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집 Part.1
주인과 눈인사만으로 안부와 상태를 묻는 곳. 속세에 치여 녹초가 됐을 때 찾는 곳. 홀로 누워 있는 저녁 느닷없이 생각나는 곳. 그렇게 우리가 즐겨 찾는 단골집.



이 밤의 꼬리찜을 잡고, 진주집 래퍼 최자
‘직업 돼지’인 나에게도 한밤중에 좋은 음식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성이 담긴 한 그릇의 좋은 음식을 안정적으로 오랜 기간 제공해온 식당이야말로 진정한 ‘맛집’이라고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맛집은 대개 늦은 시각까지 영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택지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야심한 밤에 허기가 찾아올 때 뇌리를 스치는 몇몇 식당이 있다. 베스트는 아닐지라도 그 시간대에 수긍할 수 있는 맛을 꾸준히 제공하는, 감히 ‘단골’이라 말할 수 있는 심야식당. 그중 하나가 남대문시장에 자리한 진주집이다. 진주집은 꼬리찜, 꼬리토막, 양지 수육을 주메뉴로 하는 곳이다. 24시간 쉬지 않고 영업하는 것도 고마운데, 꼬리찜을 주문하면 선지해장국을 서비스로 내는 후한 인심까지 겸비했다. 좋다. 늦은 밤 남대문 근처에서 따뜻한 국물에 소주 한잔이 생각난다면, 한번 들러보시길. 서울시 중구 남대문시장4길 6-1 | 02-753-9813

심야 아지트, 참프루 갤럭시 익스프레스 보컬 & 기타리스트 박종현
동네 술집이 있다는 건 인생의 큰 기쁨이다. 단골집은 본디 오래 두고 가깝게 찾는 곳이어야 하니까. 참프루는 도무지 이 공간에 술집을 차렸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아주 작은 펍이다. 여럿을 데려갈 만큼 넉넉한 공간은 아니지만, 마음 맞는 친구 한 명 또는 혼자 찾기 좋은 곳. 늦은 밤 집에 오도카니 있기 무료하거나 귀가 중 한잔이 당기는 날이면 이곳에 들른다. ‘오늘의 메뉴’ 중에는 헛헛한 속을 달랠 밀푀유나베나 동파육 같은 든든한 안주도 있지만, 가볍게 한잔하고 싶을 때는 나초, 감자튀김 같은 스낵류를 시킨다. 때로는 장사보다 나와 마시는 술 한잔이 좋은 듯한 주인장을 위해 주변 가게에서 음식을 시켜 먹기도 한다. 서울시 마포구 희우정로10길 9 | 010-2608-3961

차원이 다른 고기 맛, 꽃소 KT 위즈 외야수 강백호
프로야구 선수로서 첫 시즌을 보내며 만난 단골집 꽃소는 혀와 마음이 행복해지는 공간이다. 홈구장인 수원에 있는 꽃소는 고기의 품질이 여느 고깃집과는 차원이 다르다. 특히 마블링이 환상적이다. 게다가 착한 가격을 고수해 아직 신인인 내게도 부담이 적다. 고기 맛이 다른 곳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뭔가가 있다. 그래서 특별한 에피소드가 없다. 먹는 것에 과도하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자천로 179 070-4251-0804

추억을 소환하는 곳, 치킨락 미러볼뮤직 대표이사 이창희
치킨락으로 상호를 변경해 연남동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고다기 시절부터 자주 찾은 곳이다. 9년 전, 친한 친구 밴드가 고다기에서 공연을 했다. 그날은 마침 비가 내려 분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이었다. 일반 공연장이었다면 빗소리를 들을 수 없을 테고, 거기에 맛있는 치킨과 맥주가 있는 곳이라니! 그 멋과 맛을 잊을 수 없어 지금까지 발길이 이어지는 나의 베스트 치맥집이다. 거의 15년간 인연이 닿은 곳이기에 이곳 사장과 오가는 단골 모두 서로의 역사를 공유하는 친구가 됐다. 상대에게 집중할 수 있을 만큼 편안한 분위기가 좋아서 친구를 만날 때, 배고플 때, 술고플 때 내집처럼 드나든다. 이곳은 인디 음악을 주로 튼다. 덕분에 자연스레 요즘 동향을 확인할 수 있어 좋다. 예전에 좋아하던 음악이 흘러나오면 당시의 향수에 젖어, 이곳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옛 친구와의 일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생각난다. 어찌 ‘맥치’가 아닌 ‘치맥’집에서 치킨 맛을 따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한 집 건너 한 집이 치킨집이라고 하지만, 이곳은 내가 먹은 치킨 중 단연 최고다. 치킨이 주가 되는 맥줏집을 찾는 이라면 꼭 들러보길! 더불어 인디 음악이 궁금한 이라면 귀로 듣는 즐거움과 새로운 음악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거다.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27길 8-3 | 02-322-1097

