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르겠다’고 말하면 안 돼요”
우리나라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는 전길남 박사가 사람과 세상을 잇는 연구에 몰두 중이다.
자기 분야에서 최초가 된다는 건, 언제든 새로운 세대의 질문에 충실히 답할 의무가 있다고 믿으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휴대폰과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친구에게 연락할 수 있는 건 인터넷 덕분이다. 너무나 익숙해 숨 쉬듯 당연한 것이라 여기지만,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시작된 건 1982년 5월 15일부터로 40년이 채 안 됐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서울대와 구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사이에 송수신을 성공시킨 것이 시초다. 1970년대 말, 통신 연구원들은 나중에 글로벌 사료가 될 현장 사진 하나 찍을 생각을 못 할 만큼 여유가 없었지만 전화선처럼 있는 것을 끌어온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구축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이후 한국은 IT 강국의 타이틀을 얻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전길남 박사다. 1986년 ‘kr’ 도메인을 위임받아 관리자로 일했고, 국제 인터넷 표준을 정하는 ISOC(인터넷 소사이어티)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는 ‘우리나라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린다.
2008년 카이스트(KAIST) 전산학과를 정년퇴직한 그는 현재 일본 게이오 대학교 초빙교수이기도 하다. 주로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며 활동하지만, 저술에 집중해야 할 때는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을 찾곤 한다. 은퇴 후에도 쉼 없이 활동하는 이유가 궁금해 연구실을 찾았다. 박사는 우리를 맞아주면서도 의아해했다. 보통은 인터넷 개통 25주년 때처럼 기념일이 있을 때 기자들이 찾아오기 때문. 실내에서도 버릇처럼 쓰고 있는 모자 아래 구릿빛 얼굴은 석학이라는 말보다는 운동광 정도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는 원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음료수와 영어로 된 책 한 권을 툭 내밀었다. 그가 쓴 저서 <아시아 인터넷의 역사> 3권이었다.

(왼쪽) 1983년 당시 연구원들과 그린 SDN (System Development Network) 구성도.
1, 2권은 온라인에도 공개했죠. 계속 쓰고 계신 건가요? 네, 어쩔 수 없이.(웃음) 10년 단위로 기록해 쓰고 있어요. 완간 목표일은 2023년 1월 13일이에요. 사실은 내가 팔십이 되는 날인데(1943년생), 전공인 시스템 공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죠. 차차 설명해줄게요.
홈페이지를 보고 놀랐습니다. 최근의 강의 커리큘럼까지 오픈하셨더군요. 올려야죠. 전에는 완벽하게 마무리해야 올리곤 했는데, 지금은 불완전한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부끄러울 것도 없죠. 수정하면 그때 또 올리면 되니까. 과학 쪽에서 일어나는 오픈 소스 활동이기도 합니다. 누구든 보고, 써도 돼요. 저는 기록을 해야죠. 한국 인터넷 역사를 50년 동안 겪어본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선구자이기 때문인가요? 사상 최초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요. 성취의 쾌감은 짧아요. 부담감이 더 길게 갑니다. 최초가 된다는 것은 평생 질문을 받는다는 걸 의미해요. 저는 어떤 질문에도 답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누가 기술에 대해 물으면 모른다고 하면 안 돼요. 10명 남짓한 사람이 인터넷에 관한 모든 걸 결정하던 시절 사람이잖아요.
늘 질문을 받는다…! 젊은 사람들이 공개 강연회에서 묻곤 해요. 보통은 이런 식입니다. “선생님, 그때 왜 그랬어요?”(웃음) 제가 과학 쪽에서 부르면 키(Key) 스피치를 많이 하는 편인데 한두 개 정도 좋은 질문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인터넷의 보안 문제를 따지는 거죠.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며) 어려운 겁니까? 해결 못 하는 겁니까?” 그래요. 요즘 자율주행이며 AI 등에서 문제시되는 분야니까요. 해결 방안을 물어보는 건데, 그러면 머릿속에 처음 구축할 때 왜 그랬는지 솔직하게 말해줘야 합니다. 인터넷 초창기 때 한 20년은 성과가 중요해 보안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당시는 하드웨어가 비싼데 보안 기술을 걸면 성능이 50% 이하로 떨어지니 무시한 거죠. 미국도 인터넷 주소인 IP를 처음 만들 때는 전 세계에 40억 개면 충분할 줄 알았고, 연구자들이 당시 나름 고민해서 분배했는데 지금은 그 기준이 뭐였는지 윤리적 부분에서도 심각하게 다뤄요. 이렇게 주로 ‘후회평’을 하고 있어요.
