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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주의 세계

ARTNOW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다카노 아야. 일본 만가와 SF적 판타지의 매력으로 가득한 그녀의 작품이 부산 조현화랑에 모였다. 한국 첫 개인전을 위해 부산을 찾은 작가를 <아트나우>가 만났다.

May All Things Dissolve in the Ocean of Bliss, 캔버스에 유화물감, 230.2×650.2cm, 2014

조현화랑 부산에서 열린 개인전 < The Ocean Inside, The Flowers Inside >를 위해 내한한 다카노 아야

다카노 아야의 작품은 ‘일본 작가’ 하면 떠오르는 손에 잡힐 듯한 이미지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팝아트풍의 다채로운 색감, 수공예적 정교함, ‘귀여운(かわいい)’ 만화적 캐릭터, 지구 종말 서사를 배경으로 한 SF적 상상력, 젠(zen) 미학을 녹여낸 미니멀한 형식, 일본 전통 예술의 낯익은 기호 등 말이다. 작가는 일본의 만가와 우키요에, 14세기 이탈리아 종교화나 고갱 같은 서구 모더니즘 남성 작가의 작품, MTV 등에서 받은 영감을 자신만의 판타지를 드러내는 시각언어로 전환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 틀어박혀 읽은 자연과학 서적과 SF 소설은 그 세계를 성장시킨 훌륭한 자양분이었다. 그렇다면 다카노 아야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 작품의 주인공인 속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소녀들(처럼 보이는 인물들)을 꼽을 수 있다. 작품을 보는 관람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폐적인 그들은 우리의 감정을 묘하게 동요시킨다. 그녀의 작품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이자 작가가 본 판타지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소녀들은 고무 인형처럼 길게 늘어진 몸매, 둥글납작한 머리, 초점 없는 큰 눈이 특징. 어깨, 팔꿈치, 무릎, 발목 등 그들의 관절 부분에는 성적 흥분과 사춘기 이후의 육체적·정신적 성장을 동시에 암시하는 붉은 흔적이 도드라진다. 누드나 헐거운 옷을 입은 소녀들은 도시와 자연풍경, 우주 속에서 중력을 벗어난 듯 부유하며 서로 은밀한 성적 행위를 주고받거나 동물과 교감하고, 별다른 목적 없이 어딘가를 배회한다. 붉거나 푸른 색감이 주를 이루는 화면에는 여성 작가 특유의 서늘한 멜랑콜리와 에로틱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Kyoto sky,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30×162cm, 2004
ⓒ 2004 Aya Takano/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Know That Just a Kiss will Take Me Far Away,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72.7×60.6cm, 2006
ⓒ 2006 Aya Takano/Kaikai Kiki Co., Ltd.

That Inn, 종이에 펜, 수채물감, 21×29.6cm, 2003
​ⓒ 2003 Aya Takano/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Untitled,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30×162cm, 2002
​ⓒ 2002 Aya Takano/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조현화랑 부산에서 열린 한국 첫 개인전 < The Ocean Inside, The Flowers Inside >(10월 2일~11월 22일)는 세로 2m, 가로 6m의 아름다운 대작 ‘May All Things Dissolve in the Ocean of Bliss’와 부산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신작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의 작품을 알고 있는 관람객에게는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일본 대지진 이후 달라진 화풍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다. 작품 전반에 SF적이고 신화적인 세계의 에너지가 더욱 강렬해졌고, 소녀들의 주요 활동 무대인 일상적 도시 풍경은 숲이나 바다 같은 자연으로 대체됐으며, 화면의 밀도와 색채 구성은 더욱 사이키델릭해졌다(그녀가 한번 마시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즐기던 술을 끊었음에도). 작품을 그리는 재료와 기법에서도 변화를 시도했다. 아크릴물감 대신 식물성 대마유 물감을 사용한 화면은 프레스코화 같은 색감과 질감이 두드러진다. 작품의 표면에 무게감이 생겼다는 의미다.
작품 속 소녀들, 3·11 대지진 이후 달라진 라이프스타일과 작품의 주제 및 내용, 작품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시각적 레퍼런스, 일본 미술계에서 여성 작가로 활동한다는 것 등 그녀가 작은 목소리와 조곤조곤한 말투로 <아트나우>의 질문에 답했다.

The Galaxy Inside, 캔버스에 유화물감, 181.8×227.3cm, 2015
ⓒ 2015 Aya Takano/Kaikai Kiki Co., Ltd. All Right Reserved

다카노 아야
1976년 일본 도쿄의 사이타마 현에서 태어난 다카노 아야는 두세 살 때부터 화가를 꿈꿨다고 한다.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다마 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졸업 후 무라카미 다카시의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현재 카이카이키키(Kaikai Kiki)와 페로탱 갤러리의 전속 작가로 활동하는 그녀는 MoCA(2004년), 리옹 현대미술관(2006년), 미로 재단(2007년), 스카스테트 갤러리(2009년), 프리더 부르다 미술관(2010년), 페로탱 갤러리(2003·2007·2008·2010·2012년) 등 서구 주요 전시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일본을 대표하는(슈퍼플랫) 여성 작가’로 국제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현재 도쿄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다카노 아야
Photo by Laurent Segretier ⓒ2012 Aya Takano/Kaikai Kiki Co., Lt d. All Rights Reserved

