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꿈의 서사

ARTNOW

흑백사진을 캔버스에 그리는 사실주의 화가로 알려진 조덕현 작가는 회화, 설치, 영상 작업을 넘나들며 또 다른 시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과거의 특정 인물을 묘사하며 지나간 시간을 다룰 때에도 그의 작품에는 새로운 서사가 개입한다.

일산에 자리한 작업실에서 신작들 앞에 선 조덕현 작가

Collage of Memory, Graphite & charcoal on canvases, frame, 300×270cm, 2010

Hollywood Epic – Casablanca, Graphite & charcoal on Hanji attached canvas, 112×145cm, 2015

Motherhood, Site specific installation, Graphite & charcoal on canvas/fabric, 172×284cm, 2012

Hommage I, II, Installation of two works facing each other, Graphite & charcoal on canvases/fabric, 244×200×458cm each, 2011

최근 발표한 작품은 기존의 ‘사진 드로잉’과 달리 영화 속 한 장면이 보입니다. 어떤 작업인가요?
기존에 해온 표현 방식에 대해 반문하는 새로운 작업을 꿈꾸는 열망이 항상 있어요. 요즘은 ‘할리우드 에픽(Hollywood Epic)’이라는 제목의 신작을 발표하고 있죠. 작품 속에서 현재의 인물이 다른 시공간에 개입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지난 8월 27일 개막한 일민미술관 전시 <꿈>은 작가님의 다양한 작업을 총망라했더군요. 회고전 성격으로 준비한 건가요?
미술관에서 제안한 게 개인 회고전이긴 했어요. 그래서 이전 작품을 선별해 신작과 함께 전시하기로 했죠. 하지만 단순히 구작들을 나열한 것은 아니고, 서정성을 갖춘 별도의 서사를 부여해 구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최초로 공개하는 신작이겠죠. ‘조덕현’이란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고 들었습니다.
본래 80대에 혼자 살아가다 쓸쓸하게 죽은 독거노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죽은 사람의 일생을 추적하는 거죠. 그러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제 이름을 검색해보니 같은 이름을 쓰는 다른 사람이 여럿 나타나더군요. 영화배우, 은행원, 방송기자 등 직업도 제각각이었죠. 같은 이름으로 저와 정체성의 일부분을 공유하는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여기에 미리 생각해둔 아이디어를 결합했어요. 영화배우 조덕현 씨를 만나 함께 작품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상의 조덕현이란 인물을 설정하고 그의 생애를 짚어보는 겁니다.

가상의 조덕현은 어떤 인물이죠?
20세기 초반부터 후반까지 산, 그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평범한 인물입니다. 작품 속 조덕현은 1950~1960년대 한국 영화에서 조연과 단역을 맡았고 동시에 영화의 스태프로 활동한 경험도 있어요. 이번 신작을 위해 영화배우 조덕현 씨의 얼굴을 촬영한 뒤 그 시절 한국 영화 장면들에 합성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현재의 인물이 과거에 개입해 그 시간을 끌고 오는 거죠.

영화의 장면을 차용해 이미지를 합성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재미있는 시도네요.
제가 왕년엔 할리우드 키드였어요. 몇 년 전부터 흑백영화에 끌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예전 영화들을 보며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한국 영화뿐 아니라 외화 속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턴의 얼굴이나 <프랑켄슈타인>의 과학자가 조덕현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가상의 인물 조덕현의 일생에 걸친 경험과 기억이 판타지로 교차한다는 설정을 했고, 전체적 서사의 흐름은 김기창 소설가와 함께 만들었어요.

아티스트와 영화배우의 협업인 줄 알았는데, 문학인도 가세했군요.
처음부터 문학, 영화, 미술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의도로 시작한 작업이에요. 컬래버레이션의 정점은 말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시각화한 영상 작품인데, 연기의 상당 부분을 배우 조덕현 씨에게 맡겼습니다. 미술에서 서사적 표현이 어디까지 가능하고 유효한지 묻고 저울질하는 과정이 바로 이번 작업인데, 거대 구조물과 거울, 건축적 공간 분할, 회화, 영상 작업을 총동원한 프로젝트예요.

지난해 아트클럽1563에서 열린 전시 <음의 정원>에서는 현대음악과 접목하셨죠. 이번에도 음악과 연계한 작품을 볼 수 있나요?
<음의 정원>은 현대음악과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한 것이기도 하지만 윤이상이라는 걸출한 음악가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일민미술관에서 제 개인전에 ‘광복 70주년 기념’이라는 큰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런 면에서 윤이상은 중요한 상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음의 정원> 업그레이드 버전을 다시 선보입니다.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을 적절히 혼합하고 윤이상과 관련된 서사를 더하는 거죠.

전시 제목을 ‘꿈’으로 정한 이유는 뭔가요?
이번 전시가 보편적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만큼 열린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이번 작업을 요약할 수 있는 단어가 뭘까 생각해보니 ‘꿈’이더군요. 영화, 음악, 이야기, 기억 등을 아우르는 단어죠.

과거의 소재를 활용해 현재적 이슈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전시를 통해 독특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1980년대 후반부터 낡은 사진 속 인물을 부활시키는 사실적 드로잉으로 역사의 흔적을 되짚는 작업을 하셨는데, 이런 작업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우리 세대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냉전 시대 교육을 받았죠. 거기에 순응하든 항거하든 대체로 과거는 역사이자 거대 서사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들고 나서 1980년대 후반에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그런 세계관이 한순간에 와해되는 경험을 했어요. 그 시점부터 희미하게 인간 군상의 다양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하지만 늘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연결하려는 시도가 보여요.
과거는 현재에서 분리되는 별개의 시간이 아니니까요. 두 시제가 서로 밀착되고 연동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해요. 현재는 아주 빠르게 과거로 편입되는 시간이니 우리가 인식하는 삶은 결국 과거에 기반을 둔 셈이죠. 그렇게 과거로 흐르는 시간이 기억이란 저장고를 향하고, 그 저장된 기억은 현재의 요청에 의해 소환되는 거예요.

작품에 컬러를 사용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사진 드로잉’ 작업을 주로 하기 전에는 색채를 적절히 구사했는데, 흑과 백으로도 온갖 색채의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다고 느끼면서 점차 색을 멀리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컬러사진이 없던 시절 흑백사진에 색채를 덧입힌 사진들에서 받은 묘한 느낌을 잊을 수 없어서 앞으로는 흑백의 화면에 채도가 낮은 색채를 혼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작품 활동에 한 획을 그은 시기가 있다면 언제일까요? 2000년 구림마을 프로젝트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1980년대 후반, 흑백사진을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 첫 번째 분기점이라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작업을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2000년 구림마을 프로젝트는 식상한 반복을 극복하고 발굴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시작한 또 다른 분기점이죠. 하지만 ‘한 획을 그었다’라고 할 만한 혁신적 작업은 아직 하지 못한 것 같네요.

이번 전시 작품도 그렇듯 작품을 통해 늘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작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작업이란 어떤 것인가요?
누구든 자신의 수준에서 적절한 감동을 받을 수 있고, 전문적 관점에서도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작업이 좋은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미술 언어는 최대한 쉽게 구사해 많은 이들이 접근할 수 있게 하고, 그 아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의미를 깔아두고 싶습니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김태선(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