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꽃이 절로 피지 않듯이

LIFESTYLE

나눔은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온다. 돌아오는 형태만 다를 뿐 ‘돌아온다’는 사실은 ‘나눔’의 태생적 의미라 누구도 거부하거나 거스를 수 없다. 히말라야 고산 등반을 위해 네팔을 찾던 산악인 엄홍길은 어느덧 9년째 엄홍길휴먼재단의 상임 이사로 네팔을 찾고 있다. 22년간 히말라야의 신에게 받은 특별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다.

지난 2008년, 5월의 햇살이 창을 통해 가득 들어오는 한 사무실에서 엄홍길 대장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국경을 넘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후원, 기부 활동을 펼치는 사람들과 기관을 취재하는 중이었는데, 마침 플랜코리아 홍보대사를 맡고 있던 그와의 인터뷰가 성사된 것이다. 그는 2007년 로체샤르 등정 후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미터 고봉 16좌 완등’이라는 최고의 타이틀을 얻었지만 “이제는 인생의 17좌를 오를 때”라면서 비영리 후원 재단 ‘엄홍길휴먼재단’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엄홍길 대장이 재단 설립을 구상한 가장 큰 이유는 16좌를 오른 22년간 히말라야 설원에서 잃은 동료와 그들의 유가족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8000m 14좌 완등에 성공한 그는 위성봉 중에도 독립성이 강한 얄룽캉(2004년)에 이어 2007년 로체샤르까지 올라 16좌를 완등했는데, 그동안 옆에서 그를 도운 셰르파 등 10명의 동료를 잃었던 것. 무엇보다 1985년 9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원정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이듬해, 다시 그곳을 등정하던 중 그의 눈앞에서 셰르파 술딤 도르지가 1000m 아래 절벽으로 추락해 사망한 일은 그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 후 엄홍길 대장은 동료들이 불의의 사고로 떠날 때마다, 그리고 남아 있는 동료들을 이끌고 다시 정상을 향해 오르며 생과 사의 기로에 설 때마다 히말라야의 모든 신에게 기도했다. “살려서 내려보내주신다면 이 산과 이곳의 사람들에게 보답하겠습니다.”
엄홍길 대장은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하고 2009년 네팔에 학교를 짓는 프로젝트 ‘엄홍길휴먼스쿨’의 첫 번째 학교를 술딤 도르지의 고향인 팡보체 마을에 지으면서 히말라야의 신에게 한 약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16좌를 완등해, 목표로 세운 학교도 우선은 16개. 엄홍길휴먼재단은 현재 12개 학교와 병원 한 곳을 완공했고 3개의 학교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16번째 학교 건립은 아직 후원자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 설계도는 이미 완성되었다. “수도 카트만두 근처에 부지를 마련해 초·중·고교와 학교를 짓는 거예요.” 비용도 수고도 몇 배가 되겠지만, 세 번 도전 끝에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해 마주한 몽골과 네팔의 아름다운 광경에 감동한 그 시간을 생각하며 엄홍길 대장은 이제 산 아래의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한다.

1 1차 팡보체 휴먼스쿨.   2 쿰부 남체 엄홍길휴먼재단 병원. 사진 중앙에 위치한 건물이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16좌 등정’을 마치신 게 2007년 5월 31일입니다. 그다음 해에 바로 엄홍길휴먼재단을 세우셨는데 지난 9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16좌 등정까지 22년 동안 히말라야 8000m 고지에서 생사를 오가는 사투를 벌이며 육체적 노동을 해왔다면 지금은 엄홍길휴먼재단이라는 ‘인생의 17좌’를 오르며 정신적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재단을 세운 2년 뒤인 2010년 5월 5일에 팡보체 휴먼스쿨을 시작으로 그 후 매년 한두 개씩 진행해 지금까지 12개의 학교를 세웠고, 며칠 전에는 병원도 준공했죠. 재단이라는 것이 완벽히 뭔가 갖춰진 상태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금을 만들어가며 실천하는 일이 대부분이라 그 둘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요. 재단 일 외에는 기업 강연도 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석좌교수로 강의도 하고, 청소년들과 산행도 하며 지냅니다.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은 완전히 다른 일인데 해보니 어떠세요?
히말라야 등정은 육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럽고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위험이 따르죠. 그러나 반대로 내가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산과 내가 일대일로 대면하는 단순한 관계이기도 하고요. 반면 재단 일은 수많은 사람의 만남을 통해 성사되는 거라 그 부분이 많이 어렵습니다.

