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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양혜규, 역시 양혜규

LIFESTYLE

국제 무대를 사로잡은 양혜규 작가의 작품이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의 대대적인 새 단장에 가세했다. 세계적 브랜드와 예술가, 두 월드 스타의 만남이 궁금하다.

퐁피두 센터에서 개인전을 여는가 하면, 갈르리 라파예트 백화점에서 작품을 선보인다. 서울과 베를린을 중심으로 국제적 활동을 펼치는 설치미술가 양혜규 이야기다. 작년에 유수의 미술관과 상업기관 등을 오가며 굵직한 프로젝트를 마친 작가 양혜규의 시간은 올해도 어김없이 바삐 흐르고 있다.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가 지난 5월 르나 뒤마 건축사무소(RDAI) 아티스틱 디렉터 드니 몽텔의 지휘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면서, 양혜규 작가에게 대규모 설치 작품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2006년 전 세계에서 네 번째 메종을 도산 파크에 오픈한 후 10주년을 맞이한 작년,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는 레노베이션을 선언했다. 그 기념비적 순간에 초대된 양혜규 작가와 에르메스 코리아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4년 전 그녀는 서도호, 홍승혜 작가와 함께 ‘제4회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후보에 오른 3인 중 한 명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획기적이었죠. 저한테 에르메스는 브랜드 이전에 미술상으로 먼저 다가왔어요. 지금은 미술 기금이나 후원이 많지만 그때는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이 유일무이했어요. 특히 저처럼 외국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젊은 작가는 좀처럼 한국에서 작품을 선보일 기회가 없거든요. 당시 후보자 셋이 같이 전시를 열었는데, 설치하면서 홍승혜 작가와 친분도 쌓을 수 있었고,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덕분에 여러 기회가 생겼죠.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어요.” 당시 40대였던 두 작가와 달리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던 작가 양혜규를 미술상 후보로 선정한 에르메스의 선구안이 놀라울 따름이다.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레노베이션은 에르메스가 추구하는 현대적 건축 스타일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벽면엔 30cm 간격으로 유리를 배치해 금색과 흰색 직선으로 장식하고, 빛이 투과하도록 만들었다. 외부에서 자연스레 스며드는 빛은 에르메스의 디자인만큼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낸다. 메종의 철학을 대변하는 중요한 건축이니만큼 초청한 작가에 대한 예우도 신중했다. 그 결과, 메종과 양혜규 작가의 컬래버레이션은 여느 커미션과는 노선을 달리한다. 작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 장기 전시 개념에 가깝다. “처음에 제작비, 무게, 밀도, 기술 등 여러 면면을 생각해 세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어요.
그중에서도 내심 제일 조형성이 뛰어나다고 여긴 작품이 있었는데, 메종도 같은 생각을 했나 봐요. 기뻤죠. 서로 협의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좋아야 결과물이 만족스럽잖아요. 작품이 무겁거나 꽉 차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계단 위에 설치해야 해서 기술적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거든요. 메종 공간 고유의 용도와 역할, 기능을 정확히 파악하고 문제가 없도록 고민했어요. 어떻게 보면 보통 작가가 전시하는 화이트 큐브는 보호된 공간이거든요. 제 작품이 다양한 성격을 지닌 장소에 놓이고 여러 상태를 겪었으면 해요. 그런 의미에서 에르메스와의 협업이 무척 즐거웠어요.”
