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돈
남자에게 돈은 무엇을 의미할까? 남자에게 돈은 자유를 살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스카페이스>는 주인공의 이 독백으로 유명하다. “돈을 벌면 권력이 오고, 권력이 오면 여자가 따라온다.” 남자들의 세계관을 이처럼 단순명료하게 정리한 문장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스카페이스>는 역대 최고의 ‘남자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남자들의 뇌리 속에서 자존심과 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영화나 드라마가 그리는 멋진 남자는 대부분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비싼 와인 바에 드나든다. 그런 남자 옆에는 항상 미녀가 따라다닌다. 남자의 서열은 옆에 붙어 다니는 여자의 미모가 결정한다는 것. 영화 <스카페이스> 속 갱스터들이 술과 마약과 범죄에 빠져 인생을 탕진해도, <007> 시리즈에 나오는 악당이 세상을 멸망시킬 흉계를 꾸며도 돈과 미녀가 많은 그들은 양아치가 아니라 상남자다.
1980년대의 ‘남자 영화’ 중 하나인 <월스트리트>의 주인공 마이클 더글러스의 대사도 <스카페이스>의 그것만큼이나 명료하다. “돈은 세상의 모든 군더더기를 꿰뚫고 그 근본을 보여준다.” 나도 자라면서 친구들과 소파에 앉아 이런 영화 속 대사를 들으며 박수 치고 좋아했다. 우리 남자들은 단순한 동물이다. 이런 대사가 귀에 잘 꽂힌다. 그리고 남자는 단순해서 객관적인 것을 좋아한다. 세상에 돈처럼 단순하고 객관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돈=남자’라는 공식, 왠지 끌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분명히 20대 때보다 돈이 많다. 그런데 더 남자답다? 잘 모르겠다. 20대에는 다니기 싫은 직장 때려치우고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20대에는 밀려 있는 프로젝트고 뭐고 다 내려놓고 첫사랑 따라 그리스에 있는 무인도로 건너가 살 수 있었다. 멋있는 녀석이었다. 솔직히 지금 그렇게 하라면 못한다. 오히려 돈이 있어서 못한다. 그럼 남자에게 돈이란 도대체 뭘까?
영화 <007>시리즈 중 < For Your Eyes Only >
“돈을 벌면 권력이 오고, 권력이 오면 여자가 따라온다.” 남자들의 세계관을 이처럼 단순명료하게 정리한 문장은 없을 것이다.
돈은 자유다?
어릴 때 나는 비행기를 무척 좋아했다. 내 방은 온통 전투기 모델로 가득했다. 높은 하늘을 나는 여객기를 보고도 보잉 777인지 에어버스 340인지 정확히 맞힐 수 있을 정도로 비행기를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위인도 ‘리 히트호펜 남작’이라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투기 조종사였다. 리히트호펜은 여러 면에서 상‘ 남자’였다. 자기 비행기를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 붉은 남작(Red Baron)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의 비행기를 본 한 동료 비행사가 “동체가 빨간색이면 적군 눈에 더 잘 띄지 않나요?”라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는 여유만만하게 “그들이 봤으면 좋겠다(I want them to see me)”라고 대답했다. 그에게는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멋지게 싸우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조종사 중 유독 그가 남자들의 우상이 되었다.
레드 배런은 물론 돈이 많아서 그런 호기를 부릴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만 해도 공군 조종사가 되려면 자가용 비행기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자기 전투기를 마음에 드는 색으로 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기록을 봐도 그의 재산 규모 따위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의 돈을 부러워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그의 자유를 부러워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주변에 돈 많은 남자는 꽤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상남자는 아니다. 돈을 가지고 자유를 살 줄 아는 사람. 그런 남자가 상남자다.