희극인들의 사랑방, 맹가네솥뚜껑세겹살 tvN <짠내투어> PD 안제민
선배는 녹화가 끝나면 항상 나를 이곳으로 데려갔다. 선배와 나 그리고 매주 바뀌는 <코미디빅리그> 개그맨들이 회식의 게스트였다. 특별할 것 없는 솥뚜껑삼겹살집이었다. 당시엔 이곳에서의 회식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선배는 늘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냉동 삼겹살(a.k.a. 냉삼)을 주문했다. 아니, 없는 것도 아니고 메뉴판에 떡하니 생삼겹살이 있는데 왜 굳이 냉동 삼겹살을? 하지만 회사 생활이 다 그렇듯 선배의 메뉴 선정에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저 오늘 회식엔 사람이 많이 와서 선배와 따로 앉을 수 있기를, 부디 내 앞의 불판에는 얼리지 않은 생삼겹을 올릴 수 있기를 바랄 뿐. 그 후로 2년. 추억의 냉삼집이 전국 각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한남동의 어느 고깃집은 웨이팅만 1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직업의 특성상 트렌디한 곳은 두말 않고 찾아가는 편인데, 왜인지 요즘 생긴 냉삼집에는 발걸음을 향하게 되지 않는다. 대신 초년생 때 억지로 끌려간 그 고깃집을 이제는 선배 없이도 종종 간다. 그리고 생삼겹살을 시킨다(이 집의 생삼겹살은 진짜 맛있으니까). 삼겹살집인데 상차림에 파무침이 없어 처음 이 집을 찾은 손님은 모두 난색을 표한다. 의문은 의외로 쉽게 풀린다. 고기가 익을 무렵 주인아주머니가 방금 손수 무친 파무침을 가져다주시니까(갓 무친 파무침이 가장 맛있다는 진리를 아는 분이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그 가게 이름을 몰랐다. 위치로만 기억하는 단골집. 매주 가는 단골이라도 반가운 인사 없이 묵묵히 파를 무치기 시작하는 주인아주머니. 술잔이 한 순배 돌고 나면 각자 알아서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마시는 곳.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 먹은 솥뚜껑에 밥을 볶아 먹고 나서야 식사가 끝나는 평범한 솥뚜껑삼겹살집. 한남동 냉삼집 앞에서 1시간 동안 기다리는 분들께, 이곳에 꼭 한번 들러보시길 권한다. 한남동에서 맹가네솥뚜껑세겹살은 지하철 6호선으로 30분 거리다.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44길 37 | 02-308-3082

배도 시간도 꽉 차는 곳, 악어 시인 오은
홍대 앞은 한때 내가 가장 자주 찾는 곳이었다. 글을 써야 한다는 명목으로, 친구를 만나려고,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한 주에도 몇 번씩 찾았다. 실제로 단골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몇 군데 생기기도 했다. 그중 대부분이 임대료 상승에 불경기가 겹쳐 문을 닫았고, 다행히도 악어는 살아남았다. 그래서 악어를 찾을 때면 편안하면서도 자못 비장해진다. 이곳이 없어지면 왠지 홍대 앞에 와도 갈 곳이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악어를 떠올리면 초록색 바탕에 투박한 흰 글씨로 쓴 간판이 떠오른다. 자던 나를 벌떡 일으켜 세울 안주들이 뒤이어 떠오른다. 이 음식을 다 먹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다음 음식이 나올 것처럼 안주(안주라고 쓰고 야식이라고 읽는다)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는 감바스 알 아히요를 악어에서 처음 맛보았다.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처음 접한 곳도, 사이클론 스테이크를 먹고 눈이 휘둥그레진 곳도 마라탕과 마라샹궈에 푹 빠진 곳도 악어다. 한때 나는 스스로를 악어새라고 지칭한 적이 있다. 물론 주인장 누나는 한 번도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악어와 악어새가 공생하듯나 또한 악어에 그런 존재이고 싶었다. 악어 사장님이자 내게는 더없이 친근한 누나는 손님들을 최대한 배려하면서도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마음을 쏟는 사람이다. 혼자 있어도, 혼자서 맥주를 들이켜도, 혼자서 와인을 따라 마셔도 누구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는 곳. 혼자 가도 좋고 여럿이 가서 어울려도 좋은 곳. 여름에는 루프톱에 올라 간간이 불어오는 밤바람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밤 9시부터 10시 사이, 출출하고 왠지 술도 한잔하고 싶다면 악어에 가라. 배도, 시간도 꽉 찰 것이다.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15길 49 02-322-2792

