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실은 자동차
해외 굴지의 자동차 기업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국인 디자이너들. 뛰어난 감각과 손재주를 인정받아 주력 모델 디자인에 참여하는 2명의 한국인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이 속한 자동차 세상 그리고 디자인 철학에 관하여.

더 뉴 XC60과 함께 선 이정현 디자이너.
순수하고 정제된 스칸디나비안 디자인
볼보의 주력 모델 XC60이 돌아왔다. 이 차의 출시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2008년 데뷔해 100만 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러가 8년 만에 풀 체인지된 것. 그리고 변화의 핵심인 외관 디자인을 한국인 디자이너가 주도했다는 점.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모델에 새 옷을 입힌 주인공은 2010년 볼보에 입사한 최초의 한국인 디자이너 이정현이다. 건국대학교에서 기계설계학을 전공하고 스웨덴 유학길에 오르며 자동차 디자인으로 전향한 케이스. 그때만 해도 북유럽 디자인은 지금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북유럽 디자인의 심플하고 실용적인 매력에 빠져들었고,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의 대표주자인 볼보 입사를 목표로 유학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손재주가 남다른 터라 온전히 손으로 그린 포트폴리오만 들고 볼보의 문을 두드렸다. “면접도 보지 않고 바로 입사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었죠. 나중에 확인해보니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손으로 그린 제 작업에서 남다른 재능을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스케치 경합을 통해 최종 선택된 디자인.
현재 디자인 센터는 익스테리어와 인테리어 두 파트로 나뉘지만 당시에는 선행 디자인팀과 외장 디자인팀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선행 디자인팀에서 컨셉카의 전면부, 램프 등 디테일 디자인을 비롯해 볼보의 비전을 보여주는 차를 연구했다. 차근차근 볼보의 스타일을 익힌 그는 XC60 프로젝트를 통해 비로소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했다. 이는 스웨덴 본사 디자이너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 지사에 있는 디자이너까지 약 1년간 30여 명의 익스테리어 디자이너가 스케치 경합을 벌인 대형 프로젝트였다. 토마스 잉엔라트 볼보 디자인 총괄 수석 부사장은 그가 그린 초안을 보고 지금까지 상상해온 XC60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더 뉴 XC60의 매력은 선과 면을 통해 완성됩니다. 이 차가 역동적으로 보이는 것은 선의 역할이 커요. 최소한의 선을 사용하되 어떤 방향에서도 다이내믹해 보이도록 연구했죠. 반면, 면은 고급스러워 보이죠. 면과 면이 연결되는 음영까지 고려해 액체금속이 흐르는 듯 만지고 싶은 느낌이 드는 면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이란 덜어낼 수 있을 만큼 덜어낸 순수한 디자인이라고 말하는 그. “선을 많이 넣으면 금방 시선을 끌 수 있고 멋있다고 느끼지만 보면 볼수록 그 매력이 반감됩니다. 제가 추구하는 건 화려하진 않아도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디자인이에요. 그리고 이는 볼보의 디자인 철학과도 맞아떨어지죠.”

벤틀리 익스테리어 디자이너 황호영.
절제미와 비범함을 갖춘 하이엔드 디자인
세계 3대 명차 중 하나로 꼽히는 벤틀리. 소규모 럭셔리 브랜드지만 이곳을 거쳐간 한국인 디자이너가 여럿 있다. 최근 활약상이 돋보이는 인물은 벤틀리 익스테리어 디자이너 황호영. ‘2017 디트로이트 오토쇼’에서 공개한 벤틀리 역사상 가장 빠른 차, 컨티넨탈 슈퍼스포츠의 디자인에 참여한 주인공이다. 최대출력 710마력, 제로백 3.5초의 파워풀한 성능을 지녀 야수의 본성을 감춘 영국 신사 같은 차. 전작에 비해 엔진의 변화가 가장 크다고 하지만 외모도 사뭇 다르다. “최대 과제는 완벽한 균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컨티넨탈 GT보다 역동적으로 보이면서도 점잖은 모습은 유지해야 했어요. 전체적으로 차체를 낮추고 안정적 자세를 취한 것이 포인트죠.” 한국GM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근무하던 시절 벤틀리와 운명적 만남을 가졌다. “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간만의 휴식을 찾은 어느 주말,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였어요. 갑자기 도시 전체를 장악한 듯 웅장한 소리를 내는 커다란 쿠페가 나타났죠. 차는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날카롭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엔진 소리에 심장이 요동쳤어요. 바로 미드나이트 블루 컬러의 벤틀리 컨티넨탈 GT였죠.” 황호영 디자이너는 쿠페가 남기고 간 짜릿한 흥분에 매료되었고, 가속페달을 밟는 것만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디자인의 새로운 길을 찾아 런던의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RCA)로 유학을 떠났고 벤틀리 인터십을 거쳐 익스테리어 디자이너로 채용되었다. “출근 첫날의 기분을 생생히 기억해요. 중앙 문을 통과하며 ‘벤틀리 모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큰 사인을 보고 버스를 기다리다 마주한 파란색 컨티넨탈 GT를 떠올렸죠.”

벤틀리 컨티넨탈 슈퍼스포츠와 황호영 디자이너의 스케치.
현재 그는 벤틀리 모든 차종의 익스테리어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일한다. 차체는 물론 램프, 휠 등 자동차 외형과 관련된 모든 부분을 스케치 단계부터 생산 직전까지 디자인하는 일. 여기까지는 다른 회사와 비슷하다. 그런데 벤틀리에서는 디자이너가 더 많은 일을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황호영 디자이너는 컨티넨탈 슈퍼스포츠를 디자인하면서 엔진 덮개부터 보디 사이드의 데칼과 엠블럼까지 소소한 외장 부품을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다. “보통 큰 자동차 회사에선 이런 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부서가 따로 있어요. 하지만 벤틀리에선 세세한 부분까지 익스테리어 디자이너의 몫이죠. 그래서 제가 맡은 차에 더 집중하고 애정을 가질 수 있어요.” 벤틀리 디자인은 헤리티지를 지키면서 은근한 멋을 풍기는 절제미가 매력. 여기에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 완성한 비범함이 하이엔드 디자인의 가치를 드러낸다고 덧붙인다. “예를 들어 컨티넨탈 GT의 프런트 펜더는 ‘슈퍼포밍(superforming)’이라는 항공 알루미늄 제작 공법을 적용해요. 그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들지만 펜더를 우아한 조각품처럼 만들 수 있죠.” 이뿐 아니라 벤틀리는 우드 트림에 최고급 목재를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페인에서 가져오는 수백 년 된 나무뿌리도 있을 정도다. “현재 새로운 세대를 위한 소재 연구가 한창입니다. 우리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를 위해 20여 종의 동물 가죽을 친환경 소재로 대체할 계획이죠. 단백질과 버섯 그리고 해파리로 만든 식물성 가죽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한 세기 동안 이어온 브랜드의 역사를 계승하면서 창의력을 더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과 소재를 개발해 고객에게 차원이 다른 럭셔리를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하이엔드 디자인이 나아갈 미래라고 밝혔다.
에디터 문지영(jym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