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키운 작가, 나를 키운 큐레이터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독야청청 홀로 유명해진 경우는 없다. 스타 작가 곁에는 탁월한 안목과 두둑한 배짱을 지닌 큐레이터가 늘 함께했다. 그리고 그런 큐레이터는 기가 막힌 원석을 발굴해 지금의 제이 조플링, 찰스 사치 같은 거물급 갤러리스트가 됐다. 천생연분인 예술계의 단짝, 환상의 파트너 다섯 쌍을 소개한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족적을 남기다, 박명자 & 박수근
갤러리현대의 박명자 회장은 박수근, 김기창, 천경자, 이중섭, 이우환 등 한국 현대미술 거장을 해외 미술관에 소개하고 그들이 작고한 후에도 매해 회고전을 개최하는 등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위해 무척이나 힘써온 인물이다. 박 회장은 김기창, 도상봉, 천경자 등 친하게 지내던 화가들의 권유로 1970년 인사동에 화랑을 열었다. 그녀는 현대화랑(현 갤러리현대)을 설립하기 전 1961년부터 9년간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화랑인 반도화랑(현 롯데호텔갤러리 자리)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며 미술계에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당시 박수근 화백은 반도화랑을 사랑방처럼 이용하던 작가 중 한 명이었는데, 늘 남루한 차림으로 와서 어린 미스 박(박명자 회장)을 옆에 앉혀두고 그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박명자 회장은 박수근 화백이 들려준 작가적 고뇌와 작품 이야기 등을 통해 그의 작품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됐으며 더불어 작가에 대한 애정 또한 키워갔다.
1960년대에 박수근 화백의 작품 가격은 1점당 6000원 정도로 한 달에 2~3점씩 꾸준히 팔리고 있었다. 박수근 화백은 화랑에서 작품값을 받은 날이면 늘 그 돈을 들고 곧장 술집으로 향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큐레이터로 근무한 당시 제 월급이 2000원이었어요. 당시 박수근 화백 작품을 1점도 못 사둔 게 아쉽죠.(웃음) 박수근 화백을 가까이서 봐온 제 입장에선 그분이 말년에 외롭고 가난하게 지내다 가신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세상을 떠난 후 박수근 화백의 전시를 총 다섯 번 기획했는데, 마지막 전시는 2010년에 개최한 <박수근 45주기 기념전>이었어요”라며 20대 초반의 ‘미스 박’ 시절부터 70대가 된 지금까지 박수근 화백과 함께한 추억을 회상했다.
당시 반도화랑이 자리한 반도 호텔에 투숙한 외국인들은 한국 특유의 서민적 감수성과 소재, 화강암 재질 같은 두터운 마티에르 기법에 매료돼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 ‘누이’, ‘굴비’, ‘아낙네’ 등을 구입하기도 했다. 생전에 혹독한 생활고를 겪은 박수근 화백은 박명자 회장이 시집갈 때 작품 1점을 꼭 선물하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박 회장이 결혼식을 올리기 1년 전에 간경화가 악화되어 1964년 5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 후 박명자 회장은 갤러리현대에서 박수근 회고전을 대대적으로 개최하고 박수근 화백의 도록 출판과 전시 홍보에 힘을 쏟아 그가 가난한 무명 화가에서 ‘국민 화가’로 거듭나는 데 일조했다. 그에 힘입어 박수근 화백의 작품은 해마다 몇십 배에서 몇백 배까지 가격이 오르며 해외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작가, 한국의 대표적 현대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박명자 회장은 박수근 화백이 작고한 후 2002년 설립된 박수근미술관에 박수근 화백의 유화 작품을 비롯해 본인의 애장품을 무려 55점이나 기증하며 한국의 근현대 작가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영국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다, 제이 조플링 & 트레이시 에민
오늘날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이슈를 몰고 다니는 여성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일 것이다. ‘고백의 여왕’이라는 닉네임을 얻은 그녀는 쉽게 꺼낼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영국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작가다. 그녀는 텐트 안에 자신과 잠자리를 한 애인과 남성, 가족, 낙태한 아기 등 102명의 이름을 수놓은 작품 ‘나와 함께 잔 모든 사람들 1963~1995’, 자신의 침대를 전시장에 옮겨 논란의 대상이 된 ‘나의 침대’ 등 파격적이고 직설적인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는 열세 살 때 성폭행을 당한 후 거리를 떠돌던 어두운 과거를 오롯이 표출한 것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일곱 살 되던 해에 집안이 몰락한 불후한 가정 환경은 이렇듯 그녀의 작품 활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절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이었지만 그녀는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원 시절 두 번의 낙태를 경험하면서 1992년 미술계를 영원히 떠나겠다 마음먹고 모든 작품을 파기, 미술 활동을 접었다. 