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주의 즐겁고 외로운 여행
김영주는 나이 마흔이 넘어 비로소 첫 배낭여행을 떠났다. 휴가까지 반납하며 일해온 지난 20년을 정리하는 그 여행에서 그녀는 꼭 봐야 할 것들을 보았다.
김영주는 지난 9년간 모두 8권의 여행 책을 냈다.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여러 잡지사에서 기자와 편집장, 본부장을 거치며 문화와 패션을 아우르는 트렌드세터로 시간을 보내다, 어느 해 문득 앞으로는 출퇴근과 사업계획서가 없는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다짐으로 낸 ‘제2의 인생에 던지는 출사표’가 그렇게 쌓인 것이다.
2006년 캘리포니아에 몇 달을 현지인처럼 머물며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쓴 <캘리포니아>를 시작으로 그녀는 그간 토스카나, 뉴욕, 프로방스 등을 다녀와 해마다 한 권씩 책을 냈다. 잡지사에 있을 땐 보도자료에서나 접한 총 운전 거리 4000km의 미국 서부 지역(뉴멕시코-애리조나-네바다-캘리포니아)을 몇 달간 달리고 돌아왔는가 하면, 기원전 5세기의 도리스 양식 기둥이 버티고 있는 7세기에 지은 대성당에서 12세기에 만든 대리석 성수반의 물을 묻혀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리는 ‘백 투 더 퓨처’급 경험을 직접 해보기도 했다. “사람이 불혹을 넘기니 한 번쯤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일반적으로 여행 하면 휙 갔다 오는 건데, 저는 첫 책을 내던 당시부터 가능한 한 여행지에 오래 머물며 현지인과 비슷한 경험을 하려 했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삶인데 그런 것도 재미있잖아요.”
그래서일까, 그녀의 책은 분명 여느 여행 책과 다르게 읽힌다. 여행하고 썼으니 여행 책인데, 요새 사람들이 좋아하는 매력적인 숙박 시설이나 맛있는 식당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현지의 유명 맛집도 “접시를 싹싹 긁어가며, 손가락 쪽쪽 빨며 먹었다” 정도의 묘사로 끝낸다. 그 대신 여행하면서 느낀 단상이나 감정은 세밀하게 표현했다. 바스러질 것 같은 감성으로 써 내려간 어떤 문장은 아예 소설 수준이며, “아찔한 절벽을 지나 꽃이 만발한 국도를 따라가면 맛있는 커피를 파는 노부부가 산다”는 식의 담박한 식당 소개는 그곳이 설령 지구 반대편에 있을지라도 당장 찾아가 보고 싶게 만든다. “여행은 일단 어디를 가든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잖아요. 평소 하던 것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다르게 생각하려고 하니까 책도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여행에선 사실을 기록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감정 기록이에요. 뭔가 하나를 본 후 느끼게 되는 ‘왜 갑자기 주저앉고 싶지?’, ‘왜 울고 싶지?’ 같은 순간의 감정을 꼼꼼히 메모해 나중에 책으로 옮기는 거죠.”
물론 그렇다고 이제까지 그녀의 여행이 모두 소설처럼 아름다웠다는 건 아니다. 여행을 처음 시작한 2005년 무렵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막막했다. 외지에서 혼자 오랫동안 밥을 먹다 보니 공황장애가 찾아왔고,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보름 이상을 보내며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혼자 하는 여행엔 분명 묘한 기쁨이 있어요. 누구한테 의견을 물을 것도, 신경 쓸 것도 없고, 컨디션이 안 좋으면 온종일 방에 누워 있어도 되죠. 단, 그런 건 모두 어느 정도의 익숙함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해요. 오랫동안 도시 생활을 해온 이라면 혼자 하는 긴 여행에서 분명 무언가를 겪기 마련이죠.”
고흐가 본격적으로 화가 생활을 시작한 네덜란드의 누에넨
2013년, 그러니까 지난 한 해 그녀는 매년 한권씩 내던 여행 책 발행을 쉬었다. 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학교에 갔다. 서울 시내 한 대학의 평생교육원이었다. 그간 미술대학(이화여자대학교 장식미술학과)을 나왔음에도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며 미술을 소홀히 한 자신에게 스스로 공부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한데 애초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찾은 수업에서 그녀는 큰 흥미를 느꼈다. 6개월간 하루도 수업에 빠지지 않아 개근상까지 받았다. “미술사에 등장하는 화가들에 얽힌 이야기에 대한 수업이었는 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어요. 특히 제가 빠진 건 인상파 화가들이었죠. 1870년대부터 얼마 되지도 않는 화가들이 집중적으로 미술사에 등장하는데, 그들이 일군 일련의 ‘투쟁사’가 제 마음을 흔들었어요.”
프랑스 루앙 대성당 맞은편에 위치한 모네의 작업실
모네에게 늘 영감의 원천이었던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에트르타 해변
그녀가 인상파 화가들에게 빠진 지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인류의 미술사에서 화가로선 최초로 다른 집단과 싸움을 시작했다는 점(고급스럽지 않은 (계급의) 일상을 투박하고 거친 터치와 화려한 색채로 표현했음), 어떤 화가 집단보다 인간적이었다는 점(빛과 색의 과학적 이론보다 화가 자신의 신비한 체험과 감흥을 우선시해 그렸음),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그간 다룬 귀족의 초상화, 성화, 종교화, 역사화 대신 거리의 일상과 사람을 그렸음)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교육원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여행 계획을 세웠다. 인상파 화가들이 살던 곳을 찾 아 여행이 주는 우연성의 묘미와 감성의 자유를 느끼고 오기로 한 것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해 프랑스 지베르니에서 끝나는 일정으로 여행을 다녀왔어요. 역시 수개월이 걸렸죠. 모네가 40대가 되어 머물기 시작한 프랑스 노르망디의 해변 마을 에트르타(Etretat)의 절벽에선 모네의 어떤 외로움을 발견하기도 했고, 반 고흐가 죽은 파리 북쪽의 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 Sur Oise)의 밀밭에선 그가 죽기 직전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생각하며 펑펑 눈물을 흘렸죠. 그런 경험을 모두 모아 책으로 펴낸 게 바로 최근에 나온 <인상파 로드, 빛이 그린 풍경 속을 걷다>예요.”
이쯤 되니 그녀에게 궁금해지는 한 가지. 그녀는 현재 하고 있는 여행을 ‘일’로 생각할까, 순수한 ‘여행’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사실 저도 그것에 대해 자주 고민해요. 이제껏 8권의 책을 냈고, 모두 책을 펴내기 위한 계획적 여행이었으니까요. 지금껏 흥미롭다고 여긴 여행지를 책과 연결하지 않고 다녀온 경험은 없어요. 그런데 거기엔 이 생각도 있는 것 같아요. 어디 좋은 데 다녀오면 꼭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책을 쓴다는 거죠. 그래서 앞으로 제 고민은 이런 게 될 것 같아요.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으면 이런 고민은 과연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바로 고민의 고민인 거죠. 어쩌죠, 여행이 이렇게 즐거운데?”
인터뷰 말미, 그녀는 책에서 읽은 구절이라며 카뮈의 문장을 인용했다. 카뮈는 그녀의 목소리로 여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행은 결코 즐겁자고 떠나는 게 아니다.” 물론 그녀가 전한 그 문장은 카뮈가 한창 시큰둥한 시절에 쓴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거기엔 자‘ 신을 돌아보는 것이 바로 여행의 진정한 묘미’라는 숨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외로움도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감정이라고 말하는 김영주의 다음 여행지는 아마 동유럽 어딘가가 될 것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보라(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