2008년 5월 28일에 엄홍길휴먼재단이 출범했습니다. 그 당시 파라다이스재단에서 특별공로상 상금 4000만 원을 받으셨는데, 그 기금이 재단의 종잣돈이 되었다고요.
물질적 기반은 상금이었지만 정신적 기반은 히말라야를 등정하면서 잃은 동료에 대한 빚을 갚겠다는 마음에 있었어요. 그들에게 은혜를 갚고 그들의 유족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제 꿈을 이루는 데 동료들이 도움을 준 것처럼요.

그렇지만 재단 설립이라는 것이 의지만으로 이루긴 어려운 일 아닌가요? 설립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선 금전적 뒷받침이 없으면 무슨 일이든 어렵죠. 상금 4000만 원이 정말 큰 힘이 되었고, 재단 설립에 대한 의지를 주변에 피력할 때 십시일반 많이 동참해주셔서 바로 이듬해에 1호 휴먼스쿨이 첫 삽을 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호 학교를 시작하고 나니 2호, 3호, 4호 학교 건립이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더라고요. 후원사를 확보해놓은 것도 아니었는데, 학교를 지어주겠다는 기업이 계속 나섰어요. 그렇게 15호까지 쭉 연결되었죠. 15번째 학교는 대구광역시 초·중·고교 학생과 교직원들이 사랑의 저금통을 통해 마련한 기금 4억 원으로 세웠습니다. 동전으로 지은 학교죠.

재단 설립 후 첫 번째 공식 활동으로 ‘장애 아동과 아름다운 동행’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셨습니다. 첫 행사로 장애 아동과의 행사를 기획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005년에 장애인들과 함께 ‘히말라야 희망원정대’라는 프로젝트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3193m 지점에 위치한 푼힐 전망대를 등정한 적이 있어요. 자연 속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보듬고 하나가 된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아 장애인을 위한 행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분들이 히말라야 등반이라니,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요?
시각장애, 청각장애, 지체장애, 지적장애, 발달장애가 있는 분들과 비장애인을 일대일 멘토링으로 연결해 다녀온 프로그램이에요. 사실 장애가 있는 사람들 스스로 ‘내가 히말라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영상과 사진으로만 보던 히말라야 설산을 직접 오르는 것은 그야말로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그곳에서 본 그들의 모습은 어땠나요?
장애가 있으면 대부분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과 담을 쌓는 경우도 많고요. 그들도 처음 만났을 땐 그랬어요. 그런데 거대한 자연 속에서 산을 오르는 행위를 통해 점점 비장애인과 교감을 나누고 조금씩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하더군요. 무엇보다 스스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큰 변화였습니다.

멘토가 동행했다 해도 등반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나요?
어려웠죠.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고 업어주면서 올랐어요. 목표로 삼은 3193m 정상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다 같이 노래를 부르며 흘린 기쁨의 눈물과 그 감동, 그로 인한 정신적 치유는 산 아래의 일상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일이죠. 이처럼 산이라는 자연이 주는 감동은 어떤 의료 기술보다 치유 효과가 큽니다.

엄홍길휴먼재단은 히말라야 오지의 마을에 사는 아이들과 청소년 지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히말라야를 오르며 오지 마을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의 생활수준은 정말 열악해요. 더 안타까운 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난의 고리를 아이들이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겁니다. 꿈도 희망도 없이 부모님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이걸 끊을 방법은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도 한국전쟁 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지만 50년 만에 강국이 되었잖아요.