당시 파기한 작품은 뭉크와 에곤 실레의 영향을 받은 감성적인 표현주의 회화였다. 좌절의 시간을 보내던 중 절친한 친구 세라 루커스가 찾아왔고, 그녀의 끈질긴 설득 끝에 1993년 둘은 런던 동부에 작은 가게 ‘더 숍’을 열고 드로잉과 조각, 엽서 등의 작품을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수익이 나지 않자 영국 내 미술인에게 20파운드씩 후원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영국 최대 갤러리 화이트 큐브의 설립자이자 최고의 큐레이터인 제이 조플링(Jay Jopling)도 그 편지를 받았고, 자신의 상처를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예술로 승화시킨 트레이시의 작품을 본 순간 그는 그녀의 예술 세계에 매료됐다.
제이 조플링은 의기소침해 있던 트레이시를 끊임없이 설득해 1994년 화이트 큐브에서 첫 개인전을 열도록 도왔다. 전시장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개인적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낙서와 일기, 어린 시절의 사진 등 지금까지 생을 회고하는 오브제로 채워졌다. 젊은 작가의 첫 개인전임에도 <나의 회고전>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시작부터 주목을 받은 이 전시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며 트레이시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현대미술에 대한 앞선 안목과 과감한 도전으로 기획한 이 전시는 서로에게 윈윈 결과를 가져오며 제이 조플링의 큐레이팅 실력을 다시 한 번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둘은 20년 가까이 서로에게 최고의 후원자이자 파트너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현대미술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다. 자유분방하고 거칠고 직설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트레이시 에민은 제이 조플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알고 지낸 지 20년째고, 함께 일한 지는 19년이다. (중략) 미술계에서 작가와 큐레이터가 이렇게 트러블 없이 잘 지내는 일은 극히 드물다. 보통은 잘나가다 틀어지거나 엎어지는데 우린 일적인 관계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잘 통하고 세월이 지날수록 서로에 대한 믿음이 더 단단해져간다. 내가 괴성을 지르든 술에 취해 싸움을 하든 내가 그의 삶에서 중요한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영국 현대미술의 부흥기를 가져오다, 찰스 사치 & yBa
명실공히 현재 컨템퍼러리 아트의 최대 이슈 메이커인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는 1988년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들과 함께 <프리즈> 전시를 기획했다. 당시 영국은 마거릿 대처 수상이 예술계 예산을 대폭 삭감해 기성 작가들에 대한 지원이 끊긴 참담한 상황이었다. 20대 초반의 가난한 미대생들은 런던 외곽의 허름한 창고를 빌려 전시를 열곤 했는데, <프리즈>전도 그런 전시의 일환이었다. 데이미언 허스트, 마크 퀸, 게리 흄, 트레이시 에민, 세라 루커스 등 미대 졸업생들이 도전적으로 기획한 이 전시는 특정한 흐름이나 공통점 없이 자유분방하고 재치 있는 주제로 새로운 개념의 미술을 선보이며 런던 미술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당시 이 파격적인 전시에 꽂힌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세계 최대 광고 회사인 사치 앤 사치의 대표이자 사치 갤러리의 운영자인 찰스 사치(Charles Saatchi)다. 그는 전시에 출품된 학생들의 작품을 모두 사들인 것을 시작으로 그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소장하고 적극 후원하며 큐레이터와 딜러로서 동시에 이름을 날렸다. 1992년 사치는 사치 갤러리에서 ‘Young British Artists(yBa)’라는 타이틀로 그동안 소장해온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하며 세계 현대미술이 런던, 아니 yBa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새 시대를 알렸다. 무명의 젊은 작가를 발굴해 스타로 만드는 그의 놀라운 큐레이팅 실력은 그 후 1997년 런던 로열 아카데미에서 열린 <센세이션(Sensation)> 전시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yBa는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동시에 상업적인 성공도 이뤘다.
