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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디자인의 또 다른 정의

LIFESTYLE

2005년, 파슨스 디자인 스쿨 교수로 자신의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던 서른넷의 한 성공한 뉴요커가 13년 동안의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10년 후, 디자인을 통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배상민 교수의 행보는 많은 것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 결정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대전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배상민 교수의 연구실. 방학을 맞은 캠퍼스는 한산하지만 이곳만큼은 생동감과 분주한 기운이 감돈다. 산업 프로젝트와 정부 프로젝트 등 현재 배상민 교수가 진행하고 있는 디자인 프로젝트는 7~8개. 그뿐 아니라 새로운 나눔 프로젝트를 디자인하며, 다시 아프리카로 봉사 활동을 떠날 준비도 하고 있다.
이미 많은 언론을 통해 알려진 대로 그는 1998년, 20대의 나이로 모교인 파슨스 디자인 스쿨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천재 디자이너’라는 찬사와 화려한 수식어만으로 배상민 교수를 설명하는 것은 한참 부족하다. 아니, 그를 만나고 나니 오히려 반복 사용하는 그 수식어가 그가 중시하는 소중한 가치를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린 그 순간을 회상하며 그는 자신이 느낀 소명 의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카이스트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았을 때 한 고민은 이런 거예요. 뉴욕 서 이룬 많은 것을 버리고 한국으로 가는 게 잘하는 일일까. 게다가 카이스트는 좌뇌적 집단인데 지극히 우뇌적인 내가 그곳에 잘 맞을까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그 갈림길에서 저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쪽을 선택했어요. 결과적으로 그 선택을 통해 한국에서 디자인의 가치에 대한 답을 찾게 됐죠.” 운명적 순간이나 사건은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비로소 선명하게 정체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배상민 교수의 경우도 그랬다. 카이스트에 부임한 이듬해인 2006년, 그는 연구실로 걸려온 월드비전의 전화를 받고 자선 활동을 위한 상품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뉴욕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신상품이 나오면 곧 버려질 아름다운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으로 힘들었기에, 월드비전과 함께 시작한 나눔 프로젝트는 그에게 분명한 전환점이 됐다.
배상민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 ID+IM(I Design, therefore I am)은 꾸준히 판매되는 인기 디자인 상품을 탄생시키고 그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상품이 2008년 런칭한 친환경 가습기 ‘러브팟’. 미적으로 보기 좋은 오브제일 뿐 아니라 기능성도 뛰어나다. 또 2013년 런칭한 ‘딜라이트’는 전등갓의 형태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고 그에 따라 빛의 밝기를 조절하는 조명이다. 나눔 프로젝트는 아름다우면서 기능성이 있고 나눔의 의미까지 담은,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수혜자는 월드비전이 선정하는데, 지금까지 수익금으로 저소득층 아이들의 교육비를 지원해왔다. 현재 준비 중인 나눔 프로젝트는 음악에 따라 움직이는 조명이 될 거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나누는 디자인을 시작하자 기대 이상의 수상 경력도 따라붙게 됐다는 점이다. 독일의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와 iF, 미국의 IDEA, 일본의 굿 디자인 등 유수의 디자인상을 수상하며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았다. 이쯤 되니 조금쯤 뻔한 질문 하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창조적 직관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냐는. “디자인은 뭔가를 예쁘게 만드는 게 아니에요. 문제를 잘 찾아낸 뒤 그걸 혁신적이고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이죠. 이건 많은 디자이너가 동의하는 디자인에 대한 제 객관적 정의예요. 주관적 정의는 물론 나눔이죠. 소위 말하는 ‘대박 나는’ 아이디어는 달나라에서 오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일상생활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23권의 디자인 저널을 써왔어요. 모두 일상에서 생각한 문제를 기록한 저만의 일기죠. 답은 하나도 없지만 쓰면서 생각해요. 대단하고 천재적이라 영감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알지만 그냥 넘어가는 문제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깊이 인지하면 그게 어느 날 아이디어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의 공통점이죠.”

나눔 프로젝트의 디자인 상품 ‘딜라이트’와 ‘러브팟’

배상민 교수는 카이스트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인기 강연자로 활약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갈구하는 창의성을 주제로 삼고, 나누는 삶을 살자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강연에 참석한 이들이 누구든 분야를 막론하고 공감을 이끌어낸다. 나눔 프로젝트를 통해 물질적 나눔을 한다면 강연을 통해서는 가치관이나 깨달음을 나누거나 새로운 동기부여를 해준다. 그는 한국에서 활동한 지난 10년이 내공을 쌓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 할 일은 ‘디자인 사회 공헌’을 위한 체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목표로 세운 것은 디자인 나눔센터를 만드는 일이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디자이너가 새롭고 표피적인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비주얼 피싱’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그런 디자이너들이 사회 공헌에 동참하고 싶을 때 언제든 나눔센터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디자인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상업적 목적이 없고 수익금은 100% 기부할 예정이니, 운영할 만한 인프라를 마련하는 게 우선이죠. 카이스트에서 낸 제 논문도 모두 그런 방향이었어요. 실질적이고 학문적인 기반을 토대로 디자인 나눔센터를 만들고, 나중에 은퇴하더라도 창의적인 방법으로 나눔을 지속하고 싶어요.” 그가 생각하는 좋은 미래는 기술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사람 사는 느낌이 충만한 환경이다. 그런 미래를 위해 상위 1%의 삶을 사는 이들은 나머지 99%의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혁신적 방법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그의 프로젝트는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축복을 돌아보게 한다.
배상민 교수의 나눔 프로젝트는 그 자신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는 아프리카에 갈 때마다 뉴욕, 런던, 파리, 밀라노에서는 얻지 못한 영감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실질적 도움을 주기 위해 정수기처럼 현지에 꼭 필요한 물품을 디자인하는 시드(Seed)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우리가 가진 많은 것은 사실 그냥 주어진 것이 대부분이니 가지지 못한 이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선순환 구조가 될 거라는 생각이다. 이상주의자의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 법하지만, 오랫동안 문제를 기록해온 저널을 바탕으로 디자인하고 나눠온 현실주의자의 확신이다. 그가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성공한 사람의 사회적 책임감으로 하는 일이아니라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가치 있게 쓸길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앞으로도 꿈꾸고 디자인하고 나누는 일을 계속할 배상민 교수의 활동에 슬그머니 동참하고 싶은 의지가 생긴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안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