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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또 따로 걷는 길

ARTNOW

국악은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소수의 전유물로 여겨왔다. 그런데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이 길 위에 선 수많은 다양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 이나래와 안나 예이츠는 그중에서도 판소리를 기반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소리를 만들어가는 인물이다.

이나래의 블랙 상의와 스카프 모두 KIMDABIN, 뱅글 스타일리스트 소장. 안나 예이츠의 탑은 스타일리스트 소장, 롱 스커트는 KIMDABIN.

이나래와 안나 예이츠가 판소리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분명 다르지만, 지금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그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이제껏 배운 판소리를 기반으로 마치 일기장을 펼쳐 보이듯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로만 아홉 곡을 채운 첫 솔로 앨범 〈지금 어디〉를 낸 이나래는 이른바 ‘소리꾼’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모든 것에서 철저히 벗어났다. 머리를 쪽 찌지도 않고, 한복을 입지도 않는다. 음악은 힙합 사운드 기반에, 앉아서 즐기는 일반적 무대보다 역동적인 클럽 공연이나 콘서트가 더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그녀는 더 이상 소리꾼이 아닌 걸까? 한편 안나 예이츠는 서울대학교 국악과 인류음악학 조교수로 재직하며 판소리를 연구하지만, 그녀 역시 소리꾼으로 무대에 선다. 또 국내에서 활약하는 소리꾼 60여 명을 직접 인터뷰하고 공연을 찾아다니며 우리나라에 있는 그 누구보다 열렬한 마음으로 판소리와 그 문화를 탐구한다. 현재 판소리에 대한 마음과 생각을 가감 없이 펼쳐 보이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두 사람. 이 순간 이들은 그 누구보다 열렬한 판소리 사랑꾼이다.

블랙 드레스와 스카프 KIMDABIN, 블랙 와이드 팬츠 HANNAH SHIN, 뱅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나래 
한평생 국악의 길을 걸어왔고, 전통 판소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장하는 중이다. 지난 1월 첫 번째 앨범 〈지금 어디〉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주기 시작한 그는 ‘전 이날치 보컬’이라는 타이틀을 서서히 지워가는 중이다.

판소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예술입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 나누기 전에 전통이 무엇인지 먼저 논의하고 싶어요. 두 분이 정의하는 전통은 무엇인가요?
이나래 L 판소리는 이제 저를 표현하는 ‘언어’가 됐어요. 우리가 모국어를 말할 때는 어떤 말인지 특별히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판소리 역시 툭툭 흘러나오거든요. 그래서 전통을 이야기할 때도 비슷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씨간장’이 딱 어울리겠네요. 서로 다른 재료를 섞어 또 다른 양념을 만드는 핵심! 제 음악에서 전통을 버리고는 무엇도 얹을 수 없거든요.
안나 예이츠 Y  이제 10년 정도 소리를 공부했어요. 다른 전공자, 업으로 삼은 이들에 비해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요. 그렇다 보니 전통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죠. 판소리를 배우면 배울수록 알고 있던 것도 새롭게 다가오고, 다르게 보이는 지점이 많기 때문에 아직은 전통 판소리에 집중할 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앞선 이야기에 공감해요. 무엇을 하더라도 ‘중심’이고 ‘정도’인 전통부터 제대로 알아야 자신의 것을 펼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두 분이 생각하는 지금 이 시대 판소리는 어떤 것인가요?
처음 판소리 공연을 보고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때 이 장르가 과거에 갇혀 있다고 느꼈어요. 그렇다면 ‘현대 판소리는 무엇일까?’란 질문으로 이어지더군요. 아직 명쾌한 해답을 찾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있어요. 우리가 전통 소리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현대 판소리라는 거예요.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잖아요. 조선시대부터 전승된 문화지만, 결국 시간의 흐름을 타고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판소리는 현대와 아무 상관 없는 것이라고 여길 때 좀 슬퍼요. 조선시대 사람이 판소리를 통해 느낀 희로애락을 현대인도 똑같이 느끼거든요. 이렇게 현대적인 문화를 과거에 가둬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공감해요. 직접 곡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판소리의 전통적 대목을 가져와 현대적 사운드를 입혀 편곡하는 것만이 중요한 건 아니거든요. 판소리는 원래 5시간, 9시간까지 이어지는 긴 호흡의 종합예술이에요. 수백 년 동안 어떻게 이런 형태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이런 이야기를 담을 수밖에 없었는지 등을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요. 비록 제가 지금 만들고, 또 부르는 노래가 전통의 소리가 아닐지라도 어떻게 하면 그 정신을 이어갈 수 있을지 연구하게 됩니다. 앞서 말씀하신 대로 판소리는 문화의 일부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어떤 형태가 됐든 공연자인 소리꾼이 있고, 핵심인 전통을 간직한다면 그것이 지금 이 시대의 판소리라고 생각해요.