현재 영국 현대미술의 국제적 위상은 yBa의 출현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검증되지 않은 풋내기 작가들의 작품을 통 크게 사들이고 전시를 통해 프로모션한 찰스 사치의 뛰어난 안목과 노력이 없었다면, 이들은 지금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데이미언 허스트는 인터뷰를 통해 “찰스 사치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것이다. 그는 내 작품이 제대로 검증되기도 전에 ‘내가 다 살 테니 원하는 대로 마음껏 만들어보라’고 했다. 그때 그 한마디가 죽은 소 머리를 유리 상자에 넣어 파리를 키우고, 반 토막 난 상어를 전시장에 가져다놓을 수 있는 용기를 북돋워줬다”고 말했다. 데이미언 허스트를 위시한 yBa 작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인 찰스 사치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을 기꺼이 수용하고 대중에게 적극 소개하는 등 꾸준한 프로모션을 통해 영국 미술을 세계 미술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지금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제2의 yBa 신화를 창조해낼 새로운 작가와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후원하고 있다.

국제 무대에 K-아트를 알리다, 티나 킴 & 정연두
미국 뉴욕에서 ‘K-아트’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티나킴 갤러리’의 김태희 대표(일명 티나 킴)는 한국 현대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교두보 역할을 해온 국제갤러리 이현숙 회장의 장녀다. 그녀는 미술계의 ‘큰손’으로 불리는 어머니 밑에서 체계적으로 큐레이팅을 배웠고, 탄탄한 인맥과 예술적 안목을 바탕으로 국제적 큐레이터로서 자질을 차곡차곡 다져나갔다. 뉴욕에서 공부를 마친 후 2002년 세계 미술의 심장부인 뉴욕에 당당히 갤러리를 오픈한 그녀는 한국의 젊고 역량 있는 작가들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일을 가업이자 사명으로 여겼다. 현재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는 양혜규, 강임윤, 김홍석, 정연두 등의 한국 작가를 발굴해 프로모션하는 데 일조한 인물이 바로 그녀다.
