가 되겠다고 섣부른 의욕을 불태우지 않고, 도자기를 통해 돈을 벌거나 대단한 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취미로 접근하고, 새로운 시도 자체를 즐길 뿐이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현명함이란 그런 것이다. 민첩한 순발력과 논리적 근거에 따른 결정이 중요한 비즈니스맨과는 정반대인, 곰같이 느린 호흡의 현명함. 그는 후배들에게도 욕구가 많고 빨리 이루고자 하는 이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원하는 길에서 되레 멀어질 수 있다고 조언하곤 한다.

도예가나 디자이너, 아티스트라 불러도 부족함이나 어색함이 없는 그에게 어떤 수식어가 붙길 원하는지 묻자, ‘길고 애매하게’라는 명확하지 않은 답이 돌아왔다. “이를테면 이런 거요. 도예를 하는 것 같지만 가구도 만들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 명확한 직함보다는 애매한 경계 위에 서 있는 게 좋아요. 경계를 파괴하고 경계의 가치를 만드는 사람, 일반적 틀을 허물고 재조합해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스스로 지적하듯 40대 후반에 들어선 그는 아마 지난 10년처럼 육체적 치열함을 보이진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화적 충돌을 통해 새로운 치열함에 집중하는 게 필요한 시기다. 그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난 시간과 현재의 위치를 되돌아보며 훌쩍 여행을 떠날 줄 알고, 거기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새로운 가치를 찾는 그의 이름은 여전히 길고 애매하게 붙을 수식어가 무한한, 이헌정이기 때문이다.

에디터 이정주(프리랜서)
사진 박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