Memories of the Earth, 캔버스에 유화물감, 162×130cm, 2015
ⓒ 2015 Aya Takano/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연 것을 축하합니다. 3·11 대지진 이후 라이프스타일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작품에서도 그러한 변화가 감지됩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대형 작품 ‘May All Things Dissolve in the Ocean of Bliss’에 집약돼 있죠. 3·11 대지진 이전과 이후, 작품을 제작할 때 어떤 점이 가장 크게 달라졌는지 설명해주세요.
3·11 대지진 이전에 저는 향락적이고 찰나적으로 살았어요. 도시 생활에 맞게 집약되고 선별한 지식밖에 몰랐죠. 당시 네덜란드에서 바다가 일본 땅을 삼키는 영상을 봤습니다. 3·11 대지진 전후로 제 삶은 완전히 바뀌었어요. 뒤돌아보면 이전의 저는 마치 죽어 있었던 것 같아요. 육식을 끊고 명상을 시작하니 감각이 더욱 예민해져 전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많아졌어요. 작은 차이를 알아차리게 됐고 가치관도 상대적으로 변화했죠. 중요하다고 여기던 것이 그렇지 않거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렇게 제 그림도 상대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선과 악이나 생과 사가 혼연일체가 되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인상을 주는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당신의 작품은 일본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아니메(アニメ) 회화’의 한 경향으로 분류되곤 합니다. 일본 작가 외에도 많은 동시대 작가가 그들을 대변하는 특정 캐릭터를 만들어 반복해서 그리고 있죠. 작품에 등장하는 의뭉스러운 소녀들은 하나의 (만화적) ‘캐릭터’인가요? 아니면 당신이 상상한 어떤 장면을 미술로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회화적) ‘형식’인가요? 저는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해봤습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쿠사마 야요이의 ‘점(dot)’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아주 재미있는 해석이네요.(웃음)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소녀들의 겉모습은 표면적인 관문일 뿐이죠. 작품을 보는 사람의 정신이 그들에게 스며들어 제 작품 속 더욱 깊은 세계로 다이빙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작품의 캐릭터는 보통 캔버스 밖의 누군가를 보고 있잖아요. 그들이 보는 존재는 당신인가요, 아니면 작품을 보는 관람객인가요?
소녀들이 모든 존재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근원적인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려요.

당신이 소녀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일상의 복잡한 사고에서 벗어나 절이나 교회에 갔을 때처럼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의 한 부분에 도달하길 바랍니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이끄는 ‘카이카이키키’의 대표 작가로 활동 중입니다. 일본 내에서 그의 작품과 활동을 해석하는 입장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저처럼 이방인의 시선으로 보면 카이카이키키 소속 작가는 여느 일본 작가와는 다른 맥락에 놓인 존재처럼 보이기도 해요. 이를테면 일본보다는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작가’라는 인상이 강하죠.
일본이나 다른 국가에서 제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은 앞으로 정밀한 과정을 통해 변화할 거라 생각해요.

일본의 여성 작가라는 사실이 작품에 직간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일반화할 수 없지만, 여성은 비이론적·직감적·감정적·감각적인 부분이(남성보다) 발달했다고 생각해요. 좋든 싫든 관계없이 말이죠. 3·11 대지진이 발생하기 전까지 제 내면은 마그마 같았어요. 지금보다 훨씬 혼란스럽고 감정적이었죠. 요가나 명상을 하면서 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어요. 그런 시선으로 제 자신과 주변을 새삼스레 둘러보니까, 무의식의 카오스로부터 무언가를 퍼 올려 창조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 제가 여성이라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작품에 깊은 영향을 준 SF 소설, 혹은 그러한 세계관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편견일지 모르나, 보통 SF라고 하면 대단히 남성적인 세계상이 머릿속에 떠오르죠. SF 소설을 읽으면 일종의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말한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어요. 작품과 연결 지어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모든 사물에 대해 강한 위화감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옷이나 각종 도구, 마을의 풍경, 상식이나 시간의 흐름 같은 것에요. 그런 저에게 SF 소설은 다른 세계의 여러 모습을 계시해줬습니다. 제 내면을 위한 쾌락이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죠. 그러한 감각이 지금 여기에 없는 이상적인 상태를 그리고 싶게 한 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의 개별 작품은 한 편의 SF 소설을 이루는 서로 다른 챕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개별 작품을 하나의 세계로 수렴하며 큰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인가요?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애니미즘적 생각을 해요. 모든 배후에 에너지원 같은 것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여기서 다우주의 세계가 전개되는 거죠. 말씀하신 대로, 제 그림뿐 아니라 모든 것이 패치워크처럼 서로 연결되고 호응하는 것 같습니다.

작품에 여러 시각적 요소를 참고한 점이 눈에 띕니다. 순정만화나 일본 미인도와 춘화, SF 소설, 날씨 변화나 3·11 대지진 같은 자연재해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어요. 머릿속 상상의 장면과 이런 외적 요소를 캔버스에 재조합할 때 어떤 부분에 주력하나요?
저는 우리 모두의 내면 깊이 혹은 높은 곳으로 끊임없이 잠입해 들어갑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해드리면 어떤 풍경이 완벽하게 완성된 형태로 보입니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아요. 그 풍경에는 제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이나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사진 제공 조현화랑 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