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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종상가, 무엇이든 만들어드립니다

LIFESTYLE

길종상가는 제3의 창작 모델을 운영 중이다. 이들의 활동에는 귀여운 구석이 차고 넘친다. 기존 시스템을 적절히 비트는 유머 감각도 충만하다. 고객의 주문에 따라 무엇이든 만들 준비가 된 그들을 그룹의 아지트와 다름없는 이태원 보광동의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젊은 창작 집단을 상상하면 어디선가 혁명의 냄새가 난다. 공동의 이상적 목표를 향해 돌진하거나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모습이 그려진다. 하나가 아닌 둘, 셋, 넷이 힘을 합쳐야 할 수 있는 실천. 그래서인지 문화 예술계에서 ‘컬렉티브’ 프로젝트는 전 세계적 현상이 됐다. 박길종, 김윤하, 송대영이 모인 길종상가의 매력도 ‘공동’ 작업의 특수성에서 출발한다. 그들의 상큼한 감각이 궁금한 독자라면 에르메스 신라 호텔 매장으로 ‘산책’을 가보자. 길종상가는 에르메스의 윈도 디스플레이를 만화의 한 장면으로 변신시켰다. 파이프 담배를 태우는 중절모 신사, 치마 입고 뾰족구두를 신은 여자의 경쾌한 발걸음, 우산을 들고 첨벙 소리가 들리도록 물웅덩이를 밟기 직전의 거대한 인체 형상을 만화에서처럼 검고 굵은 선으로 표현했다. 적재적소에 재치 있게 배치한 에르메스의 각종 봄 신상품이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어디라도 산책을 떠나고 싶은 충동이 꿈틀거린다.

왼쪽부터_ 길종상가의 송대영, 박길종, 김윤하. 그들 뒤에 놓인 ‘삼색 파티션’은 타공판·거울·철망 3가지 재료를 3가지 색상으로 제작, 분리해서 사용할 수 있다. 옷이나 물건을 걸어두거나 거울을 볼 수 있다.

신개념 고객 맞춤 서비스
길종상가의 첫 출발은 미미했지만 동시에 창대했다. 201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별다른 약속이 없던 박길종은 자신의 이름을 따 ‘길종상가’라는 홈페이지를 열었다. 실제 상점은 없었지만, 원대한 포부를 담았다. 훗날 “세운상가나 낙원상가처럼 커지거나 한국은행처럼 현금이 많아지길 기대하며 붙인 이름”이었다. 물론 그 바람은 지금도 변함없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이태원 주변에서 버려진 물건을 가져다 솜씨 좋게 새 물건으로 탈바꿈시키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재활용 아티스트’, ‘박가이버’, ‘홍반장’ 같은 수식이 붙은 청년 사업가로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길종상가가 그룹의 꼴을 갖춘 건 그 이듬해. 박길종의 제안으로 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한 김윤하와 음악을 하던 송대영이 합류했다(다른 원년 멤버 류혜욱은 작년에 그룹을 떠났다). 그 후 1년간 인터넷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마침내 2012년 3월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 근처에 오색 리본을 자르며 ‘길종상가 실제 상가’를 열었다. 운영 방식은 실제 상가를 빼닮았다. 가·나·다·라동으로 멤버의 활동 영역이 나뉘어 있고, 호수도 붙어 있다. 가동에선 주로 가구 제작을 하는 박길종이 ‘가공소’, ‘간다 인력사무소’, ‘걷다 사진관’ 등을, 나동에선 음악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는 송대영이 ‘영이네’를, 다동에선 식물을 키우고 조명 장치를 고안하는 김윤하가 ‘다있다’를 맡고 있다. 라동은 공연과 토크쇼, 맛있는 음식 먹기를 결합한 ‘듣거나, 말하거나, 마시거나!’라는 행사와 교육 프로그램 ‘길종 직업학교’로 구성했다.
길종상가의 최근 프로젝트 ‘산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에르메스의 올해 테마인 ‘플라뇌르 포에버(Flaneur Forever)’에서 영감을 받았다. “에르메스의 테마에 맞춰 산책하는 사람을 컨셉으로 잡았어요. 바람이 불어도, 햇살이 비춰도, 비가 와도,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거죠.” 박길종이 웃으며 말했다. 칸칸이 나뉜 쇼윈도의 구조를 보며 흑백 신문의 4컷 만화를 떠올렸고, 각 섹션의 구성도 만화의 클로즈업 장면을 차용했다. 옛 만화의 프린트 망점과 유사한 알록달록한 실크스크린 배경막도 만화적 상상력을 더한다. “길종상가가 함께 아이디어를 내고 마지막까지 함께한 작업이에요. 작년 6월에 플라토에서 열린 전시 전까지도 각자 잘하는 영역을 맡아 따로 또 같이 작품을 완성했거든요.” 홍일점인 김윤하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길종상가가 에르메스와 윈도 디스플레이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신반의했다. 빨·노·파 등의 원색을 포인트로 사용한 가구,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과일 모형을 활용한 레디메이드 조명, 꽃무늬가 가득한 복고풍 원피스, 털실을 꿰어 만든 화분 등 길종상가에서 발표한 ‘작품’과 에르메스 ‘제품’의 이미지 간극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길종상가와 에르메스의 협업에 ‘과연!’이라는 기대가 컸다. 잭슨 홍, 배영환, 지니 서, 이지영, 김진식, 플라잉시티 등 그간 에르메스의 윈도 디스플레이를 맡은 작가의 면면을 살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에르메스 코리아 관계자는 브랜드의 테마에 안성맞춤인 컨셉은 물론 프로덕션 과정에서 길종상가가 보여준 프로다운 모습에 크게 만족했다. 고객의 의뢰에 따라 컨셉을 정하고 제작 조건에 최적화한 작품 혹은 제품을 제작해온 그들의 고객 맞춤 서비스가 빛을 발한 순간이다.

