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최강의 화랑,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다
Pace Gallery
세계경제를 강타한 경기 침체로 힘을 잃어가는 갤러리가 적지 않다. 뉴욕 첼시와 런던의 헌치 오브 베니손 갤러리가 지난 3월 폐관했고 줄리언 애그뉴 갤러리도 곧 문닫을 것이라는 씁쓸한 소식이 들려온다. 전례 없는 경제 위기에도 세계 미술계에서 굳건한 파워를 과시하고 있는 대형 갤러리가 있으니 바로 페이스 갤러리다. 50년 넘게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뉴욕 메이저 화랑 페이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가고시안과 함께 1세대 갤러리의 대표 얼굴이 된 페이스, 반세기를 살아온 페이스의 아트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2010년 뉴욕에서 열린 페이스 갤러리 50주년 기념전 <50 Years at Pace>
‘페이스’라는 이름의 가치
“작가는 수요에 따라 자신의 작품 가격 수준을 정해야 한다.” “미술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바보다. 작품을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로 여긴다면 구입하는 것이다.” 세계 미술계를 향해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이고 당당히 예술 철학을 피력하는 한 갤러리스트가 있다. 글로벌 아트 마켓이 그의 말에 주목하고 그의 휘하에 있는 거물급 작가들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바로 페이스 갤러리의 수장 안 글림처(Arne Glimcher) 대표다.
미국 1세대 갤러리를 대표하는 페이스는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이스에서 전시를 하거나 소속 작가가 되는 순간 작품값이 오르고, 전 세계 컬렉터들이 페이스의 안목을 지표로 삼아 컬렉팅을 한다. 이런 엄청난 효과는 하루아침에 거저 주어진 게 아니다. 50여 년간 일관되게 보여준 미술을 향한 열정과 작가에 대한 존중 그리고 대를 이은 체계적 갤러리 운영 노하우 등 여러 조건이 맞물려 현재의 페이스를 만든 것이다.
글림처 대표의 능력은 이미 외국에까지 알려져 있다. 2003년 프랑스 대통령에게 최고 명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의 ‘슈발리에’ 등급을 받은 데 이어 최근 한 단계 높은 ‘오피시에’ 등급까지 받았다. 뉴욕에서 갤러리를 일구고 런던과 베이징에 연고를 둔 미국 출신 갤러리스트가 예술의 본고장 프랑스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건 분명 주목할 만한 일이다. 수상 이유는 이렇다. 세계 미술에 활력을 불어넣은 모범적 헌신과 프랑스 예술기관에 대한 아낌없는 기부 등 프랑스 문화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것. 페이스 갤러리는 그간 피카소부터 피에르 보나르, 장 뒤뷔페, 로리 그레오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근현대 작가의 전시를 꾸준히 개최해왔다. 최근에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꼽히는 프랑스 현대미술의 거장 장 뒤뷔페의 개인전
50여 년간 700회가 넘는 전시를 개최해온 페이스 갤러리의 글림처 대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로 50주년 기념전 <50 Years at Pace>를 꼽는다. 2010년 9월 뉴욕 갤러리 4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한 이 전시는 포스트모던, 미니멀리즘, 21세기 미술, 팝아트를 주제로 알렉산더 콜더, 빌렘 데 쿠닝, 척 클로스, 로버트 휘트먼, 피카소, 짐 다인, 로버트 라우션버그, 리처드 세라, 케이스 타이슨, 재스퍼 존, 장샤오강, 장후안 등 페이스를 거쳐간 대가들의 작품 수백 점을 선보여 큰 이슈가 됐다. 2005년 자코메티의 대규모 회고전
1 페이스의 오랜 소속 작가 짐 다인의 피노키오 조형물 ‘Model for Korean Pinocchio’
2 루마니아와 독일을 오가며 활동 중인 페이스의 소속 작가 아드리안 게니의 작품 ‘Persian Miniature’
3 미래가 기대되는 인도 작가 라퀴브 쇼의 작품 ‘Raqib Shaw’
‘이름값’ 하는 페이스의 작가들
알렉산더 콜더, 제임스 터렐, 짐 다인, 루카스 사마라스 등 현재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정상급 현대미술 작가 70여 명이 수십 년 동안 페이스와 함께했다. 그렇다면 페이스 갤러리는 어떤 식으로 작가들과 신뢰를 쌓고 관계를 유지할까? 이들이 페이스를 믿고 따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 뻗어 있는 대규모 전시 공간과 안정적이고 탄탄한 갤러리 운영이 오래 머물고 싶은 갤러리로 만드는 것. 더욱이 막강한 블루칩 작가의 라인업과 장차 스타 작가로 발돋움할 신진 작가군까지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다. “페이스 갤러리는 언제든 작가 입장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인내심을 갖고 작가를 기다려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예술로 맺은 동지인 짐 다인과 페이스는 매우 각별한 사이다. 30년 전부터 짐 다인을 지켜본 갤러리스트가 현재까지 곁에서 가족처럼 돕고 있다.” 페이스 갤러리와 작가 교류 및 전시 협업에 힘써온 리안갤러리 김혜경 큐레이터의 말이다.