롱 스커트 KIMDABIN, 블랙 블레져, 이어링, 링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
 안나 예이츠 
서울대학교 국악과 인류음악학 조교수로, 판소리를 널리 알리고자 유럽과 한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전통음악의 보전과 발전에 누구보다 진심으로 앞장서며 다양한 연구를 이어가고, 국악과 패션, 젠더 등 서로 다른 주제를 연결해 관심사를 확장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전통을 있는 그대로 보전하고 전수하는 것이 이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정말 전통을 지키는 데 유효한 방식이라고 보시나요?
L 우리나라에서는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국가무형유산(구 국가무형문화재)으로 지정해 보호했죠. 이 모든 것이 서구화와 맞닿아 있어요. 일제강점기를 지나 근대화를 거치며 우리는 너무 빠르게 서양의 문화를 흡수해버렸죠. 그러면서 우리 전통문화를 한순간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강했어요. 제가 그간 만나뵌 국가무형유산 전승자 선생님 모두 자신이 지켜가는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컸어요. 그런데 또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분들 역시 그 안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유연한 면모가 보여요. 그렇다면 그건 완전히 전통의 모습 그대로일까요? 또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판소리는 사람이 사람에게 가르치며 섞이고 변화했어요. 실제로 우리가 현재 배우는 판소리는 조선 후기 고종 때 신재효가 정리하고 체계를 만든 것입니다.  사실 그건 유네스코에서 한국에 권고한 부분과도 맞닿아 있어요. 문화를 너무 고정하면 좋지 않다고 말이죠. 그동안 한국은 옛 무형문화재 제도를 이야기할 때 ‘문화의 원형’이라고 지칭하며 전통을 있는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이제는 ‘원형’ 대신 ‘전형’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했지만요. 문화가 숨 쉬고 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여기서 매체의 역할도 큰 것 같아요. 국악이란 장르가 ‘전통적인 모습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이 많아요. 그래서 인터뷰마다 ‘판소리를 배울 때 무엇이 가장 어려웠는가’를 묻는 질문이 항상 있죠. 외국인인 제가 공연 무대가 아닌, 교수로서 외부 강단에 설 때조차 한복을 입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이런 문화적 고정관념이 크게 다가옵니다.

판소리는 소리꾼, 고수, 청중을 주요 구성 요소로 꼽을 만큼 관객과 긴밀히 소통하는 장르입니다. 지난 몇 년간 공연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과 소통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두 분 역시 현시점 이에 대한 고민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L 최근에 첫 솔로 앨범 〈지금 어디〉를 발표했어요. 앨범을 준비하면서 판소리와 나 자신의 거리를 없애고 합일된 음악 그 자체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무엇보다 컸어요. 그간 판소리를 하며 이미 누가 만든 작품을 마치 배우가 대본을 보듯 분석했고, 그 작품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부분엔 도전하지 않았어요. 그런 한계가 답답했어요. 그래서 판소리 작품을 제 시각으로 해석하면서 온전히 제 것으로 승화하는 방식을 고민했죠. 공연도 마찬가지예요. 예전에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데, 딱 어느 선까지 가능한 거리가 있었어요. 요즘은 DJ와 함께 공연을 만들며 관객의 코앞에서 함께 즐기는 자리를 마련하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어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굉장히 좋은 영상이 많이 나왔어요. 무대 위 한 차례 공연 외에 임팩트 있는 영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죠. 그렇지만 결국 음악과 공연은 무대 위에 있어야 하고, 사람을 만나야 해요. 판소리는 관객과 호응하며 에너지를 얻고, 긴 시간 이어가는 장르인 만큼 더더욱 현장이 중요하죠. 학생들에게 꼭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공연을 많이 보러 다니라고 말해요. 저 역시 매번 공연을 볼 때마다, 또 할 때마다 다른 매력을 느끼거든요. 한 번 보고 나면 반드시 판소리가 가진 에너지에 매료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우리는 클래식이나 성악 등 서양의 고전음악은 즐겨 듣는 데 비해 국악과 판소리를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자리를 빌려 각자 생각하는 판소리의 매력을 뽐내주세요.
Y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선 답변에 다 녹아 있는 내용이기도 하죠. 첫 번째는 긴 호흡의 공연에서 오는 전율이에요. 실제로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제1회 월드판소리페스티벌’이 열렸어요. 판소리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0주년을 기념해 소리꾼들이 20시간 릴레이 공연을 이어갔어요. 지칠 법도 한데, 공연 막바지로 갈수록 오히려 그 열기가 더 뜨거워지고 흥이 나더군요.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두 번째는 소리꾼과 관객의 연결 고리에서 발생하는 ‘흥’이에요. 우리 아들이 제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판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공연을 무척 잘 즐겨요. 이제 일곱 살 된 아이도 소리꾼, 고수와 함께 호흡하고 신명 나게 춤출 수 있으니, 성인들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함께 잘 어우러질 수 있지 않을까요?  동감해요. 그리고 저는 단순히 판소리가 음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 좋아요. 실제로 사람들이 쓰는 말투와 유머 등 많은 요소가 응축된 복합 예술이죠. 이것을 무대에서 보여줄 때는 에너지가 또 중요합니다. 소리꾼마다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다르니 그 소리가 다를 수밖에 없고, 관객과 상호 교류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니 공연 역시 개성이 있을 수밖에요. 서로 다르게 순환하는 에너지가 매력적이에요.

이나래가 입은 블랙 탑 & 팬츠는 HANNAH SHIN, 스카프 KIMDABIN, 이어링 스타일리스트 소장. 안나 예이츠의 매쉬 트렌치 코트 HANNAH SHIN, 랩 스커트, 이어커프, 링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사진 안지섭
패션 스타일링 이승은
헤어 & 메이크업 강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