비겁한 돈도 있다
나도 어른이 되어 돈을 많이 벌면 비행기를 조종해 세계를 누비고 싶었다. 그러나 비행 학교는 재벌이나 다닐 수 있는 비싼 곳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30대 중반까지 왔다. 그런데 어떤 모임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20대로 나보다 어렸고 평범한 중산층 부모를 두었으며 직장 연봉도 나보다 한참 낮았다. 그런데 그녀는 휴일마다 김포공항에 가서 조그마한 단발 세스나 비행기를 몰며 조종사 라이선스를 따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내 앞에 비행 선글라스를 쓰고 가죽 잠바를 입고 나타나 신나게 비행술을 설명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몹시 부러웠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난 그녀보다 돈이 많은데도 비행기를 안 탔기 때문에 진 것 맞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30대가 되어 20대보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이유는 돈을 방패로 쓰려고 해서라는 것을. ‘돈이 없어서’라고 변명하면 모든 게 용서되기 때문에 자유 따위 쉽게 포기한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점점 멋없는 남자가 되어간다.
영화 < Chariots of Fire >
얼마큼이 충분한가?
그날 집에 돌아와 계산해봤다. 미국 애리조나로 건너가 비행기 조종사 라이선스를 따는 것은 한국에서 외제차 몰고 다니는 것보다 돈이 적게 든다. 그런데 미리 계산조차 해보지 않고 막연한 생각으로 항상 말해왔다. “나는 부자가 아니다. 그래서 비행기 조종을 배우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누군가 말했듯 더러운 변명에 불과했다. 그런 마인드 자체가 가난한 거였다. 내 경제력은 경비행기 라이선스를 딸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비행 재킷과 플라이트 매뉴얼을 겨드랑이에 끼고 나를 만나러 오는 그녀를 볼 때까지 ‘나는 충분히 부자다’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취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볼 수 있을 정도의 돈은 있으니 충분히 부자라는 만족감이 몰려왔다.
옛날 영국 영화 중 <불의 마차(Chariots of Fire)>가 있다. 여기에 나오는 한 영국 귀족은 자기 저택에서 허들링을 연습한다. 연못가 잔디밭에 허들을 늘어놓고 그 위에 샴페인을 얹어놓는다. 허들에 다리가 걸리면 샴페인이 엎질러지고 잔도 깨질 수 있다. 만약 무사히 통과하면 한 잔 마신다. 영국 친구들과 이상적인 남자의 삶을 얘기할 때마다 이 영화 장면이 회자된다. 정말 멋진 인생이다. 물론 그 남자는 돈이 많아서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멋진 이유는 돈을 달리는 데 쓰기 때문이다. “왜 뛰는가?”라는 질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도,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냥 “뛰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바로 부의 기준이었다. 크리미아 전쟁에서한 영국 기마병이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자기 용기를 테스트해보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 기사도고, 꼭 이기려고 전쟁을 하는 것은 살인이다.”
스타일 있는 남자
결국 부자는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아니다.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가 어떤 삶을 위해 얼마만큼 돈을 써서 어떤 자유를 누리고 싶은지 명확히 아는 사람을 ‘스타일 있는 남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어느 정도 돈을 벌면 더 이상 돈을 벌려 하지 않고 자유부터 산다. 자유를 얻으면 자기보다 돈이나 권력이 많은 사람에게 비굴해질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도 원하는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슈퍼갑이다. 영국 사람은 이런 사람을 젠틀맨이라 부르고 중국인은 대인배라 부른다.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그것을 ‘충분히’ 가진 사람이다. 그 이상 바라는 게 없으니 자유롭다.
잠깐 생각해보자. 나는 과연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지, 얼마나 벌어야 충분한지, ‘돈은 무조건 많을수록 좋다’라고 생각하며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온 것은 아닌지. 나도 당장 내년에 비행기 타러 미국으로 건너가려 한다. 그 생각만 하면 어깨가 쫙 펴지고 얼굴에 20대 때의 상남자다운 웃음이 돌아온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할 때만큼은 누구도 나의 보스가 될 수 없다. 나에게 그 이상의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아쉬운 것이 없다. 자유로운 사람의 자신만만한 웃음, 또 급하게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머무를 수 있는 여유가 바로 우리가 부러워한 ‘부자’의 상이 아니던가. 우리가 어릴 때 영화 속 멋진 남자들을 보며 부러워한 것은 그가 엄청나게 많은 돈을 가져서가 아니라 돈을 자유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의 여유,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에디터 이윤정 (yoonjunglee@noblesse.com)
글 조승연(세계 문화 전략가) 이미지 사진 Sutterstock, Evere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