메종과 양혜규 작가의 깊은 인연 덕분인지 아니면 각각의 유명세 덕택인지, 둘의 만남은 문화 예술계와 패션계 안팎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바쁜 세상에서 어떤 기대감을 갖게 하는 건 예술가로서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커미션을 받으면 공간과 전시의 문맥을 먼저 읽으려고 노력해요. 다른 공간이나 기관과 만들 수 있는 여지, 에르메스와 함께할 수 있는 여지가 다를 테니까요. 더불어 시너지를 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1 메종 레노베이션을 장식한 양혜규 작가의 작품.   2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그녀의 작품이 자리한 곳은 메종 안 꼭대기다. 달팽이 모양의 계단을 돌고 돌아 올라가면 머리 위로 작품이 보이는데, 창문의 스트라이프 무늬와 함께 건축의 일부인 듯 어우러진다. 제목은 ‘솔 르윗 뒤집기-184배로 확장한 하나와 66배로 확장·복제하여 맞세운 둘, 다섯 개의 모듈에 입각한 입방체 구조물 #81-E’다. 얼핏 보면 복잡한 제목 같아도, 풀어보면 이해하기 쉽다. 미국의 개념미술가 솔 르윗의 작품 ‘다섯 개의 모듈에 입각한 입방체 구조물’을 양혜규 작가가 말 그대로 뒤집은 것. 그래서 ‘솔 르윗 뒤집기’다. 물리적으로 뒤집고 개념도 뒤집었다. “3개의 큐브 구조물이 서로를 품고 있는 형상이죠. 하나를 만들면 그다음엔 계속 증식하고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잖아요. 자동으로 확장하는 이런 기하학이 흥미로워요”라고 말한 그녀는 갑작스레 펜과 종이를 찾기 시작했다. 즉석에서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이어간 작가는 이후 몇 차례 더 그림을 그려 보여주었다. “평소엔 이렇게 하지 않아요. 기록을 남기는 게 조금 부끄러워서 공간을 보고 머릿속에서 영감을 떠올려요.” 양혜규 작가의 머릿속 스케치는 베니션 블라인드라는 오브제를 통해 실현됐다. 그동안 여러 일상 오브제를 선보인 그녀지만 특히 블라인드는 시그너처나 마찬가지로, 다양한 변주를 거쳐 이번 작품까지 이어졌다. “블라인드의 스트라이프가 공간을 선으로 무수히 나누어 울렁임을 만드는 거죠.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역이 생겨나요. 블라인드는 참 매력적인 재료예요. 빛, 계절, 시간에 따라 변화하죠. 볼 때마다 다른 장면을 선사하거든요.”
블라인드 시리즈 중에서도 이 작품이 유독 특별한 이유가 있다. “두 가지 변화를 시도했어요. 우선 크기예요. 가장 큰 유닛에 작은 유닛을 교차했죠. 유닛이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면서 또 다른 유닛을 만들어내요. 다양한 형태가 생겨나고 유닛끼리 품으면서 기하학이 끝없이 증식하는 거죠. 또, 그동안 솔 르윗의 흰색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처음으로 금색과 은색을 써봤어요. 화이트 다음이 금·은·동이라는 건 스스로 쌓은 내부적 문맥이에요.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크기나 색채 등 제가 추구한 기존 룰을 어긴 것처럼, 언젠가 이 큐브가 빨간색이 되는 날도 오겠죠.” 어떤 컬러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 행보도 기대된다.
한동안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작품에 몰두한 그녀는 2018년 독일 루트비히 뮤지엄과 2019년 미국 LA MoCA에서 대규모 전시를 연달아 앞두고 있다. 모교인 프랑크푸르트 국립학교 슈테델슐레 순수미술 학부 교수로 임용돼 후배 양성에도 힘쓸 계획이다. “에르메스와의 작업 이후 당분간은 시간을 비워뒀어요. 내년에 또 칙칙폭폭 달리려고요”라고 말하는 양혜규 작가의 다음 결과물이 벌써 궁금하다. 하지만 보지 않고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역시 양혜규라고.

양혜규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 양혜규는 2009년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참가했다. 파리 퐁피두 센터, 함부르크 쿤 스트할레, 뉴욕 뉴 뮤지엄, 런던 테이트 모던 등에서 열린 다양한 전시에 참가하며 명성을 떨쳤고, 한국, 독일, 미국 등 세계 유수의 기관 중 그녀의 작품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다.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  사진 제공 에르메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