<스펙트럼-스펙트럼>전에 출품한 ‘아 귀에 걸면 다르고, 어 코에 걸면 다르다’

에르메스 신라 호텔 매장의 윈도 디스플레이 작업 ‘산책은 계속되어야 한다’의 설치 작품과 스케치 작업

‘아 귀에 걸면 다르고, 어 코에 걸면 다르다’
길종상가는 미술이냐, 디자인이냐, 공연이냐 같은 경계 짓기에 크게 개의치 않는 새로운 유형의 창작 집단이다. ‘전방위 생계형·시장형 작가 그룹’에 가깝다. 주문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구, 조명, 식물, 직물 등을 맞춤 제작해주고 적절한 가격을 받는다. 인물 촬영을 위해 창고에서 빼온 ‘삼색 파티션’의 가격을 묻자, “에르메스보다 싸고, 이케아보다 몇 배 비싸다”라고 송대영이 재치 있게 답했다. <스펙트럼-스펙트럼>전에 길종상가를 추천한 작가 김범은 이들의 활동이 미술가의 현실적 문제를 상기시키며, 유연하게 작업하고 생존하며 발전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고백했다. “정작 저희한테 어디에 속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활동에 제약이 없어서 오히려 편합니다.” 박길종의 말처럼 작업도 활동 유형과 같은 맥락에 놓인다. 작품이냐, 아니냐는 순전히 쓰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고 너스레를 떤다. 길종상가 스타일의 세련미 그 정점을 보여준 ‘아 귀에 걸면 다르고, 어 코에 걸면 다르다’는 미술관에서는 작품으로, 전시장을 떠나서는 자유롭게 해체해 실용적인 디자인 가구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총괄부관장 홍라영이 작품과 유사한 테이블을 따로 주문했을 정도로 매력이 넘친다.
길종상가는 또 다른 전환점을 모색 중이다. 어떤 재료를 쓰고 어떤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할 것인지, 그리고 초기부터 계획한 20~30대를 위한 라이프스타일 잡지도 만들고 싶다. 현재 문을 닫은 ‘길종상가 실제 상가’와 완전히 다른 형식의 가게도 고민 중이다. “장소 선정부터 내부 인테리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모든 것에 길종상가가 개입한 새 공간을 구상하고 있어요.” 김윤하가 포부를 밝혔다. “우린 균형을 잘 맞추는 게 중요해요. 어디에 편입되지 않고, 새로운 일을 펼치면서 행복하게 사는 거죠.” 길종상가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묻자 박길종이 답했다. 다른 멤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올봄, 공간에 색다른 변화를 주고 싶다면 길종상가에 무엇이든 의뢰해보자. 그들의 미묘한 균형 잡기에서 탄생한 흥미로운 작품이 당신에게 ‘행복’의 순간을 선물할지도 모른다.

에르메스 신라 호텔 매장의 윈도 디스플레이 작업 ‘산책은 계속되어야 한다’의 설치 작품과 스케치 작업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사진 이영학(인물)  사진 제공 에르메스 코리아, 삼성미술관 플라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