그간 페이스가 주목해온 작가들은 뉴욕과 런던, 파리 출신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현재 아트 시장이 뒤바뀌었다. 한국과 일본, 중국, 홍콩, 심지어 아프리카와 중동 출신 작가들이 초강세. 이런 흐름을 반영한 듯 장샤오강, 장후안, 리송송, 요시토모 나라 등 아시아 작가를 지속적으로 세계 무대에 선보이고 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가 이우환도 5년 전 페이스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며 이 대열에 합류했다. 세계 미술 시장 동향에 정통한 최선희 아트 컨설턴트는 “페이스는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들과 역사를 함께했고 이들을 세계적 작가로 키워내면서 갤러리도 함께 성장했다. 오랜 세월 한결같이 퀄리티 높은 프로그램을 선보였기에 오늘날 페이스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갤러리가 됐다.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서양 작가뿐 아니라 장샤오강, 스기모토 히로시, 이우환 등의 아시아 작가를 소개하며 글로벌 갤러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라고 설명한다.
최근 페이스 갤러리는 젊은 작가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루마니아 작가 아드리안 게니(Adrian Ghenie)와 인도 작가 라퀴브 쇼(Raqib Shaw)가 그 주인공. 특히 아드리안 게니는 2012년 미국의 월간지 <아트 앤 옥션>이 선정한 ‘미래에 가장 소장가치가 있는 50인의 작가’로 뽑히기도 했다. 이는 슈퍼 컬렉터와 아트 딜러, 유명 경매사 등 전문 평가단이 선정한 결과로, 향후 글로벌 아트 마켓에서 핵심 작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은 셈이다. 페이스 갤러리의 피터 보리스 부사장은 “아드리안 게니는 지난 3월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매우 성공적이었다. 최근 주요 경매에서 추정가를 웃도는 가격에 작품이 판매되며 발전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초현실주의 세계를 담는 라퀴브 쇼의 작품은 놀라움 그 자체다. 페인팅 위에 반짝이는 보석을 박아놓은 그의 작품은 고대 신화 속 이미지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11월 8일부터 2014년 1월까지 쇼의 개인전
1 페이스 갤러리 대표 안 글림처(왼쪽)와 소속 작가 장샤오강. 지난 3월 뉴욕 지점에서 장샤오강의 개인전이 열렸다.
2 페이스 갤러리의 소속 작가 짐 다인
3 현재 페이스 런던 지점에서 열리고 있는 리송송의 개인전 전경
대형화, 전문화 추구하는 기업형 갤러리
1960년 미국 보스턴에 처음 문을 연 페이스 갤러리는 3년 뒤 뉴욕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다양한 컨셉의 갤러리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팝아트를 취급한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 컬러 필드 페인팅의 선두주자 안드레 에머리히 갤러리 등 다양한 갤러리가 있었지만 크로스오버를 다루는 갤러리는 거의 없었다. 글림처 대표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 미술 사조나 경향보다 작품의 퀄리티에 주목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회화, 조각, 비디오 그리고 설치미술 등을 다루는 현대미술 갤러리로 명성을 쌓은 페이스 갤러리는 현재 뉴욕에만 4개, 런던에 2개, 베이징에 하나의 지점을 열고 각 도시의 문화적 환경에 맞춰 특색 있게 운영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대형 아트 디렉터는 “블루칩 작가일수록 보다 많은 국가, 도시에서 전시하고 싶어 하는데, 그런 면에서 외형적 확장은 작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다. 중동과 러시아, 아시아의 신흥 부자들도 영국 런던에 자신의 세컨드 하우스를 짓곤 한다. 페이스 갤러리가 땅값 비싼 런던의 지점을 확장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실제 락슈미 미탈, 로만 아브라모비치, 빅토르 핀추크 같은 슈퍼 컬렉터를 포함해 런던에 거주하는 백만장자 중 30%가 러시아, 중동, 아시아의 신흥 부호라고 하니 페이스의 런던 진출은 이들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갖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글림처 대표는 영화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의 <맘보 킹>, 숀 코너리 주연의 <함정> 등에서 감독과 제작을 맡아 1990년대 대부분의 시간을 LA에서 보냈다. 5년 전 페이스 LA 지점(현재 폐관)을 오픈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아들 마크와 함께 현대미술의 중심 뉴욕에 집중하고 있다. 대를 이어 갤러리를 운영하며 고유의 분명한 색깔을 보여주는 페이스는 50년 동안 예술에 대한 깊은 안목과 식견을 쌓아왔다.