2009년 5월 5일에 제1차 팡보체 휴먼스쿨을 기공하고 이듬해 5월 5일 준공했습니다. 큰 공사 차량의 출입이 어려운 오지에 콘크리트로 학교를 짓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나요?
착공식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반신반의했어요. 나중에 들으니 ‘괜히 와서 요란하게 착공식 사진만 찍고 가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쉽지 않았어요. 제가 건축 전문가도 아니잖아요. 현지 공사 팀도 진행에 대해 부정적이었죠.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8000m 산을 오르는 건 과연 쉬운 일이었나. 세상 어디에도 쉬운 일은 없다.’ 그래서 그때부터 산을 오른다는 생각으로 학교 건립을 밀어붙였습니다. 헬기로 자재를 실어 나르고 미니 레미콘을 이용해 콘크리트를 양생하고 그랬어요.

지난 5월 11일에 열린 병원 준공식.

몇 주 전에는 쿰부 남체 엄홍길휴먼재단 병원도 완성했다고요.
히말라야로 오르는 길목에 위치한 마지막 산간 마을이에요. 해발 3440m 정도 되는데, 거기에도 사람들이 삽니다. 사실 히말라야 고산족(셰르파)은 그보다 높은 곳에도 살죠. 그런데 제대로 된 의료 시설이 하나도 없어요. 병원은 고산 지역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었지만, 병원 문을 열고 보니 외지인도 정말 많아요. 히말라야를 오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정말 많은 산악인과 트래커들이 옵니다. 그 정도 높이에서는 누구나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는데, 병원에서 그런 치료를 받을 수 있죠.

선생님이 한창 히말라야를 등반하던 당시에는 그런 의료 시설이 없었을 텐데 그때는 팀 닥터가 동행했나요?
네, 한국에서 의료진이 동행했죠. 그들이 기본적 치료는 하지만 불가피하게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엔 헬기를 이용해 병원으로 이동했습니다.

1998년에 안나푸르나 7600m에서 큰 사고를 당했을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발목이 완전히 부러져 덜렁거리는 상태였는데, 베이스캠프가 있던 4500m까지 동료들과 줄에 의지해 한 발로 산을 내려왔어요. 헬기 구조대가 기다리고 있다가 수도 카트만두로 이송해 기본적 치료를 받고 한국으로 옮겨 대수술을 했죠. 그때 의사 선생님이 “다시는 산에 못 간다.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라” 그러셨는데 수술 후 거의 뼈만 남은 다리로 물리치료를 하고 5개월 만에 북한산에 올랐어요. 그러곤 10개월 만에 안나푸르나에 다시 갔죠.

정말 대단한 도전정신입니다. 선생님은 행군을 통해 국내 청년들에게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을 길러주는 일에도 열심이십니다. 2013년부터 매년 진행 중인 ‘DMZ평화통일대장정’이 대표적인데, 약 120명의 대학생과 16일 동안 행군한다고 들었습니다.
전국에서 선발한 남녀 대학생과 휴전선 350km를 행군하며 조국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안보의식이 해이하고 국가관도 약할뿐더러 애국정신은 더 희미합니다. 우리 기성세대는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를 중시하는 유교사상 안에서 자란 데다 힘들고 배고픈 시기를 거쳤기 때문에 나라의 중요성을 알잖아요.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그런 게 없어요. 정신적·육체적 강인함을 기르고 올바른 국가관을 심어주고 통일을 준비하는 의미에서 매년 그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서류 전형, 체력 테스트와 면접을 거쳐 선정한다고 들었는데, 테스트 과정이 궁금합니다.
오래달리기, 도봉산 등반을 하는데 탈락자 수가 꽤 됩니다. 통과했다 해도 대장정 행군 중 포기하는 학생들도 있고요. 근데 요즘 보면 여학생들이 참 강해요. 물론 행군 초반에는 여학생들이 힘들어하는데, 중반부로 넘어갈수록 그들의 오기와 끈기를 남학생들이 못 쫓아갑니다.

중학교 2학년 학생들과 매달 산에 오르는 프로그램도 진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이 강북구인데 관내에 일반 중학교가 12개 있습니다. 각 학교의 교장선생님께 학교에서 5명씩 추천을 받아 60여 명의 학생을 데리고 1년간 매달 한 번씩 산에 오르고 있어요. 모범생부터 문제아까지 다 섞여 있죠.