친구와의 우정이 깃든 안주마을 모델 고소현
단지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자주 가진 않는다. 그곳의 공간, 분위기, 친구까지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진정한 단골집이 된다. 서촌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에 위치한 안주마을은 친구들과의 우정이 꽃핀 곳이다. 친구들이 하나둘 모이는 그 순간,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 거기에 맛있는 음식까지. 하나같이 모두 소중한 추억이다. 안주마을의 자랑은 청어알젓과 두부다. 젓갈은 아니고 청어알을 과하지도, 밋밋하지도 않은 양념에 무친 것인데 오이랑 두부와 함께 먹으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게 한다. 특히 김과 함께 싸 먹으면 감칠맛을 더해 빈틈없는 앙상블을 이룬다. 싱싱한 제철 해산물 안주 역시 이 가게의 또 다른 묘미로 계절에 맞는 제철 메뉴들이 항시 대기 중이다. 바람이 좋은 가을,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보기 바란다. 분명 낭만적인 밤이 될 테니까.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길 5 | 02-723-3529
가장 가까운, 동해바다 포토그래퍼 최용빈
쌀쌀한 계절이면 더 생각나는 제철 해산물과 소주 한잔. 차를 타고 달리지 않아도, 집 한 뼘 거리에 제철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아담한 술집이 있다. 청담동 일대의 화려한 분위기와 대비되는 이곳의 낡은 간판과 수조는 짧지 않은 시간 이 자리를 지킨 보증이기도 하다. 늘 웃는 얼굴로 맞이하며 안부를 묻는 주인 누나의 걸쭉한 목소리는 마치 친누이의 집에서 그가 차려주는 술상을 맞는 느낌도 준다. 그때그때 계절에 맞는 회 한 점과 소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면 고된 피로와 추위가 눈 녹듯 씻겨 내려간다. 이곳에서 특별히 기억할 만한 에피소드는 없지만, 오히려 늘 한결같은 맛과 분위기가 이곳을 찾는 이유다. 술이 고픈 날, 좋은 기분은 더 신나게 돋우고 안 좋은 기분은 슬쩍 던져두고 나올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바다다.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66길 9 | 02-512-3307
기력을 북돋우는 든든한 한 끼, 미우미우 인트렌드 대표 정윤기
사람 만날 일이 많은 나는 매일 어디에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버겁다. 이런 날에는 미우미우(美牛味牛)를 찾는다. ‘아름다운 고기, 맛있는 고기’라는 뜻의 고깃집이지만, 패션업계 사람들은 종종 패션 브랜드 미우미우(Miu Miu)를 떠올리기도 한다. 사람들과 약속을 정하다 “미우미우에서 만나요” 하면 종종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것도 그 때문. 이곳은 여러 개의 룸이 있어 프라이빗한 식사는 물론 단체로 파티를 즐기기에도 좋다. 부드럽고 담백한 숙성 안심과 육즙이 풍부한 숙성 등심, 오로지 한우 사골로 육수를 낸 깊은 맛의 된장찌개가 일품이다. 고객이 원하는 정도로 셰프가 직접 구워주는 완벽한 고기를 맛볼 수 있다는 것도 탁월한 장점. 잘 구운 고기를 이천 쌀밥에 올려 먹는 초밥 역시 특색 있다. 배가 불러 그 초밥을 먹지 못하고 돌아선 날이면 유독 그 맛이 계속 생각날 정도! 토마토양파절임, 바질 페스토 등 고기 맛에 감칠맛을 더하는 독특한 소스도 매력적이다.서울시 강남구 언주로168길 20 | 02-549-8292