또한 페이스가 세계 일류 갤러리로 추앙받는 가장 절대적인 이유는 페이스 산하에 전문 갤러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미술계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판화 전문 갤러리 ‘페이스 프린츠(Pace Prints)’를 비롯해 사진 전문 갤러리 ‘페이스 맥길(Pace MacGill)’, 아프리카 원시미술 위주의 갤러리 ‘페이스 프리미티브(Pace Primitive)’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대개 지점을 늘리는 게 일반적인 상황에서 페이스처럼 갤러리를 세분화해 운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판화, 사진, 아프리카 원시미술 등 성격과 매체가 전혀 다른 장르를 하나의 비즈니스 채널로 다루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화된 각각의 갤러리는 페이스의 파트너면서 독립체로 운영하고 있다. “페이스 못지않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진 전문 갤러리로 출발한 뉴욕의 소나벤드 갤러리의 파워가 예전만 못하다. 그러나 페이스 갤러리는 다르다. 철저히 기업형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는 페이스는 제도, 법률 등의 시스템은 물론 다국적 고객의 관리 노하우까지 각각의 갤러리가 공유한다는 장점이 있다.” 이대형 아트 디렉터의 설명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밝지 않다.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문어발처럼 뻗어나가는 대형 갤러리 때문에 중소 규모의 갤러리들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에 대해 최선희 아트 컨설턴트는 “대형 갤러리에서 작품을 사야 가치 있고 안정된 투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젊고 재능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이들의 작품을 소개하며 담론을 형성하는 진정한 갤러리스트의 면모를 대형 갤러리에선 찾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페이스가 건재한 건 막강한 자본으로 대규모 전시를 유치하되 블루칩 작가의 작품도 선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의 힘이 늘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힘으로 좋은 작가를 섭외해 좋은 전시를 유치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미술계도 어쩔 수 없이 자본을 따라가는 것이다”라며 대형 갤러리들의 생리와 미술 시장의 현실에 대해 말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재능 있는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 사회적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갤러리의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미션일지 모른다. 지난 반세기 동안 페이스가 전문화, 분업화, 글로벌리즘에 기반해 몸집을 키웠다면, 앞으로 반세기는 21세기 미술을 주도할 리딩 갤러리로서 사회적 가치와 공헌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1 페이스 갤러리 베이징 지점의 외관
2 뉴욕에 자리한 페이스 갤러리 본점
Mini Interview with Peter Boris
어떻게 페이스 갤러리에서 일하게 됐나요? 처음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나요? 프랑스 작가 구스타브 쿠르베의 작품을 좋아했고, 특히 호안 미로의 ‘어릿광대의 사육제’는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작품입니다. 19세기 근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뉴욕의 올브라이트 녹스 아트 갤러리에서 그림을 감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죠. 그러다 1980년 페이스 갤러리와 손을 잡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 컬렉터에게 작품을 팔았는데 그때부터 전문 아트 딜러이자 갤러리스트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아시아 미술 시장, 특히 한국과 특별한 교류가 있나요? 아시아 미술 시장은 물론 아시아 지역 나라를 여행하는 걸 즐겨요. 일본에서 페이스 작가들의 전시를 종종 개최하곤 했어요. 1990년대부터 한국과 인연을 맺어 국제갤러리, 갤러리현대, 리안갤러리와 함께 일해왔습니다. 2012년 경남정보대학의 의뢰로 올봄 부산 센텀시티 내에 짐 다인의 10m짜리 대형 피노키오 작품 ‘Boy With Hope, Walking Forward’를 설치했습니다. 리안갤러리가 다리 역할을 했죠. 다인의 설치물 중 가장 큰 작품으로 짐 다인 스튜디오의 매니저 2명이 2주 동안 접합과 설치 작업에 동원됐습니다.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과 보람된 순간은? 가장 힘든 순간은 작가가 죽음을 맞이할 때죠. 페이스 갤러리는 작가들과 가족처럼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미국의 추상화가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이 세상을 떠났을 때 굉장히 슬펐어요. 그러나 그녀는 작품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쉰다는 걸 느낍니다. 대중에게 작품을 소개하고, 그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때 보람을 느끼죠. 최근 부산에 설치한 짐 다인의 공공 조형물 ‘피노키오’가 대표적인 경우죠. 짐 다인과 부산 사람들 모두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페이스 설립자 안 글림처의 아들 마크 글림처가 대를 이어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데, 가족 경영의 강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페이스 갤러리는 안 글림처의 아버지, 페이스 글림처를 기념해 이름 지었습니다. 부자지간인 안과 마크는 함께 일할 때 손발이 척척 맞죠. 페이스 갤러리가 전 세계 7개 지점에서 70여 명의 다국적 작가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50여 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작가를 아끼고 사랑한 덕에 페이스의 모든 작가들이 성공적으로 커나가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페이스가 작가들 덕에 오히려 많은 혜택을 받는 것 같아요. 비즈니스 측면에서 작가를 돕고 있지만 오랜 기간 좋은 작가들과 함께 일하며 얻은 것이 더 많아요.
앞으로 계획은? 아시아에서 페이스 갤러리를 자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겁니다. 런던에서 페이스의 입지를 굳히고, 베이징에서 페이스의 강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넓은 공간과 훌륭한 조명 장치로 유명한 베이징 지점은 798 예술구에서 특별한 갤러리로 이름나 있죠. 베이징 여행을 계획한다면 꼭 한번 방문해보기 바랍니다. 페이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에디터 심민아
사진 제공 페이스 갤러리, 리안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