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로 가는 옛길
고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그 가치의 중요성을 찬양하다가, 요즘 같은 세상에 고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투덜거린다.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이명학을 만났다. 그에게 ‘고전 강독’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물었다.
“남 앞에선 쉬워도 나만 아는 일에선 어려워(人知猶易獨知難)/ 한 생각 하는 사이에 별별 생각 다 든다(雷雨雲星一念間)/ 방구석에 있을 때도 떳떳할 수 있다면(如令屋漏常無愧)/ 구태여 설산에서 고행할 것 뭐 있겠나(苦行何須入雪山)” 조선 말기 유학자 이진상의 글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산책 메일링 서비스’로 메일함에 도착한 한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설산으로 고행을 떠나는 일은 차치하고, 혼자 방에 있을 때 세상을 향한 떳떳함을 고민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뒤통수가 찌릿했다. 무릇 고전의 덕목이란 혼미한 마음을 단련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제 뜻의 물꼬를 트는 데 있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고전은 기이한 팔자를 타고난다. 누구나 알고 있고 중요하다 입을 모으지만, 누구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는다는 게 고전의 숙명이자 함정이다. 번역원의 메일링 서비스가 아니었다면, 이진상의 저 글귀를 영영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한국고전번역원은 “선조의 정신문화를 담은 한문 고전을 수집·정리·번역하며, 전통문화를 계승·발전하는 일”을 위해 운영하는 정부 산하 기관이다. 1965년 원로 학자와 예술가 50여 명이 한국의 고전 문화유산이 사장될 것을 우려해 뜻을 모아 창립했다. 민간/개인 단체에서 사단법인으로 운영해오다, 우여곡절 끝에 2007년 교육부 산하 학술 연구기관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동안 번역원은 역사 문헌부터 개인 문집까지 총 1300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중요한 국가 기록도 포함돼 있다.
2014년부터 3대 원장으로 번역원을 이끌어온 이명학은 취임사에서 신청사 건립, 고전번역대학원대학교 신설, 번역원의 위상 제고와 연구원의 처우 개선 등을 임기 3년간 추진할 과제로 제시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가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성과는 무엇일까. “번역원의 숙원 사업이던 신청사 건립을 마침내 확정했어요. 정부에서 예산 200여 억 원을 집행해 은평구 뉴타운에 1000평 규모의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2017년 봄 개관을 목표로 건립을 추진 중이에요.” 이 밖에 그는 북한의 민족고전연구소와 공동으로 한국 고전을 번역하는 사업과 번역원의 맞춤형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여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남북 공동 번역의 첫 프로젝트로는 함경도의 지리지를 선택했다. 이념적 요소가 배제된 문헌을 고르다 보니 그중에서 골랐다. “민족고전문고를 만들어 남북한의 초·중·고교 학생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을 펴내고 싶어요. 고전을 번역하는 남북의 방법이 달라서 그 방식에 관한 학술회의도 준비 중입니다.”
이명학 원장은 행정가보다는 명강의를 펼치는 교수로 유명하다. 2011년 성균관대학교 티칭 어워드를, 2012년 제‘ 1회 대한민국 스승상’을 받았고, SBS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와 한국교육개발원이 공동 주최한 ‘100대 좋은 대학 강의상’을 수상했다. ‘한자와 한문의 세계’라는 강의는 SBS를 통해 전국에 방영되기도 했다. 고고학도를 꿈꾸던 그가 한문학에 푹 빠진 계기는 뭘 까. 그는 대학교 2학년 무렵 한문학을 죽자 사자 딱 1년만 파보자는 마음으로 안성의 칠장사 (七長寺)를 찾았다. 궁예와 임꺽정, 어사 박문수의 전설적 이야기가 전해지는 그곳에 <사서삼경>을 들고 갔다. 그렇게 그는 고전의 무궁무진한 재미에 푹 빠졌다. 1983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자 마자 강의를 시작해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로 고전 탐독을 통한 인성 교육 활동을 펼쳤다.
이명학표 강의의 목표는 간단명료하다. 학생들이 한자를 옳게 배워서 우리말을 정확하게 쓰게 하는 것. 한자 교육이 무슨 대수냐 물을 수도 있지만, 한글 어휘 중 70%가 한자어다. 30년 가까이 누군가 가르쳤지만, ‘한글 세대’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자 한 글자를 몰라도 사는 데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정확한 개념을 아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우리말을 잘 알아야 다른 공부도 잘할 수 있습니다. 강의에 처음 들어가면 학생들에게 ‘대각선(對角線)’의 뜻을 아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다들 말을 못하고 손으로 사선을 그어요. 한자를 모르니까 설명을 명확히 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는 한자뿐 아니라 한글 세계화에도 앞장서왔다. 2007년 중국에서 개최한 ‘제1회 한글 백일장’은 몽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베트남 등으로 확대해 시행했다. 한글 백일장에 참여한 많은 학생은 주한 대사관이나 한국 대기업에 입사하는 등 친한파로 성장해 한국을 선망하는 청년의 훌륭한 롤모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그는 새터민 대학생과 다문화 가정 자녀를 위한 멘토링 제도 정착을 주도했다.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상생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코‘ 리안 드림’을 꿈꾸는 아시아 청년과 새터민, 다문화 가정의 아이는 또 다른 우리입니다. 그들을 백안시하면 그 부메랑이 돌아올 거예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 가치가 고전에 다 들어 있어요.”
커브드 디스플레이로 처리한 비전 메르세데스-마이바흐 6
고전, 생각을 담금질하다
이명학 원장은 교육자로서 고전 강독을 통해 학생들이 올바른 길을 찾도록 도움을 주는 일을 과업으로 삼았다. 그 실천이 한국고전번역원의 원장을 맡으며 범국가적 차원으로 확장된 셈이다. 그는 고전을 “시대를 불문하고 변함없이 읽히는 책”으로 정의했다. “<성경>, <불경>, <도덕경>, <사서오경> 등 우리가 익히 아는 고전에는 경‘ (經)’이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경’은 변함없는 날줄을 의미해요. 2000년이 지난 그 책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통용되는 건 인간의 동물적 DNA가 바뀌지 않았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고전을 읽으면 선인의 지혜와 정서,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시대를 산 그들의 아픔, 모순, 고민이 보이죠. 시대정신이랄까요.” 그는 우리가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강조하면서 평소 고전을 통해 평상심을 다진다는 중국 바둑 랭킹 1위인 스웨(時越) 9단을 예로 들었다. “바둑 대국에서는 욕심을 내는 순간 무너져요. 스웨처럼 고전을 읽으면 마음과 생각의 담금질을 할 수 있어요.” 그에게 <노블레스>의 독자를 위해 고전명문을 한 구절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에 나오는 말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의미다. 그 추천의 변을 물으니, 고전을 연구하며 평생 몰두한 화두인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라 말했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사진 권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