질풍노도의 시기의 정점에 있는 중2 학생을 60명이나 데리고 산을 오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그 행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한국 교육은 아이들을 공간 속에 가둬놓고 주입식으로 지도합니다. 오직 경쟁만 부추기죠. 아이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나약해지고, 정서적으로 메말라가는 게 당연합니다. 배려심, 양보심, 희생정신, 동료애 같은 걸 배우지 않으니 단체 생활이나 조직 생활도 잘 못하죠. 산을 오르는 체험을 통해 그런 걸 배웠으면 해서 시작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아이들이 변화하는 게 느껴집니다.

어떤 변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서로 돕고 배려하고, 난관을 만나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도전하죠. 1년간 성실히 참여한 학생 중 가장 잘한 남녀 학생 한 명씩을 선정해 네팔 히말라야에 데려가서 현지의 교육 현실을 보여주는데, 한두 시간씩 걸어 학교에 오는 네팔의 아이들, 그 아이들이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 수업받는 모습을 보고 나면 누구나 충격을 받아요. 대한민국이 정말 대단한 나라고, 내가 사는 곳이 천국이구나 하죠.

요즘 우리 사회의 청년들에게 보이는 가장 큰 문제점은 국가와 사회를 불신의 눈으로만 본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이 진행하는 도전적인 프로그램은 청년의 미래, 즉 나라의 미래를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네, 특히 DMZ평화통일대장정 같은 경우는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일 거예요. 특히 여학생들은 350km 행군을 언제 또 해보겠어요. 극한의 상황에서 끈기를 기르는 그런 체험과 도전을 통해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죠.

재단을 운영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후원 자금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재단 일을 하신 지 이제 10년째를 향해가는데, 좀 수월해지셨나요?
아니요.(웃음) 그런데 다행히도 저희 재단은 대대적으로 홍보하진 않지만 모두 알음알음 후원을 해주세요. 작지만 알차다고 할까요. 벌써 학교를 12개나 짓고 병원도 하나 세웠잖아요. 좋은 뜻으로 함께 나누고 베풀고 봉사하는 희생정신, 그런 상생의 정신을 존중하는 회원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이 모였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 있죠. 그리고 저희 회원들은 ‘남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준 사람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게 우리 재단의 힘인 것 같아요.

국내외에서 매일같이 가슴 아픈 뉴스가 쏟아져 나옵니다. 가정 내 아동 학대, 청소년 자살, 테러 등 선생님이 기조로 삼으신 휴머니즘에 위배되는 것들인데, 점점 확산되고 있는 이런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결국 모두 이기주의에서 오는 겁니다. 나만, 우리 가족만, 우리 종족만 잘 살면 된다는 거죠. 집단 이기주의의 팽배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우리는 TV를 통해 매일 확인합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나눔의 정신, 봉사의 정신, 상생의 정신이에요. 그것에 가치를 둘 때 지구촌이 평화적으로 더불어 잘 살게 됩니다.

네팔에 갈 때마다 다시 히말라야 정상에 오르고 싶으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히말라야를 본격적으로 등정하는 건 5000m 이상을 말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학교를 짓는 마을이 대부분 고산지대에 있기 때문에 늘 3000~4000m까지는 갑니다. 저는 제가 16좌 등반에 성공한 것 자체만으로 히말라야 신이 이미 저에게 엄청난 아량을 베풀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다시 8000m를 오르겠다는 것은 제 욕심이고 신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산도, 인생도 내리막길이 중요합니다. 내려와야 할 때 내려와야 하고 비울 때 비울 줄 알아야 하는데, 계속 오르려하고 채우려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닐까요.

문득 ‘바다는 메워도 사람 욕심은 못 메운다’라는 속담이 생각나네요. 후원이나 나눔도 그렇죠. “지금은 부족하니 더 넉넉해지면 나누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후원, 기부 같은 나눔은 남을 돕는 게 아니에요.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의미에서요. 그건 분명합니다.저를 비롯해 주변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모두 경험자예요. 그런 의미에서 나눔은 더 큰 행복을 얻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만 기억하시면 돼요. 남을 행복하게 해준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이건 진짜예요.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김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