2008년 카이스트 은퇴 후에도 해외 학술 활동이 활발하시던데요. 얼마 전 중국 우전(Wuzhen)에서 열린 세계 인터넷 대회에 참여한 것도 그렇고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보통은 은퇴 후 쉰다고 생각하니까요. 1970년대 말, 미국에서 한국에 올 때는 ‘한국에 50%, 나머지 아시아 여러 나라에 50% 인터넷을 전도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1965년까지 일본 오사카에서 살았고 미국 캘리포니아(UCLA 컴퓨터공학 석박사, 1967~1974)에서 학위를 마쳤지만 부모가 한국 사람이니 주로 한국에 머물고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인터넷뿐 아니라 제가 아는 웬만한 건 다른 나라보다 한국에 먼저 했어요. 이제는 알아서 잘되는 시점이니, 다른 나라로 전환했고요. 인터넷망 구축을 돕기 위해 찾아간 곳은 아프리카 대륙까지 50개국 정도 됩니다.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1년에 두어 번 모여 일종의 기술 페어 같은 것도 열고요. 미국과 유럽에 집중된 기존 구도보다는 아시아 나라 중 한 곳이 잘되면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세상이 좋아질 것 같아서요.
그동안 아시아에서 기술 부문의 주축이 될 나라를 찾고 계셨던 건가요? 기술 산업이 고르게 성장하려면 바탕이 되는 국가 규모가 커야 해요. 한국은 작고, 미국과 유럽(EU), 중국 정도가 가능하죠. 중국은 아직 어떤 식으로 발전하면 좋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제야 준비하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앞으로 20년 정도면 될 것 같아요. 그걸 4~5년 내로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 역시 중국 사람들이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도우려고 합니다. 중국이 결국 최종 제품(product)에 신경 쓸지, 일본처럼 부품에 신경 쓸지 혹은 알아서 혼자 다 할지 결정되는 시기는 5년에서 10년 사이일 것 같아요. 한국은 최종 제품 레벨에서는 우수한 편인데 부품에 주력하던 일본과 무역 갈등이 심한 지금이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어요. 위험하기도 하고. 특히 AI 쪽은 좀 늦은 감이 있어요.

1 ISOC의 CEO였던 린 세인트 아무르(Lynn St.Amour)와 대화 중인 전길남 박사.
2 전길남 박사는 최근까지 아프리카 인터넷 보급 교육을 위해 오랜 시간 교류했다.
AI가 나와서 말인데, 한국 대중에게는 인문학 토크 주제로 더 친근합니다. 그런데 박사님은 한 언론사 간담회에서 AI 시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여성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나는 보통 AI를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중요한 혁명 중 농경과 문자(언어) 발견 다음 정도 큰 이슈라고 봐요. 산업혁명과는 비교도 안 되죠. 그 정도 레벨에서 준비해야 해요. 지금 젊은 사람은 AI와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요. AI가 일종의 언어처럼 바이링구얼이 되어야 해요. 지금 스탠퍼드 같은 해외 명문대는 입학할 때 전공을 정하지 않는데, 최근 입학생 설문을 해보면 계열을 불문하고 AI를 하겠다는 친구들이 60%쯤 됩니다. MIT는 AI 복수 전공을 거의 의무적으로 권하죠. AI 분야는 1940년대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니클라스 보스트룀 같은 석학들이 활동하고 있어요. 철학까지 섭렵한 공학자들이 전공 디렉터를 맡아 학문을 아우르고요. 어디든 격동기는 좋은 기회니까, 필요하다면 잘 잡아야죠.