생활의 한 편, 대환영 뮤지션 달파란
생활과 섞이는 곳이 단골집 아닐까? 잠을 자고, 일을 하는 과정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곳. 내 경우엔 음악 작업, 그리고 그 작업과 연계된 사람들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부터 논쟁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 단골집이다. 연남동에 대환영이라는 술집이 있다. 아주 작은 곳이고 연남동 뒷골목에 있어 아는 사람만 간다. 연남동엔 지인이 많다. 음악과 영화, 미술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산다. 그들과 대환영에서 모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낮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엔 턴테이블이 있어 손님이 가져온 LP를 들을 수 있으며 때때로 즉흥적인 소규모 공연이 열린다. 최근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흥에 겨워 즉흥 파티를 열었다. 돌아가며 DJ를 하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낮부터 밤새워 흐느적거렸다. 이젠 생활의 한 부분이 됐다고 할까. 지치거나 쉬고 싶을 때, 잠시 빡빡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다.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로29안길 17 | 070-8712-2418

팔도의 정수, 월향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교수 문정훈
월향은 내게 훌륭한 놀이터다. 워낙 막걸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곳은 한국의 전통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월향은 팔도 각 지역의 막걸리를 음미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손님들의 체면도 확실히 살려준다. 학생들과 함께 가도 좋고, 친구들과 함께 가도 즐겁다. 특히 외국에서 온 손님과 갔을 때 막걸리에 만족하는 그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 이곳에 가면 의식(?)같이 행하는 게 있다. 8명이 한 조로 두 테이블을 붙여 앉는다. 그리고 각 지역 막걸리를 한 병씩 마시기 시작한다. 8명이면 한 잔씩 마셨을 때 딱 한 병이 사라진다. 물론 사이사이 각 지역 막걸리의 특성과 얽힌 사연을 나누는 것은 필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테이블 위를 빈 막걸리병이 빼곡히 채운다. 그 뿌듯함이란 오직 해본 사람만이 안다.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21길 30 | 02-723-9202

할아버지와의 연결 고리, 평래옥 CHS 기타리스트 최현석
“고조 날도 더우니까네 국수나 한 그릇 먹으러 가자야!”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평래옥을 자주 찾았다. 어린 시절에는 이북 오도민이 모여 왁자지껄 이야기를 주고받는 틈에 앉아 평양냉면을 먹곤 했다. 이북 사람들의 불같은 성격을 모두 받아주던 젊었던 주인아주머니는 한참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음식을 내주신다. 이제는 새로 지은 건물에 깔끔한 외관을 갖추었지만, 평양 시내 전경이 담긴 사진 덕분에 홀은 늘 친숙하다. 토요일 낮 한가로이 반주를 곁들이고 싶을 때면 이곳을 찾는다. 수육 한 접시와 녹두지짐에 소주 한잔을 가볍게 곁들인다. 옛날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두런두런 앉은 상 위에 이야기가 피어난다. 평양냉면으로 개운하게 배를 채우고 골목으로 나선다. 훤히 골목이 들여다보이는 을지로 이곳저곳을 구경하면 새삼 내가 서울 사람이라는 실감이 난다. 그래서 이곳을 찾을 땐 밤보다는 낮이 좋다. 서울시 중구 마른내로 21-1 | 02-2267-5892

저녁을 바라보며, 하얀집 소설가 손홍규
대학 시절 충무로 골목에 하얀집이라는 상호의 단골 술집이 있었다. 가격이 저렴하고 천장이 낮아 아늑하며 무엇보다 문학을 좋아하는 주인이 있었다. 대낮에 들어서도 낮술 마시는 패거리가 두어 테이블쯤은 꼭 있던 이곳에서 나 역시 처음으로 낮술을 마셨다. 여기서는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도 뭐라는 사람 하나 없었고 외려 흥이 오르면 누구든 노래하는 이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어 기꺼이 동행하기도 했다. 가두시위가 있던 날이면 최루 연기를 잔뜩 묻히고 들어온 이들로 그득해 여기저기서 재채기를 하고 눈물을 찍어내고 콧물을 들이켰으며 감정이 북받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 시를 읊으면 모두 숨죽여 기다렸다가 박수를 쳐주었다. 첫 소설집을 낸 뒤 찾아간 날에도 한참 어린 후배들이 내가 그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가장 다정한 낱말을 골라가며 서글픈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주인은 신문에서 기사를 보았다며 첫 책 출간을 축하해줬다. 나는 가방에서 책이 든 봉투를 꺼내 수줍어하며 건넸고 그이는 첫 장을 펼쳐 서투른 필체의 내 서명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오래전 외상 장부에 이름과 외상값을 기입하고 외상값을 갚기는커녕 새로운 외상이 늘어가도 타박 않던 그이의 고왔던 손등도 내 어머니만큼이나 주름졌으나 그이의 손바닥이 쓸고 가자 초라했던 내 이름이 한 방울 술이 떨어진 활자처럼 도드라졌다. 세월이 더 흘러 선배들과 그 술집을 다시 찾았을 때는 아직 햇살이 골목에 내려앉은 대낮이었으나 낮술 마시는 후배들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술집 내부의 풍경은 20년 가까이 변한 게 별로 없건만 우리는 서름서름한 그곳에서 평소보다 빨리 취해 해가 저물기도 전에 일어나야 했다. 주인이 바뀌었을 뿐인데 오랜 추억이 서린 술집이 순식간에 낯선 곳으로 변해버렸음을 인정하기 싫어서였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우리는 어깨에 내려앉은 식은 햇살을 털어내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 술집에 서린 추억은 그이와 함께가 아니고선 생기를 잃고 마는 추억이었음을 곱씹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낮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일어나 앉아 눈 비비던 저녁. 나는 갓 태어난 존재인 것 같은데 해가 저물고 저녁이 정수리까지 차오른 걸 보며 얼마나 서글퍼했던가. 모든 게 이미 늦어버린 저녁에 태어난 듯해 당혹하고 사랑하던 이와 약속한 일을 저버린 듯해 상심하여 눈 비비던 손등을 멈춘 채 그 손등에 스며드는 눈물이 왜 소주처럼 맑고 투명할 수밖에 없는지 헤아리던 어느 날. 서울시 중구 퇴계로86길 15-29 | 02-2234-5227

