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누구도 만들지 않는
일상이 된 현대적 장난감인 스마트폰으로 만든 요 근래 눈여겨볼 만한 영화.

지난해에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영화 <우회>를 공개한 미셸 공드리 감독.
스마트폰으로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자신이 찍은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수십, 수백만 명의 팬을 만드는 일도 흔하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요샌 적지 않은 이가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찍는다. 걸출한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싶지만 장비가 없다며 연장 탓을 하던 이도 이젠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스마트폰으로 만든 영화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영화제 출품작을 통해 그 추이를 대략 가늠할 수는 있다. 현재 스마트폰 영화제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아이폰필름페스티벌(iPhone Film Festival)은 월평균 100여 편의 작품이 출품되고, 스마트폰 영화를 필요로 하는 기존 영화제도 갈수록 늘고 있는 추세다. 요샌 스마트폰으로 높은 퀄리티의 작품을 만든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만 몰두하려 하지 않는다. 철학자 발터 베냐민의 말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제 오른손이 아니라 결정적 펀치를 날릴 왼손, 케케묵은 공론을 날려버릴 즉흥적인 강력한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에게 안성맞춤인 장난감은 스마트폰이다. 필요가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현대적 장난감. 여기 소개하는 영화는 그 장난감으로 촬영한 요 근래의 화제작이다.

미셸 공드리 특유의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돋보이는 <우회>의 제작 현장.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을 활용한 미셸 공드리의 <우회(Detour)>(2017년)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년)과 <수면의 과학>(2006년), <비카인드 리와인드>(2007년) 같은 수려한 영상미의 작품을 만들어온 미셸 공드리가 아이폰7으로 찍은 단편영화다. 영화의 제목이 지도 위에 그려지는 첫 장면은 미셸 공드리가 아이폰 스톱모션 기능을 이용해 직접 쓴 글자로 만든 것이며, 영화 속 모든 영상을 아이폰으로 촬영했다.
영화는 한 가족의 여행을 그린다. 가족 여행에 세발자전거를 꼭 가져가야 한다고 딸이 우기는 바람에 자동차에 자전거를 싣게 되고, 그것이 잘 고정되지 않아 도중에 떨어져버린다. 이 사실을 모른 채 가족은 주유소에 도착하고, 딸은 자신의 세발자전거가 사라진 것을 보고 크게 소리친다. 공드리 영화의 팬이라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영화는 이때부터 이 가족의 여행과 더불어 자전거의 여정을 따라간다. 어떻게? 자전거는 신기하게도 바람에 이끌려 주인에게로 ‘우회’해 돌아온다. 너무나 사랑스러우면서 뭉클한 이야기.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따뜻한 파란빛이 화면 전체를 감싼다. 몇몇 장면은 아이폰으로 찍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렬하며, 색상의 선명함은 물론 어두운 부분의 그러데이션 표현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외에도 타임랩스, 수중촬영, 슬로 모드 같은 기능을 사용해 다양한 연출을 시도했다. 공드리는 자신의 이전 작품 <무드 인디고>(2013년)의 사운드트랙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작곡가 에티엔 샤리(Etienne Charry)에게 곡을 부탁해 영화의 묘미를 한층 끌어올렸다. 그 때문에 기존 영화에 견줘도 전혀 손색없는 영상과 사운드를 자랑한다. 이 사랑스럽고 기발한 판타지 어드벤처 영화를 다 보는 데 고작 10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잔잔한 잔상이 파도처럼 오래 물결친다. 이 영화는 현재 유튜브를 통해서도 관람 가능하다.