이를테면 전지구적 격동기란 소수에게 열린 기회군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래요. 먼저 기회를 잡고 시작하는 사람이 앞으로 수십 년간 그 산업의 주축이 될 테니까요. 이전에는 기술 과학이 무겁고 냄새 나는 하드웨어의 영역이었어요. AI와 교육은 물리적 힘이 필요하지 않은 소프트웨어잖아요. 전자 통신만 해도 99%를 남성이 주도하지만, 앞으로는 여성도 불리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과학 분야에서는 관련 활동이 이미 시작되고 있고요. 젊은 과학자들이 만든 AI4all(http://ai-4-all.org) 같은 집단도 있죠. 10대 청소년에게 방학 기간 AI 교육 캠프를 여는 건데, 오픈 초기엔 여학생만을 대상으로 했어요. 하지만 올해부터는 남학생도 받아줍니다. 1980년대 한국으로 돌아온 저도 격동기 덕을 봤을 거예요. 당시 저는 30대였는데 하는 일은 한국에서 소수고 또 최초니까, 그 무렵 학계 분위기와 달리 눈치 보지 않고 의견을 나눌 수 있었어요. 결국 그때 함께한 청년들이 지금 온라인 시대의 핵심 멤버가 됐죠. 당시 저도 가능한 한 여성 연구원을 기용하려 애썼는데, 쉽지 않았어요. 왜 ‘AI4all’만큼 더 세게 하지 못했는지 반성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보낸 10대 시절 에피소드를 다른 인터뷰에서 본 적이 있어요. 고교 학생회장으로서 발표를 준비하며 ‘우리나라’라는 말에서 멈칫했을 때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요. 전길남이란 사람은 늘 경계인이었나요? 소수자라는 점이 학문 연구에도 영향을 주나요? 그럼요. 어릴 때부터 제 자신이 근본적 문제에 심각하게 직면했으니까요. 항상 ‘누구 때문에 이 일을 하는가? 이 일이 누구에게 영향을 줄 것인가?’ 생각하고 ‘공정하게 하고 있는가?’도 고민하는 거죠. 지금 젊은 세대에 비하면 저는 운이 좋았어요. 어떻게 보면 제 배경이 한국에 와서는 굉장한 이점이었어요. 일하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면 해외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되니까(록웰 인터내셔널 1969~1971, NASA 1976~1980). 연구하면서 겪는 작은 싸움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했죠. 컴퓨터도 인터넷도 내가 지도할 수 있는 입장이 되고, 그다음부터는 내가 뭐든 주도하는 게 습관이 되니까. 무슨 일을 하면 ‘공평하게 나누자’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었어요.(웃음) 저와 일할 때는 누구도 함부로 이익을 챙기지 못했죠.
앞서 기록에 신경 쓰고 계신 것도 같은 이유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든 봤으면 하는 것이요. 맞아요. 우리 쪽에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라는 학자가 있는데, 80대 때에 AI 저술을 해냈어요. 저한테는 선배인 셈인데, 보통 학자들은 70대 정도가 활동의 막바지임에도 그걸 해낸 거죠. 저도 할 수 있는지 보려고 도전하는 거예요. 시스템 공학적으로 나를 바로 보고 말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머리가 좋다는 생각은 안 해요. 가끔 머리 좋은 사람들과 경쟁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예전에도 체력으로 경쟁했어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천재가 10시간 연구하면 나는 50시간 하면 되지’ 하는 식이었어요. 연구하는 사람들 중 나보다 체력이 좋은 사람은 없었으니까.(웃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운동하고 있어요.
한국인 최초로 마터호른에 오를 정도로 등산광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최고령 서퍼가 되는 게 목표예요.(웃음) 카이스트를 은퇴하자마자 일본 게이오 대학교로 갔는데, 그때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에 아파트를 구했어요. 아침 7시에 한 시간 정도 서핑한 뒤 출근했죠. 지금도 차를 안 타요. 걷거나 자전거를 탑니다.
그 후로도 이어진 자기 관리 이야기와 해외 산업 트렌드에 대한 의견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길다. 영어와 한국어가 혼재된 대화 속에서 문득 가장 좋아하는 키워드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전길남 박사가 처음으로 바로 대답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한참 생각하다) 어, 이거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내가 나중에 생각나면 보내줄게요.” 우리가 서울로 올라올 때쯤 문자메시지로 ‘Challenge’라는 짤막한 답이 왔다.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그는 알까? 전 박사는 대부분 현재형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여느 어른과 달리 과거형은 잘 쓰지 않고, 미래 시제로 새로운 시도를 얘기한다. ‘나 때는’이라는 말을 드물게 쓰는 세상의 연구자. 우리가 특별한 기념일이 아닌데도 찾아간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