비밀스러운 대나무 숲, 투다리 국가 대표 프로 바텐더 김동욱
직업의 특성상 밤에 마시는 술은 왠지 일 같아 낮술을 즐긴다(낮술이 더 맛있다는 이유도 있다). 내게 단골집이란 방금 잠에서 깬 부스스한 차림으로 가도 부담 없고 차분하며 익숙한 공간이어야 한다. 이런 조건에 꼭 맞는 곳이 있다. 내가 사는 마천동엔 오래된 꼬치구이집 투다리가 있다. 10평 남짓한 좁은 공간으로 항상 사람이 그득하다. 프랜차이즈지만 이곳만의 분위기가 있다. 주인 부부 내외는 한결같이 친절하고 손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다. 여기에 이곳에서 무려 20년을 버틴 내공으로 모든 메뉴의 맛은 보장한다. 이곳은 내가 합법적(?)으로 처음 술을 마신 곳이다. 아버지가 ‘사나이의 술’을 가르쳐주겠다며 날 데려가신 스무 살 때부터 단골이 됐다. 무엇보다 이곳은 내게 대나무 숲 같은 곳이다. 사회에서 쉽게 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주위 눈치 보지 않고 친구들과 나눌 수 있다. 에너지를 거의 소진했을 때 친구들을 불러 도란도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서울시 송파구 마천로51길 5 | 02-448-3446
적당함의 미학, 아량 셰프 박준우
이곳에 다닌 지는 아마 6년쯤 되었을 것이다. 상호와 가게 주인이 달랐던 첫 해를 제외해도 5년은 되었을 거다. 임태훈 사장 본인이 6년 전 그 가게의 직원을 그만두고 독립해 지하에 크지 않은 중국집을 새로 열었을 때부터 나는 이곳에서 낮술을 마셨다. 지금은 자리를 잡아 1층과 2층을 모두 쓰는 건물로 옮겼지만, 공간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마음 편히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임 사장은 별로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닐 수 있겠으나) 적당한 인테리어와 역시 적당한 맛의 음식이 어우러진 적절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옥인동과 부암동 등 종로의 자그마한 동네 사이에서 나름 맛이 괜찮은 배달집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곳이니, 나쁜 뜻으로 듣지 말아주기 바란다(조금 더 호의적으로 말하면, 이연복 셰프의 목란이나 포시즌스 호텔의 유유안과는 또 다른 맛을 내는 훌륭한 중국집이다). 따로 브레이크타임이 없어 밥때가 대중없는 프리랜서 입장에선 아무 때나 술 한잔 걸치며 끼니를 때울 수 있다. 특히 고량주 작은 병 하나를 시켜 마시며, 고추기름 뿌린 간장에 라조기 한 점을 살짝 찍어 입어 넣으면 채워지지 않던 헛헛한 마음도 한결 나아진다. 그것이 고량주 때문인지, 성실한 사장의 아량을 품은 청요리 때문인지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2길 22 | 02-733-1999
에디터 <노블레스 맨>
일러스트 최익견