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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늘 몸보다 마음이 뜨거운 당신이 레이스에서 적어도 끝까지 걷지 않는 방법에 대하여.

형형색색의 컬러 파우더를 맞으며 달리는 컬러런 현장

와인을 마시면서 달리는 게 매력인 프랑스 보르도의 메도크 마라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선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건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마라톤을 33회나 완주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다. 그는 수필집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자신이 얼마나 마라톤에 빠진 열혈남아인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했다.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사실 하루키가 마라톤에 빠진 이유는 건강 때문이다. 마라톤은 계속 달리는 운동이기 때문에 체내에 저장한 지방의 에너지대사가 가속화되어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그간 전업 작가의 소설 쓰기가 정신노동보다 육체노동에 가깝다고 주장해온 그는, 소설을 쓰며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마라톤을 해왔다.
물론 하루키를 차치하고도 건강을 위해 마라톤을 즐기는 이는 많다. 일례로 미국의 고위 정치인 중 달리기를 즐기지 않는 이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 가령 조지 W. 부시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93년 세계 4대 마라톤으로 꼽히는 보스턴 마라톤(Boston Marathon)에 출전해 아마추어의 실력치곤 놀라운 3시간 44분 52초의 기록을 냈으며, 훗날 그와 대선을 치른 앨 고어 전 부통령도 1997년 두 딸과 함께 해양 마라톤(Marine Corps Marathon)을 완주해 4시간 58분 25초라는 기록을 썼다. 한편 할리우드 스타들도 달린다. 최근 다시금 활활 타오르는 배우 매슈 매커너히는 로케이션 촬영 때마다 근처 러닝 코스를 알아보러 다니고, 에드워드 노튼은 아예 케냐의 마사이족과 달리기 연습까지 한 뒤 2009년 뉴욕 마라톤(New York Marathon)에 출전했다. 이 밖에도 악마 셰프 고든 램지, 배우 이선 호크, 라이언 레이놀즈, 1990년대를 주름잡은 톱모델 크리스티 털링턴 등도 모두 건강을 위해 마라톤을 즐긴다.
하지만 유명인이 마라톤을 즐기며 땀 흘리는 모습이 멋져 보인다고 ‘나도 오늘부터!’라는 각오로 무작정 집을 나섰다간 30분도 채 되지않아 좌절하기 십상이다. 섹시 스타 매슈 매커너히의 아슬아슬한 슬리브리스를 모델로 한 당신의 운동복은 금세 주말 아침 한강변을 달리는 아저씨들의 ‘난닝구’로 변신할 것이며, 헉헉대며 끊임없이 쏟아지는 땀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당신을 서울의 마사이족으로 보이게 하는 특수 효과를 내줄 테니 말이다. 그렇다. 마라톤이란 사실 운동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 일반인이 즐기기엔 그리 ‘세련된’ 스포츠가 아닐지 모른다. 솔직히 42.195km라는 코스도 너무 길다. 서울 여의도에서 저 북쪽 임진강 주변 통일전망대까지 달려야 하는 어마어마한 거리인 데다, ‘서브스리(2시간대)’로 그 거리를 주파하고자 할땐 간단한 계산으로 환산해도 대략 20km/h의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말하자면 대략 100m를 18초로 주파하는 속도로 2시간을 내리 달려야 하는 것. 거의 어벤저스급 에너지가 필요하다.