2015년 선댄스 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이 된 스마트폰 촬영 영화 <탠저린>의 포스터와 제작 현장.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촬영해 여러 상까지 받은 숀 베이커의 <탠저린(Tangerine)>(2015년)
지난 1월 국내에서 개봉한 이 영화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 없다. 2008년 밑바닥 불법체류자의 삶을 통해 희망을 얘기하는 <프린스 오브 브로드웨이>로 단숨에 평단의 주목을 받은 미국 출신 영화감독 숀 베이커는 아이폰5s에 애너모픽 렌즈를 장착해 촬영했고, 영화는 2015년 선댄스 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이 되었다.
트랜스젠더 신디가 남자친구에 관한 소문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친구 알렉산드라와 함께 크리스마스이브에 LA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소동을 그린 작품. 이 영화에서 신디 역의 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즈와 알렉산드라 역의 마이아 테일러는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낙점한 실제 트랜스젠더 배우다. 아이폰 카메라는 택시 조수석에서 운전석과 뒷자리를 훑고, 주인공들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쫓는다.
감독이 각본, 연출, 촬영, 편집, 배역 그리고 제작까지 맡은 이 작품은 특히 영화 전체를 휘감는 빛과 색이 인상적이다. 아이폰이 흡수한 자연광은 영화 제목이 가리키는 대로 화면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이는데,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오렌지 사탕 느낌이 나는 아이폰5s 특유의 강렬한 촬영 톤 때문에 귤을 뜻하는 ‘탠저린’을 제목으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뛰어난 영상미를 자랑하는 이 영화와 관련한 여러 뉴스 중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이야기는 이런 것일 거다. “바로 당신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이는 감독 숀 베이커가 수많은 영화 시사회에서 같은 질문을 해온 기자들 앞에서 한 대답이다.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숀 베이커는 사실 순전히 제작비 절감 문제로 이 영화를 아이폰으로 촬영했다.

발리우드의 떠오르는 감독 쉬록 샤르마의 <동물원> 포스터와 스틸 컷.
인도 스마트폰 촬영 영화의 미래, 쉬록 샤르마의 <동물원(Zoo)>(2017년)
뭄바이 출신 감독 쉬록 샤르마는 비샬 바드와즈와 아누라그 카시압 등의 유명 영화감독 조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해 지난해에 처음으로 장편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이폰으로 촬영한 이 작품이다. 영화는 제목과 달리 동물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 죄책감으로 마약에 빠진 10대 소녀, 마약 판매상이자 웨이터인 형과 철없는 동생, 그리고 투팍과 BIG를 좋아하는 두 래퍼가 어울려 살아가는 출구 없는 지옥이자 거대한 쓰레기 더미 같은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각자의 생존 방식에서 위기에 처한 다섯 인물의 이야기는 중독과 관련이 있다. 마약은 곳곳에서 거래되며, 단속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도움이 될 만한 어른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철창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동물원의 동물들처럼 말이다.
감독 쉬록 샤르마는 이 영화를 오직 아이폰6로만 촬영했다. 그것도 다른 장비의 도움 없이. 기본적으로 문맹률이 상당하고 TV가 비교적 늦게 보급돼 아직도 TV가 없거나 희귀한 시골이 남아 있는 인도에선 지금도 온 마을 사람이 모여 보는 영화가 중요한 유희거리인데, 이곳에서도 이젠 스마트폰으로 쉽게 영화를 만든다. 쉬록 샤르마는 한 인터뷰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한 영화 촬영이 ‘가능한 정도’의 수준이 아니고 ‘아주 좋은’ 수준이라 결과물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해마다 수천, 수만 명의 영화감독 지망생이 나오는 인도 영화계에서 이 사실은 감독 지망생은 물론 일반인도 누구든 영화 제작자가 될 수 있다는 귀감이 되었다. 한 가지 더, 평소 인도 영화에 대한 ‘편견’이 있는 이들을 위해 한마디 한다면, 이 작품은 인도 영화 특유의 쓸데없이 큰 스케일과 일반적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 못할 단체 군무 등을 무기로 한 ‘그런’ 영화가 아니다.

