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것
스위스 엥가딘의 절경을 완성한 두 사람, 니체 그리고 세간티니.

장크트모리츠 바트지그날에서 본 엥가딘 계곡 전경.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는 신구 세대 여배우 세 사람의 현실적 존재감이 극중극과 치밀하게 얽히고설키는 수작이다. 연기파 대배우 마리아(쥘리에트 비노슈 분)는 20년 전 데뷔작인 연극의 재공연에 출연 요청을 받고 취리히에 도착한다. 그녀는 고인이 된 작가의 알프스 시골집에서 수행 비서 밸런타인(크리스틴 스튜어트 분)과 함께 지내며 연극을 준비한다. 극중극은 우울증에 빠진 선배와 당돌한 후배가 직장 내에서 갈등하는 내용. 초연 때 후배 역을 맡았던 마리아는 이제 선배 역이다. 까마득한 후배 역의 조앤(클로이 머레츠 분)은 할리우드 신인인데, 분방한 사생활로 벌써 주변이 시끄럽다. 연습 중 마리아와 밸런타인은 ‘말로야(Maloja)의 뱀’이라는 희귀한 자연현상을 보기 위해 하이킹에 나선다. 알프스의 찬 공기와 호수의 습기가 만들어낸 구름이 바람을 타고 협곡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모습이 뱀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하이킹을 하던 중 밸런타인은 매사에 자기중심적인 마리아를 시중드는 데 지쳐 말없이 사라진다. 그녀가 간 줄 모르는 마리아 앞에 때마침 보기 드문 장관이 펼쳐진다.

위쪽 세간티니의 유작 ‘생명’, ‘자연’. ‘죽음’ 3부작(왼쪽부터).
아래쪽 니체가 머물던 질바플라나의 호숫가.
니체, 깨달음을 얻다
‘말로야의 뱀’이 지나가는 엥가딘(Engadin) 계곡에는 장크트모리츠(St. Moritz)와 질바플라나(Silvaplana), 질스 마리아(Sils Maria)가 제 얼굴을 고스란히 비칠 호수를 끼고 이어진다. 지난가을 독일 남부, 스위스 여행의 종착지이자 궁극적인 목적지가 이곳이다. 나를 후미진 이곳까지 이끈 두 사람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와 화가 조반니 세간티니(1858~1899)다. 니체는 스물네 살에 박사 학위도 제대로 밟지 않고 바젤 대학 교수로 부임해 스위스에 왔다. 그의 뛰어난 학업 성취에 고무된 라이프치히 대학은 박사 논문 없이 학위를 수여했다. 그는 바젤에 10년간 머물며 뒷날 사상계에 폭넓은 영향을 미칠 생각을 싹틔웠다. 이 시절 니체가 쓴 가장 중요한 책은 <비극의 탄생>(1872). 아폴론의 이성과 디오니소스의 감성이 조화를 이룬 고대 그리스 비극이야말로 참다운 예술의 본보기이며, 현대 예술이 나아갈 길이라는 요지다. 니체는 리하르트 바그너를 바로 그런 예술의 수호자라고 생각했고, 작곡가가 사는 루체른을 예고도 없이 찾아가 책을 헌정할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1876년 바이로이트에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초연을 본 니체는 바그너의 보수적이고, 기독교적 세계관에 미래가 없다고 보고 결별을 선언한다.
