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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ARTNOW

아름다움은 정형화된 공간이나 경계 안에 머물지 않는다. 울타리도, 정해진 방향도 없는 ‘길 위에서’ 만나는 정체성과 감각의 조우, 그 순간이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울림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독립 큐레이터로서 걸어온 길에서 발견한 그 빛나는 순간들에 대하여.

2023년 이상엽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 〈마음속〉. 양복점으로 운영되다 빈 가게가 된 후암동 봄바니에 뉴욕에서 진행했다.

수단아카이브스의 ‘Come Meh Way’ 뮤직비디오 장면.

올해 상반기 두 명의 여성 음악가가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4월에 네마시스 (Nemahsis), 7월에는 수단 아카이브스(Sudan Archives)의 음악을 우연한 경로로 접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국적을 가졌다. 네마시스는 팔레스타인계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 가수고, 수단 아카이브스는 미국 오하이오 출신 바이올린 연주자 겸 가수다.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연결 고리는 없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평행선 끝에서 만나는 교차점을 마음에 그렸다. 그것은 정체성과 감각이 결합되며 발생하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정체성과 감각, 두 단어의 결합은 어떻게 나타나 무엇을 발생시킬까? 네마시스는 히잡을 쓰고 노래하는 현재까지 유일한 팝 가수고, 수단 아카이브스는 바이올린의 기본 연주법을 토대로 아프리카 전통악기를 다루듯 바이올린을 만지고 연주한다. 정체성과 감각으로 결합된 두 음악가가 향하는 길은 음악의 긴 여정 가운데 잘 포장된 도로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군분투 끝에 놓치지 않고 찾아내 첫발을 디딘 자유로움으로 향하는 길 없던(아닌) 길이다. 가령 한 가수가 그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어느 시점에 주류 세계와 맞닥뜨릴 때, 그는 다음 단계의 진입 앞에서 자기 존재의 타협을 요구받는다. 여기서 타협이라 함은 자신의 피와 국적, 곧 정체성을 흐리거나 뭉툭하게 깎아내도록 요구받는 방식이 되곤 한다. 이 기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기로 정할 때, 그가 받은 압박만큼, 또는 그에 비견할 만한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다른 형태의 힘이 그를 둘러싸기 시작한다. 한 존재의 고유한 감각과 앞선 유혹과 고통 속에 지켜낸 정체성이 만날 때 형언할 수 없는 고귀한 아름다움이 발생한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네마시스의 ‘Stick of Gum’(2024)과 수단 아카이브스의 ‘Come Meh Way’(2017) 뮤직비디오를 이어서 보기를 권한다. 다른 국적,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두 사람은 각자의 이야기를 노래하지만, 그들을 편안하게 둘러싸는 사람들, 장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존재감이 드러나는 순간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활짝 열리는 문처럼, 음악가 자신뿐만 아니라 보고 듣는 사람들까지 자유로워지게 한다. 네마시스, 수단 아카이브스는 온갖 야생화가 가득 핀 거칠고, 동시에 아름다운 들판을 평행선처럼 달리다, 그 길에서 감상자인 나의 눈과 귀를 교차점 삼아 우연한 방식으로 조우한다.

2023년 플레이스막 방콕에서 열린 전시 〈Subtle Body〉 장면.

전시 〈이탤릭체 시간〉이 진행된 남산도서관.

앞서 두 음악가에 대한 긴 감상을 나눴지만, 실상 전시 기획자라는 직업을 가진 나는 음악보다는 시각예술을 주 매체로 다룬다. 두 음악가의 이야기가 내가 하는 미술, 내가 만드는 전시와 어떻게 맞닿을까? ‘정체성과 감각’은 내가 전시를 만들 때 지키고 싶은 중요한 무언가다. 나는 정체성과 감각이 결합해 발생시키는 힘을, 그것이 향하는 방향을 본다. 자신의 정체성을 무기 삼아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자신의 멋들어진 감각을 자랑하는 것을 넘어 그걸로 무엇을 할지, 누군가를 위해 쓸지 더 알고 싶다. 이 꿈같은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미술 기관이나 갤러리에 소속되지 않고 일하는 나는 이른바 독립 기획자다. 독립 기획자로서 내가 놓인 상황에는 주변을 둘러싼 울타리도, 손에 쥐여진 정해진 길이 표시된 지도도 없다. 주어진 하나의 이정표가 있다면 ‘울타리 없음, 정해진 길 없음’의 표시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방으로 난 길을 탐험한다. 어떤 때는 길이 아닌 곳을 길처럼 가본다. 그러다가 네마시스를 만났고, 수단 아카이브스도 만났다. 앞선 만남처럼 그건 꼭 얼굴을 마주해야 가능한 만남이 아닐 때도 많다. 나는 길 아닌 길을 걸으며 다음을 열어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것이 내게는 정체성과 감각이 결합되는 방식이고,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팔레스타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oud Darwish, 1941~2008)의 말처럼 “정체성이 요새나 참호가 아니라 복수성으로 열리는 곳”, 나는 그 꿈같은 곳을 찾아 나선다. 그간 나는 전시 기획자로서 장소를 찾아 나서는 일을 자주 해왔다. 새하얗게 비워진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가 득실거리는 곳을 향해 걸었다. 살아 있는 생명이 머물던 장소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모든 장소에 그에 걸맞은 이야기가 있다. 나는 도시 한복판에 솟은 남산의 사계절을, 피서객으로 들끓는 여름 바다를, 20년간 운영하다 문닫은 양복점을, 다른 나라의 비어 있는 전시장을, 도서관을, 목욕탕이다 전시장이 된 곳을, 한때 대사관저로 쓰던 주택을 전시장 삼아왔다. 지난 기획 전시는 각 장소의 이야기를 덧입고, 또 새로운 이야기를 덧대며 펼쳐졌다. 나는 왜 이런 일을 벌일까? 그저 그게 나이기 때문이다.

사계절 남산둘레길을 따라 작품을 설치한 〈살아 있는 관계〉 여름 전시 전경.

네마시스의 〈Stick of Gum〉 앨범 커버.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 1844~1889)는 이런 시를 썼다. “모든 피조물은 한 가지 같은 일을 하나니, / 제각기 내면에 거주하는 제 존재를 밖으로 내보낸다. / 자아들은 스스로 움직여서, 나 자신을 말하고 쓴다. / 내가 하는 것이 나이며, 그 때문에 내가 왔노라, 외치면서.” 홉킨스의 사유에서 단서를 얻어, 독립 기획자로서 내게 주어진 취약한 상황이자 불안정적 조건인 ‘울타리 없음, 정해진 길 없음’은 내가 나로 살 수 있게 하는 멋진 장치가 되기도 한다. 내가 나일 수 있음은 다른 사람을 비추거나 흘려보낼 수 있는 무언가로 발현된다. 내가 나이듯, 그들도 그들일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진 물 같은 것으로. 이것이 내가 독립 기획자로서 가려는 길이자, 이따금 길 위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이다.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이상엽(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