영화감독 말리크 벤디엘로울이 스마트폰으로 일부를 촬영한 <서칭 포 슈가맨>의 OST.
주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말리크 벤디엘로울의 <서칭 포 슈가맨(Searching for Sugar Man)>(2011년)
‘꼭 봐야 할 베스트 음악영화’ 순위에서 늘 상위에 이름을 올리는 작품. 이 영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유명한, 그러나 막상 앨범이 처음 발매된 미국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로드리게스라는 가수를 찾아가는 얘기다. 두 장의 앨범을 내고 더는 가수로 활동하지 않는 로드리게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신을 찾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자신이 그곳에서 전설적 가수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런 그가 초청을 받아 가족과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고, 그곳에서 잊지 못할 콘서트를 연다는 게 영화의 큰 줄기. 그런데 대체 이 영화의 어느 부분을 스마트폰으로 찍었느냐고?
바로 영화 초반 ‘디트로이트 술집에서 노래하는 슈가맨을 프로듀서가 만나는 장면’이다. 애초에 제작비를 넉넉히 투자받지 못한 감독 말리크 벤디엘로울이 슈퍼8 카메라로 촬영하다 돈이 떨어지자 자신의 아이폰5로 영화를 마무리한 것이다. 슈퍼8 대용으로 감독은 1달러를 주고 아이폰에서 슈퍼8 앱(8mm Vintage Camera App)을 다운받아 영화를 완성했다. 영화에서 굉장히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인 이 장면을 부족한 제작비 때문에 아이폰으로 찍었다고 했지만, 사실 일각에선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감독의 숨은 의도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뛰어난 영상미와 다큐멘터리 영화임에도 자꾸 빠져들게 되는 스토리. 이미 많은 이가 알고 있지만 이 영화는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그뿐 아니라 영화를 통해 재조명한 ‘슈가맨’의 명곡으로 구성한 <서칭 포 슈가맨> OST도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다.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 촬영 상업 영화로 기록된 박찬욱과 박찬경 감독의 <파란만장>.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 영화, 박찬욱•박찬경의 <파란만장(Night Fishing)>(2010년)
영화감독 박찬욱과 미술가 박찬경 형제가 만든 파킹찬스의 첫 작품이자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스마트폰 영화. KT가 스마트폰 홍보의 일환으로 제작 후원을 약속해 만든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 촬영 상업 영화로 아이폰4로 촬영했다는 점 외에도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요소로 가득하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밴드 어어부프로젝트는 뮤직비디오의 느낌을 내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시작을 알리며, 줄거리는 아주 의미 있는 반전을 담고 있다.
태풍이 다가오는 어느 밤 혼자 물가에서 낚시를 하던 남자가 소복을 입은 귀신을 낚은 후 육탄전을 벌이는 중반부가 지나고 나면, 지금까지 본 이야기가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딸마저 데려가려는 망자를 위해 굿판을 벌이는 상황에서 기인했음이 밝혀지는데…. 영화 <꽃잎> 이후 이정현이 말 그대로 신들린 듯한 무당 연기를 다시 한번 살 떨리게 펼쳐 많은 주목을 받았고, 영화는 제61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단편영화 부문 황금곰상을, 제44회 시체스 영화제에선 오피셜놉스 비전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아이폰4로 찍었다고 해서 촬영 규모가 축소되거나 연출의 폭이 좁아진 건 아니다. 박찬욱과 박찬경 감독은 카메라만 아이폰4를 사용했을 뿐, 이외의 모든 요소는 기존 영화처럼 장비를 사용했다. 단, 아이폰4로 촬영하면서 현장에서 이동 시 이전에 없던 간편함을 누리게 되었다. 또 이 영화는 스마트폰으로 찍었음에도 극장 개봉으로 이어져 훗날 영화 제작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기틀이 되었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리키 포셰임 감독의 공포 영화 < Uneasy Lies theMind >.
그 밖에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영화
인터넷에서 만난 룸메이트와 벌이는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담은 제이 알바레즈 감독의 2013년 영화 < I Play with the Phrase Each Other >는 아이폰으로 촬영해 2014년에 메릴랜드 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했고,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담은 리키 포셰임 감독의 공포 영화 < UneasyLies the Mind >(2014년)도 아이폰5로 촬영해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더불어 지난해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관왕을 차지한 <라라랜드>(2016년) 역시 중요 장면의 리허설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힌트는 ‘Another Day of Sun’이란 노래에 맞춰 고가도로 진입로를 배경으로 젊은이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첫 장면이다. 3개월 동안 연습해 3주 이상 LA 고속도로에서 촬영한 이 장면의 리허설은 필름 카메라가 아닌, 감독 데이미언 셔젤의 아이폰으로 찍었다. 이 장면의 리허설 영상은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