바젤에 오기 직전 니체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처음 관람했다. 바그너가 작곡한 유일한 희극의 내용은 이렇다. 뉘른베르크의 기능공 조합이 주관한 노래 경연에 뜨내기 기사가 도전한다. 좌충우돌 끝에 우승한 기사는 아름다운 조합장의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기사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조합에 가입할 생각은 없다고 선언한다. 앞서 그의 숨은 재능을 알아보고 지도한 마이스터 한스 작스가 나서 조합의 전통과 권위를 무시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일동이 예술의 수호자인 작스를 뉘른베르크의 자랑으로 추앙하는 결말은 예술가 스스로 자기 장르의 주인공이 되는 ‘메타 예술’, ‘자기 성찰 예술’의 절정이다. 니체는 뒷날 바그너에게 등 돌린 뒤에도 평가를 뒤집지 않았다. 그는 저서 <선악의 피안>(1886)에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는 장엄하고 육중하며 현대적인 작품으로, 그것을 이해하려면 아직도 생명력을 지닌 지난 두 세기의 음악을 전제로 해야 하며, 그것이 이 작품의 자랑이다”라고 평가했다. 니체가 바그너와 결별한 이유도 더는 이렇게 현실에 발 디딘 작품을 쓰지 않고 신화와 종교로 회귀했기 때문이다. 바그너와의 불화 탓일까? 니체는 극심한 건강 악화 끝에 바젤을 떠나 유랑자가 된다. 그는 여름에는 알프스 고산지대로, 겨울에는 지중해 연안으로 옮겨 다니며 몸을 추슬렀다. 작품 예찬을 이어가던 니체는 이렇게 단락을 마친다. “독일인은 그제의 인간인 동시에 모레의 인간이지만, 그들에게는 오늘이 없다.” 나는 이것이 비단 당대 독일에 한정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제’는 떠나온 낙원인 ‘아르카디아’이며, ‘모레’는 다가올 낙원, 즉 ‘엘리시움’이다. 누구나 오늘을 살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니체는 엥가딘 계곡에 와서 그 사실을 깨달았고,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를 쓰며 세상에 외쳤다. 삶은 극복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 각성과 성장에 꼭 필요한 돌파구여야 한다고. 니체가 여름마다 지내던 질바플라나의 소박한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그의 자필 노트에서 ‘장크트모리츠의 생각들’(1879)이라는 유고를 발견했다. ‘나도 아르카디아에 있었다(Et in Arcadia ego)’라는 제목이 단박에 눈을 사로잡는다.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 니콜라 푸생이 그림에 적은 이 수수께끼 같은 문구는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와 쌍을 이뤄 유한한 인간의 필연적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니체는 이를 비관적이기보다는 현실에 충실하고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는 뜻으로 풀이한다. 니체는, 그리고 나는 웅장하고 고요하고 밝은 알프스에서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느꼈고, 목가적 풍경을 영웅적이라고 생각했다.
세간티니, 자연과 하나 되어
니체가 머문 자리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사람의 심미안을 지닌 예술가가 도착한다. 세간티니는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북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19세기 중반 이탈리아가 통일된 뒤 제대로 주민등록을 하지 않아 평생 무국적자 신세로 지냈다. 여섯 살에 고아가 되다시피 한 그는 밀라노 소년원을 거쳐 뒤늦게 브레라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의 재능은 돋보였고, 친구 카를로 부가티(아르누보 디자이너인 카를로의 아들 에토레 부가티가 바로 고성능 자동차 브랜드 창업자다)의 동생 비체(Bice)와 결혼한다. 가톨릭 혼례 성사를 거부해 배교자로 입방아에 오른 세간티니 부부였지만,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세간티니는 내가 유럽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만난 화가다. 세간티니는 고흐 이상으로 치열하지만 평온하고, 클림트보다 눈부시지만 세속적이지 않다. 취리히 쿤스트하우스와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에서 처음 그의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고, 밀라노 근대미술관을 찾을 때마다 그와 마주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가 생을 마친 장크트모리츠로 향했다. 세간티니 일가는 주위의 쑤군거림을 피하고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만나기 위해 알프스 험지에 찾아들었다.
아스타 샤이프가 쓴 세간티니의 전기 소설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것>은 화가의 발자취를 따르는 최상의 안내서다. 19세기 말 엥가딘은 외지인이 거의 찾지 않는 오지였지만, 세간티니는 직전에 니체가 머문 곳이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다. 보이는 곳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선악의 피안’ 같은 곳이다. 세간티니는 종종 한 철을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산속 샬레(오두막)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영혼의 눈으로 본 것을, 혈관에서 물감을 짜낸 듯 화폭에 옮겼다. 이곳에서도 불법체류자로 쫓겨날 위험에 처했지만, 그는 이제 대가였다. 지명보다 유명한 화가를 쫓아내는 것을 엥가딘 주민은 바라지 않았다. 세간티니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스위스를 대표할 그림을 출품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는 그때까지 그린 것 중 가장 큰 캔버스 세 폭을 주문해 ‘생명’, ‘자연’, ‘죽음’이라는 3부작을 시작했다. 산꼭대기 샬레에서 그림에 몰두하던 세간티니는 아내가 모친상을 치르러 밀라노에 간 사이 복막염으로 쓰러졌다. 비체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고, 그는 마흔한 살을 일기로 불꽃같은 생을 마감했다. 묘지에는 그에게 영향을 받은 빈 분리파 회원들이 보낸 추모 화환이 걸렸다. 세간티니는 생전에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이탈리아어판 표지를 그렸다. 그는 니체의 주문대로 ‘운명의 사랑’을 실천하며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자신을 각인했다.
사흘 동안 엥가딘에 머물면서 ‘말로야의 뱀’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산 위에서 내려다본 계곡에 여행 중 만난 거장들의 이름이 서로 뭉쳐 구름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프란츠 리스트가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O lieb, solang du lieben kannst)’에서 노래한 대로 후회 없이 사랑했다. 정말 그래야만 한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글·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