미국의 로컬 마라톤 중 하나로 특히 인기가 많은 조글링

그래서일까? 지난 몇 년, 이렇게 마니아의 스포츠로 여기던 마라톤의 세계에도 새바람이 불고 있다. 후련하게 내달리고 싶지만 풀코스는 부담스러운 이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바싹 구워버리는 땡볕 아래보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밤이 좋은 이들, 멋없는 마라톤 번호표보다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 코스튬을 하고 달리고 싶은 이들을 위해 건강과 재미를 결합한 ‘펀런(Fun Run)’이 세계적으로 속속 생겨난 것이다. 이런 펀런은 주로 긴 운동 시간을 내기 어려운 직장인이나 몸보다 마음이 뜨거운 초보 마라토너, 뭐든 그냥 달리는 게 좋은 러너를 타깃으로 매년 그 규모를 불려왔다. 국내에선 개최 초반에만 해도 대체 누가 그렇게 ‘오두방정’을 떨며 달리겠느냐고 수군댔지만, 이젠 인터넷 접수를 시작하면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참가 인원몇만 명이 다 차버리는 가장 뜨거운 행사가 되었다.
국내에서 이런 예로 들기 가장 적당한 건 스포츠 브랜드에서 주최하는 펀런이다. 지난 5월 열린 ‘푸마 이그나이트 서울’은 10km를 달리는 짧은 레이스임에도 1만 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홍익대학교 인근에서 여의도까지 이어지는 레이스 코스 중간중간 비보이들의 게릴라 공연이 펼쳐졌고, 결승선 부근에선 가수 싸이의 공연이 이어져 참가자들은 이날 하루를 그야말로 ‘스웨트(sweat) 데이’로 보냈다. 또 지난 7월 열린 ‘뉴발란스 컬러런’은 형형색색의 컬러 파우더를 맞으며 뛴 그야말로 ‘이색(異色)’ 레이스였다. 2012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한 이 행사는 벌써 40개국에서 500회 이상 열렸다고 한다. 참가자들은 코스를 따라 킬로미터 단위로 배치한 그린, 핑크, 오렌지, 블루의 4개 컬러 존에서 뿌리는 형형색색의 컬러 파우더를 맞으며 무더운 여름을 더 무덥게(?) 달렸다는 후문이다. 한편 ‘좀비와의 추격전’이란 소재의 레이스도 있다. 바로 ‘좀비런’이다. 이 행사는 참가자가 허리에 3장의 생명 끈을 부착한채 좀비로 분장한 주최 측 진행 요원들의 추격을 따돌리며 목적지까지 도망치는 일종의 추격 레이스다. 미국에선 꽤 오래전부터 열렸는데 2013년 처음 서울랜드에서 진행했고, 당시 5000장의 티켓이 조기 매진되며 암표까지 등장하는 등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행사는 10월 31일 핼러윈 밤에 다시 한 번 서울랜드에서 펼쳐진다.

2013년 미국 오클라호마주 머스코지에서 열린 좀비런

이런 펀런의 경우 외국에서 시작된 것이 좀 더 기상천외하다. 한 예로 미국 전역에서 로컬 형식의 수십 개 대회가 열리는 조글링(Joggling)이 그렇다. 조깅(jogging)과 저글링(juggling)을 합해 만든 조글링은 말 그대로 달리면서 저글링을 하는 레이스. 발은 쏜살같이 트랙을 밟아야 하지만, 손은 일정한 동작으로 공을 던졌다 받아야 한다. 문장으론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TV를 보면서 밥을 먹는 동시에 3초에 한 번씩 천장의 고장 난 형광등을 갈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는 동작을 최소 5km 이상 이어간다고 보면 된다. 이외에 매년 9월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의 메도크에서 와인 마니아들이 흥청망청 와인을 마시며 포도밭을 달리는 메도크 마라톤(Marathon du Medoc), 매년 5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장장 1600여 시간 동안 백야가 펼쳐지는 노르웨이 트롬쇠에서 자정이 넘은 시각임에도 여전히 중천에 뜬 해를 바라보며 달리는 백야 마라톤(Midnight Sun Marathon), 영국의 <텔레그래프>가 “비밀스러운 독재정권에 관심 있는 이가 참가하면 제격”이라며 ‘세상에서 가장 이색적인 10대 마라톤’ 중 하나로 꼽은 ‘평양국제마라톤’(거의 모든 참가자가 외국인이다)도 해외에선 꽤 유명한 펀런이다.
지난해 <2015 트렌드 코리아>로 한껏 주목받은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는 최근 많은 이가 펀런을 즐기는 이유에 대해 “현대인이 무기력한 일상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자신의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삶의 행복을 찾기 위함”이라고 했다. 움직임을 일종의 힐링이자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여기는 것이다. 한편 좀비런을 주최하는 커무브의 원준호 대표는 “스토리텔링이 되는 콘텐츠가 스포츠는 물론 문화 산업 분야에서 각광받는 것”이라며 펀런의 인기 요인을 ‘접근성’으로 규정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코스와 각종 이벤트를 곁들인 달리기에 기존엔 달리지 않던 새로운 러너들이 모인다는 얘기다. 세상은 넓고 달리기 종류도 다양하다. 꼭 뭍 위 트랙에서만 달리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 가을, 재미를 곁들인 색다른 운동을 찾고 싶다면 당신의 선택도 펀런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