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드니에서
시드니에 대한 자타공인 수식어 ‘세계적 미항’은 이 도시를 표현하기에 정확하지만 결코 충분한 말은 아니다. 익숙한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시드니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미식과 예술이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이런 방식은 어떨까. 첫 만남에서 탐험하고, 두 번째 만남에서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세 번째 만남에선 완전히 다시 본다. 말하자면 이번이 세 번째 시드니 방문이다. ‘봄’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서울을 떠나 ‘가을’이란 이름을 단 채 강렬한 햇살을 쏟아내는 시드니에 도착했다. 남반구를 향해 적도를 넘은 덕에 경험한 드라마틱한 계절의 변화. 이른 아침 도착해 짐을 풀고는 우선 호텔이 위치한 시내 중심가를 걸었다. 퀸 빅토리아 빌딩, 스트랜드 아케이드 등 고풍스러운 쇼핑센터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그리는 고층 건물들. 잘 안다고 하기엔 그리 익숙지 않고, 낯설다고 하기엔 거리의 이름과 풍경이 친근하다. 이제 그동안 보지 못한 이 도시의 남다른 매력을 새롭게 만날 참이다.
호주의 유명 셰프 피터 길모어가 지난해에 오픈한 두 번째 레스토랑, 베넬롱
레네 레제피가 호주의 식자재로 만든 시푸드 플래터
베넬롱의 인기 메뉴로스티드 캐럿 샐러드
와규 버거와 스테이크로 유명한 록풀 바 앤 그릴
시드니에서 10주간 팝업 레스토랑을 연 레네 레제피 셰프
오픈을 준비하는 노마 레스토랑의 스태프
시드니에서 미식을 논하다
세계 최고 레스토랑을 선정하는 각종 매체와 어워드에서 늘 최상위권을 고수하는 덴마크의 노마 레스토랑이 시드니에 팝업 레스토랑을 오픈한다는 소식은 미식 여행자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노마의 메뉴는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서라도 경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아, 물론 예약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1월 말부터 시드니 바랑가루(Barangaroo) 지역에서 10주간 운영하는 ‘노마 오스트레일리아’는 실제로 오픈 전부터 몇만 통의 예약 문의를 받았다고 한다. 레네 레제피(Rene Redzepi) 셰프의 위력이 일찌감치 이곳을 장악한 모양이다. 그는 2003년 코펜하겐에 자신의 레스토랑을 오픈한 이후 기존에 없던 창의적인 요리를 거듭 선보여왔다.
3월 초 전 세계 기자와 셰프, 음식 평론가가 시드니를 찾은 가장 큰 이유도 그의 요리를 맛보기 위해서였다. 레네 레제피는 이번 팝업 레스토랑을 위해 지난 1년간 직원들과 함께 호주 전역을 돌며 재료와 로컬 와인, 조리법 등을 연구했다. 그는 농부를 포함한 식자재 생산자와 와인메이커를 만나며 호주의 식자재와 조리법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디너가 시작되자 뉴사우스웨일스부터 태즈메이니아까지 호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한 ‘예술적’ 음식 15가지가 차례로 테이블 위에 놓였다. “분명히 실험적인 메뉴로 가득하겠죠.” 리셉션에서 기대감 가득한 예측을 하던 음식 평론가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폭넓은 식자재를 사용해온 셰프답게 표면을 개미로 장식한 망고 샌드위치를 내놓기도 했다. 곤충이 미래의 먹거리라는 말을 이토록 깜찍한 프레젠테이션으로 현실화하다니! 이 흥미로운 디너를 더욱 완벽하게 한 것은 와인 매치다. 신선한 해산물과 제철 재료를 활용한 각 메뉴마다 호주의 소규모 와인메이커가 생산한 보석 같은 와인이 등장해 참석자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레네 레제피와 내로라하는 호주 셰프들의 공통점은 환경을 생각하고 미래의 먹거리를 염두에 두며 지속 가능한 철학을 실천한다는 점.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몇몇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TV 프로그램에서 요리 연구가와 셰프, 푸드 칼럼니스트를 이끌고 가 와규 버거와 스테이크를 시식한 록풀 바 앤 그릴(Rockpool Bar & Grill)은 시드니에서 유일하게 100% 와규 버거를 맛볼 수 있는 곳. 무려 2682개의 리델 글라스로 장식한 웅장한 인테리어가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곳은 1989년 오픈한 뒤 호주의 미슐랭 별인 ‘검은 모자’ 2개를 6개월 만에 받았다. 노마 레스토랑의 디너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눈 닐 페리(Neil Perry)가 바로 주인장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첫인상에 대화를 할수록 겸손함이 묻어나는 미소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는 호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셰프 중 한 명으로, 콴타스 항공의 메뉴 개발팀도 이끌고 있다. 록풀 바 앤 그릴에서는 다섯 살 이상 된 소고기를 잘 숙성시켜 훌륭한 스테이크를 만드는 등 지속 가능성을 바탕에 깐 요리 철학을 구현한다.