특히 티나 킴은 2004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정연두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후 어머니인 이현숙 회장에게 소개해 2008년 국제갤러리에서 정연두 개인전을 개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같은 해 마이애미 아트 페어 부스에 정연두 작가의 85분짜리 영상 작품 ‘노스탤지어’를 소개하는 자리도 마련했는데, 때마침 부스에 들른 뉴욕 현대미술관 큐레이터의 눈에 띈 정연두의 작품은 미술관 관계자들의 호응을 얻어 약 4만 달러에 판매, 미술관 소장품으로 결정됐다. 그뿐이 아니다. 티나 킴은 2007년과 2009년 뉴욕에 있는 자신의 갤러리에서 정연두 개인전을 열어 뉴욕의 미술관과 컬렉터들에게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던 2012년, 정연두 작가의 작품 세계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6월 미국 월간지 <아트 앤 옥션>에서 선정한 ‘가장 소장가치 있는 50인의 작가’에 아시아계 작가로 유일하게 정연두 작가가 이름을 올린 것이다. <아트 앤 옥션>에서는 “정연두 작가가 사진과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현실적 주제를 실현하고 판타지적 주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점을 높이 샀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사실 여기에는 티나킴 갤러리의 도움이 있었다. 2012년 티나킴 갤러리가 뉴욕 첼시로 이전한 후 첫 번째 전시로 정연두 개인전을 기획했는데, 이 전시가 뉴욕의 아머리 쇼 기간과 맞물리면서 세계 미술계 인사와 컬렉터들이 찾아와 정연두 전시를 관람하고 호평을 보낸 것이다. 당시 <아트 앤 옥션>은 이 전시에서 소개한 작품 ‘식스 포인츠’를 언급하며 앞으로 행보가 기대되는 작가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가능성이 보이는 원석을 찾아 시기적절하게 프로모션한 티나 킴의 뛰어난 안목과 노력이 빚어낸 성과였다.

뉴욕에 현대미술 바람을 몰고 오다,페기 구겐하임 & 잭슨 폴록
유대인 출신의 억만장자 철강업자인 벤자민 구겐하임이 타이태닉호 침몰로 사망하자 그의 둘째 딸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은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에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박물관을 두루 다니며 작품을 보는 안목을 키워왔다. 세계 3대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관장이 그녀의 삼촌인 솔로몬 구겐하임인 것만 봐도 집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녀가 미술계에 몸담게 된 것은 어쩌면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예술에 대한 안목과 재력을 기반으로 예술가를 후원하고 작품을 수집하며 미술계의 떠오르는 인사가 됐다.
그녀는 1938년 런던에 구겐하임 죈 갤러리를 열고 본격적인 작품 컬렉션을 통해 유럽에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이후 1942년 뉴욕으로 돌아와 유럽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금세기 미술 화랑’을 열고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미술계에 소개했다. 그녀의 이런 활동은 그동안 파리 중심이던 현대미술을 뉴욕으로 옮겨와 유럽의 초현실주의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접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 미술계는 그녀가 기획한 다수의 전시와 큐레이팅 능력을 극찬했다. 그녀는 특히 ‘뉴욕화파’라 불리는 알렉산더 콜더, 빌럼 데 쿠닝, 마크 로스코 등의 전시를 열며 주목을 받았는데, 당시 무명이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재능을 발견해 ‘미국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만든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잭슨 폴록은 훗날 자신이 페기에게 이용당했다고 종종 언급하곤 했지만 그녀가 폴록에게 보여준 열정과 후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잭슨 폴록을 위해 1930년대 대공황기에도 매달 150달러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기꺼이 전시를 열어준 것은 물론이고, 유명 컬렉터와 큐레이터에게 소개하며 잭슨 폴록과 그의 작품에 대한 신뢰를 보여줬다. 또 폴록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작품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폴록은 미국 화가 중 가장 기대되는 사람”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닐 정도로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무한한 신뢰를 보여준 사람이 바로 페기 구겐하임이다.
사실 페기 구겐하임의 남성 편력은 유명하다. 그녀의 남편인 초현실주의 작가 막스 에른스트, 연인이던 이브 탕기 외에도 마크 로스코, 알렉산더 콜더, 살바도르 달리 그리고 잭슨 폴록과도 염문을 뿌리며 수많은 화가의 파트너이자 연인으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아마도 폴록이 그녀에게 이용당했다고 회고하는 것도 그녀와의 사적 관계에서 느낀 배신감 혹은 좌절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녀는 작가들과 연인 관계가 끝난 후에도 변함없는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폴록의 친구인 화가 제롬 캄로스키가 “폴록이 그녀와 계약을 한 것은 월드 시리즈에서 홈런을 친 것과 같다”고 표현했을 정도니 말이다.
에디터 심민아
글 황규진(큐레이터) 일러스트 장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