위치와 맛, 분위기까지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레스토랑이 또 한 곳 있다. 오페라하우스 내에 자리한 베넬롱(Bennelong)이다. 호주의 랜드마크 건축물이 평범한 레스토랑에 자리를 내주진 않았을 테니 그 위치만으로도 믿음이 가는데, 역시 산 펠레그리노가 세계 최고 레스토랑으로 선정한 키(Quay) 레스토랑의 셰프 피터 길모어(Peter Gilmore)가 작년에 오픈한 곳이다. <마스터셰프 오스트레일리아>에 출연하기도 했고, 호주 미식업계의 거장이란 말을 익히 들어 식사를 하면서 만나볼 수 있을까 청했으나 그는 행사 참석차 태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아쉽지만 대신 3코스 디너를 통해 그가 선보이는 호주의 모던 퀴진을 즐겼다. 베넬롱은 특히 저녁시간에 근사한 곳이다. 창밖으로 서서히 해가 지는 풍경을 배경으로 로맨틱한 조명 아래서 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참 아름답다.
시드니의 상징과도 같은 풍경,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
호주의 대표적 현대미술관 MCA
시드니의 예술이 이끄는 대로
시드니에 왔으니 당연히 시간을 내어 들를 곳이 있다. 지금껏 여행지에서 가본 미술관 중 손에 꼽을 만큼 마음에 든 미술관, MCA(Museum of Contemporary Art Australia)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는 때마침 척 클로스(Chuck Close) 특별전을 개최 중이라 오래도록 관람한 기억이 난다. 자신의 ‘전시운’에 내심 감사하며. MCA는 오페라하우스와 하버 브리지,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기 위해 여행자라면 누구나 발길을 향하는 서큘러키(Circular Quay)에 자리한다. 서큘러키 방면에서 걸어가면 정문이 나타나고, 반대쪽 후문으로는 주말마다 장이 서는 록스 마켓으로 이어진다. 세계적으로 이만큼 좋은 위치에 자리한 미술관도 드물지 않을까? 전시실 한편에 낸 창으로 내다보는 서큘러키의 풍경이 그렇게 생기 넘칠 수 없다. MCA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4층 테라스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기로 했다. 시드니에서 가장 쉽게 아름다운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3층에서는 2003년 터너상 수상자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의 대규모 특별전을 개최 중이었다. 세라믹, 조각, 드로잉 그리고 스케일 큰 태피스트리 작품과 아티스트 노트까지 그레이슨 페리의 도전적인 풍자와 위트를 엿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망라한 이 전시는 5월 1일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2층에서는 언제든 만날 수 있는 MCA 컬렉션 전시가 이어진다. 호주 작가들의 작품 4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어, 이곳은 호주 현대미술을 한눈에 살펴보기에 더없이 훌륭한 장소이기도 하다.
MCA를 포함한 시드니의 7개 전시장에서는 3월 18일부터 6월 5일까지 개최하는 제20회 시드니 비엔날레 준비가 한창이다. 비엔날레의 메인 개최 장소인 코카투아일랜드(Cockatoo Island)는 서큘러키에서 페리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섬. 올해의 주제는 ‘미래는 이미 이곳에 있다-단지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았을 뿐이다(The future is already here-It’s just not evenly distributed)’로, 35개국 83명(팀)의 아티스트가 참여하는데 한국의 이불, 임민욱 작가의 이름도 보인다.
MCA를 나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Art Gallery of NSW)으로 향했다. 모던한 MCA와 달리 멀리서도 눈에 띄는 웅장한 외관이 드넓은 왕립 식물원 옆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1871년 개관한 호주에서 네 번째로 큰 미술관이다. 호주 원주민의 예술 작품을 최대 규모로 상설 전시하고, 유럽과 아시아 작품까지 광범위하게 선보인다. 일정이 짧아 기획전을 중심으로 관람하기로 했는데, 발길이 닿은 곳은
시드니에 머무는 마지막 날 저녁에는 공연을 관람하기로 했다. 그동안 올 때마다 일정이 맞지 않아 오페라하우스의 외관만 보고 간 아쉬움을 풀고자, 한국에서 공연 일정을 확인하고 온 터였다. 마침 호주의 대표 악단인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에라자드’를 연주하는 일정이 있었다. 지휘자는 2년 전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데이비드 로버트슨.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1973년 준공해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시드니의 풍경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지만 정작 그 안에 들어가봤다거나 공연을 관람했다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곳은 1년 365일 중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직전의 성 금요일(Good Friday)을 제외한 363일을 대중에게 문을 연다. 콘서트홀에 들어서 객석을 둘러보자 크게 두 부류의 관람객이 보였다. 레드 카펫 위를 걸어도 좋을 만큼 우아한 드레스나 턱시도를 멋스럽게 차려입거나, 전혀 멋 부리지 않은 평상복을 입은 관객. 전자는 세계적 공연장에서 음악회를 감상하는 특별한 이벤트를 즐기는 이들이고, 후자는 음악 애호가로 자주 이곳을 찾는 시드니 시민일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곳이 단순히 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관광 명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객석이 만석이었다는 사실.
공연이 끝나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음악의 여운과 금요일 밤의 활기가 어우러진 거리에서 이번 여행이 진정으로 이 도시를 다시 보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가 되든 네 번째 방문에서는 또다시 시드니의 새로운 얼굴을 마주하리라는 사실도.
MCA에서 열리고 있는 그레이슨 페리의 특별전
MCA 실내에서 바라본, 정문 너머의 서큘러키 풍경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콘서트홀
MCA 테라스카페에 자리한 조각 작품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김정근 취재 협조 호주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